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기고] 나는 이렇게 해외특파원이 됐다–3
[해외기고] 나는 이렇게 해외특파원이 됐다–3
  • 송광호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고문
  • 승인 2020.09.25 10: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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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동포 기자의 이민 40년 취재증언(證言)

러시아 초창기라 한국에서 모스크바은행으로 송금이 불가능했다. 특파원들은 인근 서방 도시인 프랑크푸르트와 헬싱키, 파리 등지에 구좌(미화)개설을 했다. 내 경우 가족이 있는 토론토에 예금계좌를 텄다. 홀로 모스크바에 상주하며 두세 달에 한 번씩 돈을 가져다 썼다. 아내는 매달 상당액의 미화가 통장에 입금되자 “거기 오래 있어도 좋으니 돈만 계속 부쳐주면 된다”고 만족해했다.

한편 전임자 없는 초대특파원이라 사무실 등 해결이 난감했다. 경쟁자인 동료특파원들보다 외국 특파원을 찾아 조언을 구했다. 그들은 한국중앙지, 지방지를 구별 안 해 편했다. 한국 특파원으로 족했다. 토론토의 글로브 앤드 메일(Globe & Mail) 신문과 월 스트리트 저널 특파원과 가끔 만남을 가졌다. 나보다 연상인 그들은 언제나 여유로운 모습이라 믿음직했다.

“나는 토론토에 거주하는 한국 신문특파원이다. 러시아 말도 모르고 전임자가 없어 막막한 심정이다. 여기 선임자로서 참고 얘기를 듣고 싶다”고 솔직히 털어놨다. 캐나다 John기자는 “나도 러시아말은 잘 모른다. 일단 매일 돌아가는 상황 파악은 해야 하니 속히 CNN TV 설치부터 해라”고 조언했다.

월스트리트 저널의 클라우디아 로제트 특파원과는 여러 도움과 정보를 공유했다. 그녀는 탈북자 동향에 관심이 많았다. 북한 벌목공들이 있는 하바롭스크(시베리아 관문)취재를 다녀와선 일부 사진을 제공하기도 했다. 하루는 A 탈북자 얘길 꺼내며 “탈북자는 신분보장이 안 돼 위험하니 여기 유엔 HCR(난민기구)에 등록시키는 게 좋겠다”고 의견을 냈다. 그때 나는 모스크바에 유엔난민기구가 존재하는 줄조차 몰랐다. 주모스크바북한대사관에선 벌목공 탈북사태가 이어지자 그들 체포를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온통 찾아다닐 때였다.

레베데프 비망록소개(1995년)
레베데프 비망록소개(1995년)

우리 3명(두 특파원과 A 탈북자)은 유엔방문 날짜(D-day)를 정했다. 아침 일찍 북한대사관 감시를 피해 유엔난민기구로 들이닥쳤다. 깜짝 놀란 유엔에선 불시에 기자 출입은 허용 안 된다며 나만 탈북자 통역자로 받아줬다. 유엔난민기구 이사벨 담당자는 “북한인의 유엔 난민등록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밝혔다. A 탈북자에겐 “북한출생에서 이 자리에 올 때까지 그간 경과를 상세히 말하라”고 요구했다. 내겐 “영어와 불어 중 택해 통역하라”고 했다. 2일간의 난민등록과정을 겨우 끝내니 곧 다른 B 탈북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탈북자끼리는 서로 은밀히 소통하는 듯싶었다.

두 번째는 난민등록 마무리 때 미국 파송 한인 목사에게 인계하고 손을 놓았다. 탈북자 돕는 일에만 매달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가 1994년 김영삼 정부 시절이다. 그해 7월엔 김일성 주석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모스크바 유엔에 등록된 이들 2명은 다음 해 초 무난히 한국입국에 성공한다. 정식 첫 유엔난민기구 창구를 통해 자유대한 품에 안긴 첫 러시아 탈북자들이다. 이들을 개시로 하나, 둘씩 수십 명의 탈북자가 차례로 한국행이 실현됐다고 들었다.

그로부터 근 20년 세월이 흐른 지난 2013년. 세계인권의 날(12월10일)에 나는 대한민국인권상 표창(금일봉과 스위스 시계)을 받았다. 당시 유엔등록 첫 B 벌목공이 뒤늦게 국가인권위에 “당시 모스크바 특파원이 은인”이라는 서한 내용과 유엔등록서류(1994년)를 증거물로 제출해 이뤄진 인권상이다. B는 한국에 나가 대기업취직 후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자유로운 삶을 만끽하고 있다.

