[이승율 칼럼] 중국 소수민족의 애환과 출구전략
[이승율 칼럼] 중국 소수민족의 애환과 출구전략
  • 이승율 동북아공동체문화재단 이사장
  • 승인 2020.09.22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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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침 일찍 서천식 회장께서 전화를 걸어 오셨다. CBMC서울영동지회 명예회장이시다. 박정희 정부에서 경주 보문단지조성계획을 입안할 때 건축부문에 참여하신 분이며 크리스천으로서 교회건축 설계에 명망이 높으신 분이다.

전화로 물어 오신 사항이, 서울영동지회에서 고려인CBMC지회를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알마티에 창립(2000년)하고, 10년이 지난 시점에 현지 회원들을 격려하고 재충전하기 위해 다녀오는 길에 톈산산맥을 넘어 중국 위구르 지역에 갔을 때의 일이다.
’서유기’에 보면 삼장법사가 인도 천축국을 가는 도중에 화염산이 있는 열사의 땅 ‘투루판’을 지나는 대목이 나온다. 우리 CBMC 일행들이 우루무치에 도착한 그다음 날 1박 2일 코스로 그곳을 관광했었다. 그때 느낀 바가 크셨는가 보다. 회고록을 쓰시려니까 그때 일이 잘 기억이 안 난다고 물어 오신 것이다.

실은 지난해에도 나는 집사람과 같이 우루무치와 투루판을 다녀 왔다. 북경 중앙민족대학에서 박사학위를 한 소수민족 출신 교수들(2006년 졸업자)과 함께 모임을 결성하고 지금껏 같이 활동해온 ‘민박회(민족대학 박사학위 동학회)’의 회장 자격으로 참여한 여행이다. 나는 연변대학에서 석사 과정(국제정치학)을 마쳤고 2003년부터 3년간 매월 북경을 오가며 박사 과정(민족학계 법학)을 거쳤는데, 그때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민박회 회원으로 가입했으며 연장자라는 구실로 본의 아니게 회장직을 맡게 됐다.

그러다 보니 1~2년 간격으로 한 번씩 중국 소수민족 지식인들과 교류하는 이 프로그램에 늘 동행해 왔다. 그런 가운데 소수민족지역 탐방 여행을 거듭하면서 중국에 사는 소수민족들의 애환을 깊이 이해하고 우정을 나누는 소중한 기회를 갖게 됐다.

최근에 시진핑 정부가 중국 소수민족의 문화를 박해하며 ‘중국몽’을 앞세운 중화주의 확산을 위해 무리한 통제 정책을 자행하고 있다는 기사(조선, 9/14)를 읽었다.

 “중(中)의 소수민족 문화 말살? 조선족 교과서 ‘한글 퇴출’”이라는 제목의 기사였다. 연변조선족사회에 대학(연변과기대)을 세우고 조선족 후예들뿐만 아니라 중국의 지식인들과 교류하면서 한중 간 청년교류와 비즈니스 협력에 매진해온 한 사람으로서 마음에 분노가 일어나고 이를 좌시할 수 없다는 의협심이 일어났다. 이런 참에 서천식 회장께서 위구르족이 집단 거주해 있는 우루무치와 투루판 지역에 관해 물어 오셨기에 느끼는 바가 남달라서 이 글을 쓴다.

중국 공산당 지도부가 획책하고 있는 이런 일련의 정책은 언젠가 제 발등을 찍는 자충수가 될 것이며, 이런 점에서 몇 가지 중국 소수민족사회를 위한 ‘출구전략’을 제시해 볼까 한다.

#2
그 전에 우선 그동안 민박회 회원들과 같이 다녔던 소수민족지역 중 몇 군데를 짚어보며 옛 추억을 상기해 보고 싶다.

첫째, 몽골족 자치구인 내몽고 지역에는 두 번 다녀 왔다. 한번은 2007년에 내몽고 자치구 수도 후허하오터(呼和浩特)를 거쳐 칭기즈칸 유적지가 있는 어얼둬쓰(鄂爾多斯) 에 갔었고, 두 번째는 2012년에 평소 관심이 많았던 홍산문화유적지 적봉(赤峯)을 다녀왔다.

