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7] 원산에서 우연히 재일북송동포와 마주쳐
[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7] 원산에서 우연히 재일북송동포와 마주쳐
  • 송광호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고문
  • 승인 2020.11.02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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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어떻게 바뀌어왔으며, 또 어떻게 변화해 갈 것인가? 1989년 이래 북한을 8차례나 방문해 취재한 송광호 토론토 주재 언론인이 방북 때마다 보고 느낀 점들을 시리즈로 정리했다. ‘바뀌어온 북한’에 초점을 맞춘 이 글은 현재와 같은 남북경색국면에서 긴 눈으로 북한의 새로운 변화를 조망하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편집자주>

평양 대동강 아침운동
평양 대동강 아침운동

사리원에서 외조모 친척을 만났다. 방북 당시는 생각도 못 했던 만남이었다. 외조모조카인 장재웅(이천군) 노인은 두 아들과 함께 사리원 3.8려관(호텔/북에선 숫자로 건물 등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많음)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이는 70에 가까웠고 동행한 두 아들 중 한 명은 나보다 나이가 위였다. 그들은 전형적인 시골 농부였다. 작업복 차림으로 단정했으나 구두 대신 운동화를 신었다. 뒤늦게 알았지만, 세상 밖 물정이 무척 어두웠다. 커피라든지 콜라 등 탄산수 음료는 아예 몰랐고 본 적도 없었다. 생전 고향 북 강원 시골 밖을 떠나본 적 없는 사람들 같았다.

노인은 갑자기 캐나다에서 웬 친척이 찾는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 한다. 남쪽 서울에 살던 외조모 손자의 평양방문은 상상도 못 했다는 것이다. 부랴부랴 산골 토종꿀을 단지에 담아 선물로 들고 왔다. 나는 준비한 게 없었다. 갑작스러운 만남의 해프닝으로 상견 자체도 어색했고 뭘 어찌할지 몰랐다. 친척이라고 해도 눈물도 나지 않았고 별 할 말도 없었다. 족보로 따지면 5촌 관계가 된다고 하나. 쓸 돈 얼마를 남기곤 주머니를 털었다. 미화 9백 달러를 겨우 전했다. 여유가 없으니 어쩌랴. 그나마 미화가 북에선 위력을 발하던 시기라 다행이었다.

꿀단지로 인해 해외여행에 무척 애를 먹었다. 포장 문제로 꿀이 새어 나왔기 때문이다. 노인의 갸륵한 정성을 생각하면 어떻게든 캐나다 집까지 가져가야 했다. 다음 방북 때는 취재 기간에 틈을 내 친척면회 신청을 했다. 주로 원산에서 만났다. 북강원도 수도인 원산은 원래 함경남도에 속한다. 해방 후 46년 9월 북강원도 수도가 된 도시다.(나중 함남 문천 시까지 강원도로 편입돼 북강원도에는 2개 시가 있다) 강원도는 유일하게 남북으로 갈려 있어, 북강원도 취재를 위해 원산은 필수방문 지역이었다.

원산에서-함흥이정표
원산에서-함흥이정표

평양에서 원산까지는 약 200km. 택시 값이 미화 440달러다. 북경에서 평양까지 항공료 300여 달러에 비하면 무척 비싼 가격이다. 한번은 북한 최대농대인 원산농업대학교와 원산예술학원장과 인터뷰했다. 원산 동명관 호텔에서 예술원장과 안내원 등 4명이 저녁 식사를 했다. 식사비가 250달러가 나왔다. 평양이라면 100 달러 남짓할 텐데 바가지요금 같았다. 현대그룹 고 정주영 회장이 북강원도를 다녀간 훗날이지만 나를 정 회장처럼 재력가로 착각했는지. 음식값 갖고 왈가왈부할 수는 없었다. 또 지금이야 전기사정이 나아졌겠지만, 한밤중 룸에서 한창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갑자기 전기가 나가 당황했다. 그만큼 전기사정이 안 좋았다. 암흑 가운데 방에서 식사를 한 경험도 있다.