강원일보 방북기(97년 9월)
강원일보 방북기(97년 9월)

러시아 기자들과 교류도 잊을 수 없다. 특히 평양 특파원을 역임한 러시아국제방송국 끄리뜨브 부장과는 자주 만나 보드카(러시아 독주)를 즐겼다. 보드카는 어느 술잔 크기든 첫 잔은 단숨에 들이켜야 하는 러시아 습성이 있다. 그는 한번 가까워지니 친구처럼 대해 주었다. 하루는 해방 때 신탁통치 기간 당시 평양에 진주했던 소련군 사령관 근황을 물었다. 며칠 후 끄리뜨브 부장은 “해방 당시 3년간 북한 군정 책임자였던 레베데프 정치 사령관을 만나보라”고 연락처를 줬다.

전화하니 레베데프 장남이 “부친은 이미 사망했다”며, “집에서 만나자. 오후에 꼭 스카치위스키를 들고 오라”고 외쳤다. 그는 오랫동안 보관했던 부친 故 레베데프 비망록 4권(1945-1948)과 당시 김일성 관련 사진 등을 건네줬다. 러시아 외무성에서 근무하다 은퇴했다는 그는 호방한 성격으로 영어가 유창했다. 기분이 좋아 둘이 위스키 두 병을 금세 비웠다. 이 비망록 내용과 당시 사진 자료들을 지방 5개 신문에 연재했다. 이로 인해 예측지 못한 그해의 한국신문상을 수상했다. 당시 상금이 3백만 원이다.

어느 날 역시 평양 특파원으로 북을 다녀온 프라우다紙 기자를 만났다. 그는 대화 중 “해방 후 북한군 창설 모체는 관동군에서 석방된 일부 포로병들”이라고 주장했다. 관동군 출신 북한 고위 장성 이름도 알려주었다. 북한군 관련 대화를 나누며 머릿속에는 ‘아, 모스크바 어딘가에 옛 관동군 서류가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박혔다. 정보 노출을 피해 은밀히 수소문한 끝에 러시아국립군사문서보관소를 찾게 됐다.

국립문서보관소는 꼭 도서실 같은 구조였다. 즐비한 선반엔 두꺼운 서류들이 잔뜩 먼지가 쌓인 채 놓여있었다. 한 선반에서 무작위로 꺼낸 서류 가운데 조선인 포로병 이름을 발견했다. 아, 그때의 깊은 감회를 누구 알랴. 이 관동군 서류는 일본과 러시아 두 나라에만 보관된, 한국엔 존재치 않는 자료들이다. 이 관동군 포로 증명을 위해 가족들은 한국 정부를 통해 일본에 조회하는데 1년 이상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1992년 이전의 소련과는 국교가 없어 일본을 통해서만 확인 절차를 밟고 있었다.

관훈클럽 국제보도상 수상 소감발표 1996년
관훈클럽 국제보도상 수상 소감발표 1996년

타타르스탄 출신의 국립소장은 “전쟁포로 서류는 일반적으로 국가끼리 협의 사항인데 어째 너희 신문사에서 먼저 나섰느냐”며 의아해했다. “지난번 독일 정부에도 2차 대전 포로병 자료를 협조해 준 적이 있다”고 한다. 또 “관동군은 한국, 일본군이 한데 뒤섞여있어 작업이 힘들다. 따로 한인명단을 수작업으로 가려내야 하니 3개월 이상 시일을 요한다”고 난색을 표명했다. 작업 자체도 근무 시간 외 일이니, 비용을 미화로 지불해야 된다는 것이다. 국립소장견해를 본사에 전하니 “아주 귀중한 자료이니 가능한 금액을 조정해 속히 진행토록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국립소장과는 타협이 잘 돼 일이 순조롭게 진행됐다. 드디어 반세기 이상 묻혀있던 조선인(한인) 포로병 분류작업이 끝났다는 소식이 왔다. 총 6,334명 징병 포로명단이 세상 밖으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해 8.15 광복절 날. 지방 5개 신문지는 관동군 한인명단을 1면 톱기사로 대서특필했다. 중앙지에선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특종 보도였다. 특히 부산일보와 대구매일신문, 대전일보는 6,334명 포로병명단과 관련 내용을 특집으로 보도해 세인의 시선을 끌었다. 오랫동안 명단 확인을 못 해 고심하던 국내 관동군 포로 가족들은 환호했고, 전국 산재해 있던 관동군 출신(삭풍회) 멤버는 재결집의 계기가 됐다. 이 명단발굴로 역시 뜻하지 않던 관훈클럽 국제보도상을 수상했다. 역시 상금이 3백이었다.

지방신문(모스크바)에서 비중 있는 언론상을 연거푸 수상하니 다소 위신이 섰다. 그러나 알고 보면 평소 외국 기자들과의 활발한 교류로 인한 요행수 아니던가. 모스크바 공동특파원(초대/2대) 임무는 1997년 북한취재를 마지막으로 끝났다. 1996-97년은 북한에서 배급도 끊기고 아사자가 속출하던 시기다. 그때 대동강호텔에 묵고 있었다.

필자소개
(사)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전 대표
(사)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고문(현재)
(사)대한언론인회 국제교류위원회 간사(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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