어얼둬쓰시는 양모와 캐시미어 전시회로 유명한 곳이다. 특히 산양 털로 만드는 캐시미어는 중국에서 전 세계의 30%를 생산하고 이 중 70%가 어얼둬쓰에서 만들어진다. 이곳에서 생산된 고급원단의 품질이 아주 좋아서 유럽 유명 패션기업들이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다.

그리고 칭기즈칸 유적 관광지(칭기즈칸 능이 있으나 그의 묘는 없다)를 방문했을 때는, 그 첫인상이 지금은 비록 한족 중심사회에 편입되어 있지만 세계 최대의 정복국가였던 몽골제국의 역사성과 몽골인의 강인한 투쟁력과 기개를 잊지 않겠다는 듯한 결기가 느껴지는 분위기였다.

민박회 회원들 가운데는 내몽고 출신들이 많았다. 그 이유가 당시 중앙민족대학 총장이 몽골족이라서 그렇기도 했겠지만, 중국 소수민족 지역 중에는 세 번째로 면적이 넓고 희귀광물자원도 풍부하고 또한 섬유산업이 크게 발달하여 소득이 서부내륙에서는 가장 높은 수준이었기 때문이라 짐작된다.

거기에 더하여 한족 사회에 대한 대항심이 잠재되어 있어서 그들이 말하고 행동하는 면면을 찬찬히 살펴보면 과거 역사에 대한 향수만이 아니라 민족적인 정체성을 지키고 계승하는데 다른 어떤 민족들보다 자존심이 강한 것을 알 수 있다.

내몽고 탐방 중 두 번째로 갔었던 적봉(赤峯)은 홍산문화유적지로 유명한 곳이다. 특히 우리 한민족으로서는 결코 간과해선 안 될 곳이다. 왜냐면 그 지역 일대가 한민족의 원류이며 중국 역대 왕조의 시발점이라고 추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固城 李氏)의 20대 선조로 고려 말에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을 지냈던 이 암(李?)이 지은 ‘단군세기’와 그의 현손인 이맥(李陌)이 지은 ‘태백일사’를 중심으로 여타의 책(삼성기, 북부여기)을 묶어 1911년에 만주에서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던 개연수라는 분이 편찬한 책이 그 유명한 ‘환단고기(桓檀古記)’이다.

한국상고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준거할만한 유일한 문헌 자료이며 우리 한민족의 원류를 찾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잡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내몽고 동쪽 지역과 요하 유역에서 발굴된 문화를 ‘홍산문화’라 부르고, 적봉이 그 지역의 중심에 있다. 한마디로 ‘환단고기’는 이 ‘홍산문화’를 대변하는 역사서라 할 수 있다.

이 책을 수차례 읽었고 또한 이를 연구하는 재야 사학자들의 세미나에도 여러 번 참석한 바가 있었던 나로서는, 언젠가 현지를 답사해 보려고 소원했는데 민박회 동료 교수들과 함께 탐방(적봉대학 하스치무거 교수의 초청)할 수 있어서 더욱 좋았다.

이곳저곳을 다니며 보고 듣고 깨달은 바는 그야말로 꿈에도 그리던 여행의 체험적 소산물로 남아있다. 물론 박물관에 진열되어있는 유물과 전시 자료들은 대부분 후대 중국 공산당 역사연구기관들이 조정, 왜곡한 내용이 태반이지만 그나마 그렇게라도 현지를 방문하여 한국상고사를 접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은 순전히 ‘민박회’ 덕분이었다.

둘째, 연변조선족자치주를 방문한 것은 2008북경올림픽이 열린 8월이었다. 연길시를 거쳐 백두산을 오른 날이 바로 올림픽 개회식이 있던 날이었다. 나는 백두산을 숱하게 오르내렸지만 민박회 일행들은 연변대 전신자(민박회 부회장),손춘일(민족문화연구소 소장) 부부 교수를 빼놓고는 거의 대부분 초행길이었다.

새벽에 연길에서 출발하여 백두산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산정으로 올라갔다.그날 날씨가 너무나 청명하여 천지(天池)를 온전하게, 완벽하게 다 볼 수 있어서 다들 흥분상태에 빠질 정도였다. 더군다나 그날 밤에 올림픽을 시작하면서 펼친 그 웅장하고 화려한 개회식 TV 실황을 백두산 호텔에서 볼 수 있게 된 행운은, 우리에게 환상적인 꿈속에서 노니는 듯한 착각마저 느끼게 했다. 너무나 감동적이고 벅찬 감격에 겨워 온통 밤을 새우다시피 했다.