북 강원취재 중 정주영 현대 회장(고향 통천)이 옛 애인과 유복자인 친딸(43년생)을 만났다는 정보를 접했다. 북 강원도청공무원이 딸 가족 주소 등 자료를 제공해줬다. 당시 그 내용을 조선일보 가정조선(현 여성조선 전신) 잡지에 특종기사로 게재했다. 그 스토리는 잠깐 뒤로 미루려고 한다. 그 후 1996년 모스크바 특파원 당시 정 회장 친척이 탈북한 사실이 서울중앙지에 1면 톱기사로 실린 것을 봤다. 같은 가족관계인지는 확인 못 했다. 북 강원도취재 중 여분으로 발굴된 지난날의 기사 얘기다.

외조모조카 친척은 숫자가 차츰 늘었다. 원산에서 만날 때는 함경도 명천(명태로 유명)에서 친척이란 한 노인이 북어를 싸 들고 왔다. 명천 탄광서 일하는 그는 원산까지 교통편이 힘들어 고생고생하며 찾아왔다 한다. 7-8명이 모이니 계획(예산)에 차질을 빚었다. 원산은 관광도시라 그런지 음식값이 비싼 편이다. 오래전인데도 식사요금이 3백여 달러가 나왔다. 친척 장 노인이 펄펄 뛰고 흥분해 오히려 진정시키느라 애썼다. 시골 빈곤층으로선 1달러도 귀한 판에 식사비가 3백 달러가 나왔으니 깜짝 놀랄 만했다.

원산 기차역
원산 기차역

아쉬운 것은 여러 친척이 한데 모였으니 각 개인과의 진솔한 대화는 힘들었던 점이다. 잠깐 식사와 가족 여흥(노래)을 갖고 송도원에서 사진을 찍고, 다음 만남을 기약해야 했다. 헤어질 때마다 언제 다시 조국(북한)에 오느냐고 물었다. “글쎄요. 조국에 무슨 국제행사가 있으면 신청하고 승인을 받고 오지요. 제 맘대로 아무 때나 방문할 수 없어요.”

언젠가 평양에 국제청소년태권도대회가 열릴 때다. 평양 서산호텔에 묵었는데 친척 만남을 호텔 근처로 주선해 줬다. 이때 놀란 것은 수십 년간 단 한 차례도 평양방문을 못 했다는 사실이다. 서너 시간 만남 후에는 다시 기약 없는 시간을 보내야 한다. 수년이 걸릴지 또는 기회가 다시 안 올지도 알 수 없다. 방북이 힘든 것은 내 기자 신분 때문이기도 했지만, 평소 해외친북창구나 북한 간부들로부터 미움을 산 이유도 있겠다. 토론토 경우 북을 다녀온 이산가족들은 따로 그들끼리 그룹모임을 갖고 친북창구를 통해 북한과 연락했다. 그들은 남과 북을 자유로이 방문한다. 어쨌든 수차례 내 방북취재를 용인해 주고 친척까지 찾아준 성의에 고마움을 표한다.

내겐 가까운 친척이든, 먼 친척이든 상관없다. 일단 그들과 인연이 맺어진 이상, 지속적인 만남을 갈구하는 그들의 소망을 저 버릴 수 없었다. 산골에 사는 촌민들에겐 이념 문제를 떠나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들로 보였다. 또 산촌이라 건뜻 하면 자연재해(가뭄이나 홍수(큰물))피해가 심했다. 친척과는 두세 서너 번 만남의 기회가 있었으나 잘 대해주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왜 좀 더 세심한 배려를 못 해주었는지 후회스럽다. 세계에 우리처럼 수십 년 분단으로 핏줄이 갈라진 이런 기막힌 나라가 어디에 있는가.

원산 송도원 명사십리 해당화
원산 송도원 명사십리 해당화

일제강점기에도 혈육이 갈린 이런 비극적 환경은 없었다. 어느 이산가족은 북한 가족 찾기를 목적으로 아예 이민 온 사람도 있다. 해외동포 경우 영주권자나 시민권자는 북한방문이 일단은 자유롭기 때문이다. 지난 1987년 노태우 대통령의 7.7선언인 해외동포 북한방문 허용이 정식 선포된 이래 엄청난 숫자의 북미주 동포가 북한방문 물결에 합류했다.