그날 밤 20명에 가까운 중국 소수민족 출신 교수들은 저마다 춤과 노래 솜씨로 자기 민족의 고유한 멋을 뽐내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마음으로 뭉치고 또 다짐했다. 이 우정을 영원히 변치 말고 지켜나가자고 결의했다. 그들은 올림픽 개최국 중국 공민으로서의 자부심은 물론이거니와 이에 더하여 개회식 프로그램의 상당 부분을 소수민족 문화를 소개하는 시간으로 할애함으로써 중국의 소수민족 우대정책을 재현코자 연출한 극적인 장면들을 보고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한 자부심을 한껏 실감하는 것 같았다.

55개 소수민족 행사대원들이 저마다 각 민족의 고유 의상과 문화를 떨치며 행진하는 모습은 그들에게 중국의 위대함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참으로 환상적인 밤이었다.

다만 이와는 대조적으로 그다음 날 하산하여 두만강변을 돌아오는 길에, 강 건너 생생히 바라보이는 북한의 헐벗은 강산에 대해선 조선족 교수들을 제외하고는 다들 무심한 것 같아서 속으로 아주 섭섭했다. 한반도 분단 현실에 대한 정보나 지식도 부족했겠지만 그들 소수민족 출신들은 남북문제에 대해 언급하기를 꺼렸고 중국 당국의 공식 틀에 맞춘 의견들만 제시하곤 했다. 이곳이 북한 접경지인 데다 연변조선족사회가 남북 양국에 낀 세대처럼 놓여있기에 정치적 이슈나 외교 문제에 대해선 될 수 있으면 대화를 피하려 했다. 이게 그들의 한계였다. 나는 그들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했다.

특히 신장 위구르 자치구, 티베트족 자치구, 몽골과 접경을 이루고 있는 내몽고 자치구 및 한반도와 접경하고 있는 조선족 자치주 지역은 국제정치적으로나 지정학적으로 매우 민감한 지역이다. 이 때문에 이 지역 출신들은 동병상련의 관계에 있으면서도 개인의 의견이나 자유의사를 드러내는 일을 금기시 하곤 했다.

두만강변을 돌아 다시 연길로 돌아온 다음 호텔로 들어가기 전에 연변과기대(YUST)를 방문했다. 1992년에 개교하여 벌써 13회 졸업생을 내고 있으며 13개국 외국인 교수들이 와서 자비량으로 봉사하고 있다는 사실에 무척 놀라워했다. 또한 그곳이 연길시 공동묘지 터를 헐고 건립한 캠퍼스인 데다 그 모든 재원을 한국 및 미국 크리스천들이 헌금하여 세운 대학이란 걸 알고 나서는 다들 얼마나 감동하고 신기해(?)하는지 모르겠다. 한마디로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땅으로 변화된 역사’ 그것이 연변과기대의 정체성이요 대학 이념을 상징하는 캐치프레이즈가 될 것이다.

셋째, 작년 여름에 민박회 회원 15명과 함께 위구르족 거주 지역인 신장자치구를 다녀왔다. 몇 년간 모임을 하지 못했다가 이번에는 무조건 신장으로 가기로 의견을 모았다. 북경 우전대학에서 위구르족 언어를 가르치고 있던 장궈원 박사의 남편이 우루무치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그들 부부가 벌써 몇 년 전부터 우리를 초청했으나 갈 수가 없었다.

그 사이에 여러 번 테러 사건이 일어났고 또 우루무치에 있는 위구르족을 지방으로 소개한 후 한족을 대거 입주시킨 시책으로 말미암아 위구르족 사회 분위기가 매우 흉흉했었기 때문이다. 몇 년째 간다고 했다가 못 가고 미루다가 지난해에는 무조건 강행을 한 것이다.

나는 그동안 두 차례나 우루무치와 투루판을 다녀갔기 때문에 위구르 지역의 상황을 어느 정도는 인지하고 있었다. 사태를 고려하여 우리는 여행 중에 매우 신중하게 처신을 했다. 그런데도 중국인들조차 분노를 느끼도록 만든 일들이 여러 번 일어났다. 중국 공안의 과도한 감시체제 때문이었다.

우루무치 시내 호텔, 식당뿐만 아니라 시장에서도 출입구를 통제하고 일일이 보안 검색을 했다. 심지어 우리 내외는 외국인이라서 그런지 별도로 여권을 검사하고 가방까지 뒤졌다. 동료들은 미안해하는 표정을 짓다가 나중에는 자기들이 먼저 화를 내곤 했다.

더 가관인 것은, 우루무치를 떠나 톈산산맥에 있는 천지(天地) 관광지로 올라가는 도중에 세 차례나 검문을 당했으며 심지어는 버스에서 내리게 하여 줄까지 세우는 일이 있었다. 분노하기 이전에 중국 당국이 위구르 지역에 대해 얼마나 엄중한 보안을 유지하고 있는지 실감이 갔고, 그만큼 이쪽 지역이 중국의 아킬레스건이란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됐다.

신장 지역 관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투루판 고성(古城)과 톈산산맥에서 흘러내린 지하수를 퍼 올려 고대 촌락을 이루었던 지역 일대, 손오공을 캐릭터로 하여 테마공원을 만들어 놓은 화염산 관광지, 그리고 사막(쿠부치 사막)에 가서 지프를 타고 모래밭 능선을 달리는 일이다.

투루판에는 고대 유적지가 많이 있다. 북서쪽의 우루무치와 남서쪽의 카슈가르, 남동쪽의 감소성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이다. 카슈가르를 지나 인도로 가는 길목에 있어서 불경을 얻기 위해 인도 천축국으로 떠났던 당나라 삼장법사가 화염산을 지나면서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평균기온 40도를 웃돌며 동서로 길게 뻗은 분지형 저지대라 매우 건조하고 고온이라서 사람 살기에 어려울 것 같아도 그늘에 들어가면 시원했다. 특히 이 지역에서 자연 상태로 말린 건포도는 세계에서 당도가 가장 높다고 일컬어지며 또한 그 맛도 뛰어나다.

나는 이곳 투루판과는 특별한 인연이 있다. 앞서 서두에서 소개했던 CBMC서울영동지회 팀들과 함께 카자흐스탄 알마티 여행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들린 곳이 이곳이었다. 그때 2010년 가을 투루판에 갔을 때, 고창고성을 구경한 후 매점에 들려 관광 상품을 사러 갔다가 거기서 15세 난 위구르 소녀 한 명을 극적으로 만나게 됐다.

당시 집사람이 상가 마당에서 그 소녀가 파는 풍물 한점을 사려고 돈을 꺼냈더니 선물로 드린다고 하면서 그냥 공짜로 주는 게 아닌가! 할 수 없이 고맙다고 말하고 버스로 돌아왔는데 얼마 있지 않아 그 소녀가 버스로 찾아와 집사람에게 쪽지를 건넸다. 자기 이름과 주소가 적혀 있었다. 그때부터 그 소녀와 우리 내외간에는 특별한 인연이 맺어졌다. 그녀를 영적인 자녀로 입양하게 된 것이다.

위구르 지역 여행을 마치고 서울로 귀환한 이후 며칠 동안 계속 묵상을 하는데 그 소녀를 잊을 수가 없었다. 왜 그는 지나가는 행인에게 자기 이름과 주소를 알려 주려고 했을까? 우리 내외는 그 소녀의 희망이 ‘한계로부터의 탈출’ 이란 걸 깨닫게 됐다. 마음이 아프고 갑갑해서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우루무치에서 유치원 사역을 하는, 고창고성 투어를 함께 했던 대구 출신 40대 K선교사에게 연락하여 두 가지를 주문했다. 일단 투루판으로 다시 가서 그 소녀를 찾아보고 부모를 만나 집안 형편을 살펴보라. 그리고 소녀의 희망 사항이 무엇인지, 또 그것을 도와주려면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대책을 세워서 알려 달라고 했다.