2000년대가 지나 친척 장 노인이 세상을 떠났다. 방북을 돕던 캐나다 최홍희 국제태권도총재 역시 갑작스러운 별세 이후 방북 기회는 더욱 힘들어졌다. 이천군의 한 친척으로부터는 가끔 편지가 날아들었다. 내용은 단순한 안부에 불과했으나 기다리는 마음이 절절히 묻어났다. 또 내가 기자 신분이니 문필전사로서 해외 거주라도 경애하는 장군님을 위해 늘 앞장서 달라는 말을 꼭 덧붙였다. 정말 이해 못 하는 구절은 우리 민족을 꼭 ‘김일성민족’이라고 부르는 점이다. 한 민족이나 조선민족으로 칭하지도 않았다. 아마 북에선 학문적으로 김일성민족이라고 가르치는 것 같다. 다만 방북신청서 민족구분란에는 ‘조선족’으로 기재한다.

두 번째 방북 때다. 최홍희 태권도총재와 함께 평양 청류관(신선로 요리 전문)에서 점심 초대를 받았다. 북한 고위급 일부인 사와 해외대표 등 10여명이 자리를 했다. 대부분 70세 전후 노인들이다. 식사 중 방에서 끽연이 불편해 옆 베란다로 나오니 한 중년 사내가 먼저 연기를 뿜어대고 서 있었다. 자연스레 대화를 나누니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왔다 한다. 서울 말씨다.
 

원산백화점
원산백화점

“전 토론토에서 왔는데 평양은 생소하네요. 혹시 학교는 어느 고교를 다니셨나요?” “서울사대부고요.” “네? 저도 부고인데. 전 17회입니다.” “아, 그래요? 난 13회요. 삼성 이건희와 같은 동기이지. 한국 있었을 때도 삼성에서 부장으로 일한 적이 있고.” 단 한 명 아는 이 없는 북한 땅에서 동문을 만난 기쁨은 컸다. 그는 북으로 망명한 최덕신 전 외무장관(서독대사 역임) 장남이었다. 최 선배 또한 무척 반가워했다. 따로 만나 그가 먼저 다녀본 북한 곳곳의 생생한 경험담을 들려줘 북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됐다. 나중 최선배 어머니인 고 류미영 천도교 청우당위원장(당시 북한 서열 22위)도 소개해줘 가끔 류 위원장과 둘이 쟁반 냉면을 함께 하곤 했다. 류 위원장은 북한이산가족 북측단장을 맡아 서울을 방문한 적도 있다. 최 선배와는 그 후 내가 모스크바 특파원으로 상주할 때 가끔 프랑크푸르트공항에서 만났다. 수년 전 최 선배나 어머니 류 위원장도 세상을 떠났다.

수차 방북을 하다 보니 지속적인 북의 변화를 감지했다. 서울에선 진작 오래전(1969년)에 사라진 시내 전차가 평양에는 1991년에 새로 등장했고, 서울에선 못 본 2층버스가 평양에 운행됐다. 서울 거리 곳곳 구형 구름다리가 나중 평양에도 나타났다. 인구 규모에 따른 교통수단과 주민편리 수단으로 보인다. 지금은 거의 활용을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평양은 낮이고 밤이고 버스, 전차 등 대중교통에는 늘 주민들이 꽉 차 있었다. 새로 김정은 정권이 들어선 뒤 평양은 건물 형태부터 급속도로 현대화됐다. 2010년 이전과 비교하면 도시 모양새가 확 달라진 모습이다. 방북 경험자는 그간 평양이 천지개벽이 됐다는 평을 했다.

원산 문화회관 (광석동 옛 교회당)
원산 문화회관 (광석동 옛 교회당)

북한주민과는 만남 자체가 힘들었다. 개별적인 대화는 더욱 기대할 수 없었다. 친척을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 단체 만남 속에 사적 얘길 나눌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차라리 호텔에서 매일 식사 시간마다 만나는 (조)총련 사업가들이 편했다. 그들은 같은 자본주의하에서 생활해 그런지 솔직했고 꾸밈이 없었다. 도쿄와 오사카 등지에서 방북한 재일동포(총련)들이다. 호텔도 재일 사업가들은 1등 실을 활용했다. 평양려관(호텔)에 숙박할 때는 일본 고베에서 온 노인사업가와 가까워졌다. 수산물무역으로 자주 평양에 온다고 한다. “왜 무역 거래를 한국보다 북한을 택했습니까. 무역업은 자본주의 국가가 자유롭고 편하지 않으세요?” “사실 고민을 많이 했지요. 공화국(북한)은 자유는 없지만, 민족성이란 게 있지요.” 그럼 남쪽에선 민족성이 전혀 없다는 말인가? 하고 반론을 펴려다 그만뒀다.