얼마 있지 않아 회답이 왔다. 소녀는 집안이 가난하고 어머니가 병들어 있어서 중학교에 다니다가 학업을 중단한 채 고창고성 관광객을 대상으로 풍물 장사를 해서 집안을 돌보고 있으며, 희망 사항은 공부를 계속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K 선교사와 의논한 후 그에게 전적으로 위임하여 학비와 생활비 일부를 지원해서 학교를 다시 다닐 수 있도록 조치를 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중순경, 소녀를 우루무치로 나오게 하여 크리스마스 선물을 잔뜩 사 들고 그를 만나러 다시 한 번 우루무치를 다녀 왔다.

우리 내외는 그 소녀를 ‘한나’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그리고 K 선교사에게 가족들의 전도를 위해 힘쓰게 했다. 위구르족은 거의 대부분 이슬람교를 믿기 때문에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K 선교사가 매월 투루판을 방문하여 한나와 그 가족들을 돌보며 헌신한 결과 한나와 그의 할머니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열매를 맺었다.

거기에는 숨은 일화가 있다. 한나가 다시 공부하게 된 것에 대해선 그 부모들이 무척 고마워했으나 성경 말씀을 전하는 일에 대해선 완강히 거절했었다. 그러다가 할머니가 손이 말리고 사지가 일부 마비되는 병이 와서 고통받고 있는 것을 보고 K 선교사가 매주 심방을 하여 기도하고 마사지해준 결과 한 달이 채 안 되어 회복됐다고 한다. 그로부터 할머니가 나서서 한나에게 성경을 가르칠 수 있도록 허용했고 본인도 함께 기도하며 따랐다.

이런 과정을 지켜보면서 우리 내외는 한나가 중학교를 마치는 대로 우루무치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도록 종용했고, 그리고 나중에 할 수만 있으면 연변과기대로 진학(특례 입학)한 다음 한국 유학까지 갈 수 있도록 해보자고 꿈을 심어 주었다. 물론 그 뒷바라지는 우리가 책임지고 하겠다는 뜻을 그의 부모들께 여러 번 전달했다. 그러나 그 꿈은 깨지고 말았다. 한나를 만난 지 2년 반 후, 이젠 고등학교에 진학해야 할 단계인데 그의 부모들이 아이 혼자 우루무치에 나가는 걸 허용하지 않았고, 집안 형편이 더 힘들어지자 다시 장사를 시켜 가족을 부양토록 했다. 그리고 서둘러 결혼시키려 한다는 소식까지 들었다.

당시 한나는 17살이었다. 위구르족은 일반적으로 조혼을 하는 경향이고 신부를 데려갈 때는 신랑 집에서 신붓값을 지급하고 데려가는 풍속이 있다. 계모인 한나의 어머니가 남편을 설득하여 한나를 일찌감치 결혼시킨 다음 그 돈으로 자기가 낳은 딸을 키우는데 보태 쓰려고 하는 것 같다는 K 선교사의 전언이었다.

결국, 반년 후 한나는 결혼했다. 그 후 우리는 소식이 두절 됐다. K 선교사도 임기를 마치고 한국으로 귀환했다. 더는 한나를 돌보거나 접할 기회가 사라지고 말았다. 위구르족 소녀의 ‘한계로부터의 탈출’을 돕고 지원했던 그 아름답고 슬픈 사연은 이렇게 끝났다.

K 선교사가 인천공항에 도착하여 대구로 내려가기 전, 음식 대접을 하려고 만난 자리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한나가 장로님 내외를 무척 보고 싶어 했어요. 사랑한다는 말을 꼭 전해 달라고 했습니다” 우리 내외는 그 말을 듣고 많이 울었다. 지금도 바람이 심히 부는 날이면 언뜻언뜻 투루판 고창고성의 먼지 풀풀 나는 길에서 그 여리고 어두운 표정으로 우리를 말없이 쳐다보고 있던 첫 만남의 기억을 잊을 수가 없다.

#3
민박회 회원들과 동행하며 중국 내 소수민족 주거지역을 둘러 보거나 관광을 다닌 사례는 여럿 더 있다. 북경 인근에서 학술캠프(중앙민족대 기진옥 교수 주관)를 열 때도 있었고 해남도 싼샤 호텔에 머물며 묘족과 여족 출신 전통문화공연단을 만나 춤과 노래를 배우기도 했다.

그보다 더 추억에 남는 일은 2010년 겨울방학 시즌에 16명의 인원이 한국에 와서 제주도와 경주를 집중적으로 관광하면서 우애를 나눈 일이다. 그때 그들은 각자 기행문을 써서 그 소중한 체험과 느낀 바를 기록( 모임 주제 : ‘한중문화교류와 다원문화사회의 형세’)으로 남겨 페이스북에 올려놓았는데, 1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그때를 생생히 기억하며 서로 정담을 나누곤 한다고 했다. 그래서 작년에 우리 내외가 우루무치에 민박회 여행을 갔을 때, 올해 다시 한번 한국으로 초청하겠다고 제안을 했었고 다들 너무나 좋아했는데 결국 코로나19 사태로 무산되고 말았다.

이 모든 것을 돌이켜 보면, 뜻밖에 중국에서 학위를 하고 연변과기대 사역과 CBMC실크로드사역 뿐만 아니라 ‘민박회’ 교수들과 함께 그들의 고향이나 연고 지역을 둘러보며 거기서 그동안 연구하고 발표했던 학술자료와 집필한 책을 나누며 포럼 방식으로 ‘지적 공동체’를 조성한 일은 내게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학문적 자산이 됐다. 지금 ‘동북아공동체문화재단’을 운영하는 배경에는 이들 중국 소수민족 지식인들과의 교류가 큰 산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과정에 매번 만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그들이 아무리 뛰어난 자질과 사고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자유롭게 표출하거나 실행하는 데는 눈에 보이지 않은 큰 장벽이 존재하고, 그 장벽에 부닥쳐 정신적으로 상당한 압박을 받고 있음을 감지하곤 했다. 그 근본적인 원인은 한족 중심의 중화주의로 채색된 공산당 일당 정치체제의 경직성과 전체주의적 경향이 대종을 이룬다.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중국어 수업 확대에 따른 소수민족의 반발이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중국에서는 소수민족 우대정책(*인구는 총인구의 8~9%에 불과하지만, 이들이 차지하는 면적은 중국 전체영토의 60%에 달함)에 따라 소수민족학교에 다니는 학생은 자기 민족 언어로 공부했고 대학에 진학했다. 그런데 앞으로 초등학교에서부터 한족과 같은 중국 표준교재를 쓰고 대입도 이런 방식으로 통일시키면 결국 초, 중, 고에서 각 소수민족 교육이 크게 위축될 전망이다.

이는 다름 아니라 시진핑 집권 2기가 시작된 2017년 19차 당 대회부터 국가 통일과 사회 안정을 위해 ‘교육’에서 민족 단결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몽’이라는 기치를 앞세워 “중화민족은 한 가정이며, 중화주의로 대동단결해야 한다.”라는 것이 그들의 국정 이념이고 정책의 요체다. 중국 지식인들이 갖는 불안감은, 이와 같은 공산당 국정 이념의 경직성이 자신들의 학문과 개인적 자유의사를 침해할 수 있다는 데 대한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새 학기가 시작된 9월1일부터 시행된 중국어 교육 강화조치에 몽골족 학생과 학부모들의 저항이 거세지고 있다는 뉴스(에포크타임스, 9/8)를 읽었다. 후허하오터 내몽고국립대학에 있는 우런 교수(’민박회’)와 그의 남편 걸투 박사(동경대 박사, 생명공학, 2008북경올림픽 성화봉송 주자)를 위시한 그 외 몇 분 교수님들의 안부가 염려된다.

그들에게 어떤 신체적 물리적 피해는 없겠지만 남달리 몽골족의 전통문화와 정체성을 중시하며 개인의 인격적 자유의지를 존중해 왔던 그들이 이런 한족 중심의 중화주의의 횡포에 정신적으로 얼마나 많은 곤혹감과 위축을 느끼고 있을지 모르겠다. 연변조선족사회도 예외가 아니다.