오사카 거주 양광우 사장에겐 일본에서 신세를 졌다. 그는 평양 곳곳에 여러 사업체를 두고 북한을 왕래하고 있었다. 북한의 헐벗은 산림을 위해 매년 10만 그루 묘목을 북에 무상공급을 한다고 전했다. 또 알고 보니 친동생 양래민은 평양봉수교회에서 만난 전도사(안내원)였다. 이후 그는 교회 직책을 떠나 형 사업을 돕고 있다고 들었다. 나는 형과 동생을 따로 알고 있었다. 양 사장 동생은 일본 북송교포로 평양에 온 젊은 세대에 속했다. 그를 특별히 기억함은 첫 평양봉수교회 방문 시 “예수를 잘 믿으십시오”하고 말한 유일한 북한인이었기 때문이다. 방북한 해외성직자들조차 평양봉수교회, 칠골교회, 장충성당 등 종교기관은 형식만 갖춘 해외용 종교기관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이라고 본다.

평양 2층 버스
평양 2층 버스

북한주민과의 접촉 기회는 우연히 다가왔다. 원산방문 시 송도원 호텔 라운지에서 한 중년여성(재일북송동포)과 마주친 것이다. 오전에는 취재 약속이 없어 송도원 호텔 상점을 어슬렁거리고 있던 참이다. 갑자기 밖에서 긴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예전 서울에서 자주 듣던 민방위훈련 사이렌소리다. 안내원이 밖으로 나가지 말고 잠깐 호텔에 머물라고 했다. 그 통금시간이 오래 지속된 것 같다. 마침 함흥 거주 부인이 송도원 호텔에 들렀다가 역시 발이 묶인 것이다. 호텔에는 손님이 거의 없었다. 라운지 소파에 둘이 앉아 30분 이상 그 여성의 북한 삶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리영실(가명). 46세. 주소 함남 함흥 동흥산 구역 은흥1동 19반(북에선 ‘번지’ 대신 ‘반’을 사용한다.) 재일동포인 그녀는 일본에서 고교를 마치고 1965년에 북송선을 타고 북에 영주귀국했다. 북송 후 그녀는 원산사범대학 어문학부를 졸업하자 역시 북송재일동포인 고교 동기동창과 결혼했다. 그녀 남편은 당시 당 사업의 주요 일꾼으로 근무 중이고, 그녀는 직장을 안 가진 채 집에 남아 있다고 했다. 일종의 전업주부다.

평양 구름다리
평양 구름다리

그녀의 인생 스토리를 옮긴다. 그녀 뿌리(고향)는 전남 광주다. 교육자 집안으로 태어나 아버지는 6.25전쟁 이전 일본으로 건너갔다. 4살 때 친삼촌이 의용군이었던 관계로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부산에서 일본으로 밀항했다. 그때부터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이 시작됐다고 한다. “어릴 때였지만 일본에서 고생은 말도 못 할 정도였어요. 아버지는 결핵 환자였고, 어머니는 외국인등록을 못 한 탓에 감옥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그녀는 매일 집에서 울었다고 한다. 부모가 요구하는 조선학교에 가기 싫어서였다. “어린 나이였지만 조선학교는 일본에서 멸시당하고 있었어요. 집에서 학교 거리도 멀었고요. 하지만 우리 집 형편으론 어쩔 수 없었지요.”

당시 조선학교는 전교생이 모두 50명뿐 이었다. 그녀가 11살 때 어머니는 외국인 등록법 위반으로 다시 1년간 일본 감옥에서 지내야 했다. 그녀가 북으로 가기까지 15년간 일본 생활은 고생으로 점철됐던 시기였다고 회상했다. “그래 북으로 와서 어떻습니까. 꿈이 이루어졌나요?” “원래 제 꿈은 아나운서가 되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일본에서 생활한 탓에 액센트와 발음에 문제가 있어 일찍 포기했어요. 결혼 후 ‘자체 만족’으로 살고 있지요.” 그녀 아버지가 지난 72년 일본에서 사망하자 집안이 이국땅에서 혁명사업을 했다고 인정받아 ‘열사 가족’으로 돼 있다고 전한다. 그러면서 함흥 관련한 내용을 이어갔다.(다음호에 계속)

필자소개
강원도민일보 북미특파원,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고문
대한민국 인권상 수상, 관훈클럽 국제보도상 수상, 한국신문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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