중국 공산당이 주도하는 ‘민족 통합 교육’의 여파가 코로나 팬데믹에 편승하여 전체주의적 감시체제의 통제를 강화하면서 초, 중, 고뿐만 아니라 대학교육과 지성사회 전반에 악영향을 미침으로써 소수민족 문화 말살이라는 위기를 맞게 된다면, 이는 중국 소수민족의 불행뿐만 아니라 중국의 국가 발전과 국민 수준의 향상과 성장에 재난적 부작용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중국 소수민족 사회의 한계와 애환을 묵상하다 보니 왠지 이번 기회에 이들을 위해 무엇인가 위로와 격려의 말을 남기고 싶어진다.

연변과기대 사역을 시작한 지 올해로 만 30년을 넘긴다. 며칠 전 9월 16일이 연변과기대 개교 28주년 기념일이다. 2학기 수업을 위해 한국에서 21명의 교수가 며칠 전에 전세기(傳貰機)를 타고 연길로 떠났다. 외국인 교수들은 여전히 코로나 사태로 통제를 받고 있어서 들어가지 못하고 한국인 교수들과 조선족 교수들이 수업을 이끌어 가야 한다.

그동안 오랜 기간 조선족 사회 교육선교와 창업 컨설팅에 주력해온 나로서는 점점 더 노골화되는 중국 정부의 소수민족 문화 말살 정책 (’민족 통합 교육’)을 지켜보면서, 소수민족이 살아나가고 발전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일까를 골똘히 생각하게 된다. 조선족 사회의 미래 발전은 향후 남북한 통일시대와 더불어 동북아시아 지평에 새 역사의 길을 열어가는 참으로 중요한 관건이요 추동력이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뜻에서 평소에 주장하고 격려해 왔던 몇 가지 조언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전통문화와 정체성을 지켜라.
둘째, 교육대계(敎育大系)를 바로 세우라.
셋째, 1인 1기 1사업을 장려하라.
넷째, 국제화(글로벌 네트워크)의 길로 나아가라.

이상 네 가지 조언은 조선족을 위시한 중국 내 모든 소수민족에게 공통된 ‘출구전략’이 될만하다.

우선 먼저, 역대 중국 정부가 소수민족사회를 우대하여 과거로부터 면면히 이어온 전통문화를 계승하며 정체성을 지키도록 한 일은 소수민족정책 분야에서 가장 돋보이는 국정 기조이며 중국을 하나 되게 한 지름길이었다. 그러나 그 ‘하나 됨’을 시진핑 집권 2기에 들어와 정치적 목적으로 획일화하고 수단화함으로써 오히려 후진적인 역기능 현상을 노정하고 있다. 이는 차후 중국 국가 발전을 역행시키는 일이 될 것이다.

인류 역사 발전의 보편적인 정의는 결코 일당 독재식 강압 정책으로 달성되는 게 아니라 인민의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개혁. 개방 정신이 존중될 때 비로소 얻어지는, ‘살아있는 유기체의 리듬’과 같은 생명력이 본질이기 때문이다. 등소평 집권 이후 ‘중국의 부상’을 가능케 한 원동력이 이로부터 태동했다고 본다.

그런 전통문화와 정체성 위에 교육 백년대계를 세우고 전인적 교육과 함께 평생학습 체계를 갖추는 일이, 집 건축으로 치면 기초석을 놓고 그 위에 기둥을 세우는 일과 다름없으리라. 그리고 각 개인의 재능과 역량을 개발하여 각자 최소한 한 가지 이상의 기술적인 툴(Tool)을 연마하고 활용함으로써 사회 전반에 걸쳐 각종 사업적 영역을 확장해 나가는 생산성을 유발할 때 그 사회는 성장과 발전의 대로를 걷게 될 것이다.

이러한 모든 여건과 요소를 국제적인 교류협력을 통해 강화하고 쇄신해 나갈 때라야 더 큰 민족으로, 소수민족이지만 자생력을 갖고 중국뿐만 아니라 세계 속에서 더 위대한 민족으로 거듭나는 기회를 맞게 될 것이다. 이것이 30년 사역을 통해 한시도 잊지 않고 염원하며 가르쳐온, 중국 소수민족을 위한 나의 사랑과 희망의 철학이다.

필자소개
연변과학기술대학, 평양과학기술대학의 대외부총장, 한국기독실업인회(CBMC) 중앙회장 역임
현 참포도나무병원 이사장, 신아시아산학관협력기구 이사장, 북경대동북아연구소 객원연구원, (중국) 중앙민족대학 민박동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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