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9] IMF 사태로 한국 출렁될 때 북한은 식량난으로 난리
[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9] IMF 사태로 한국 출렁될 때 북한은 식량난으로 난리
  • 송광호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고문
  • 승인 2020.11.24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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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어떻게 바뀌어왔으며, 또 어떻게 변화해 갈 것인가? 1989년 이래 북한을 8차례나 방문해 취재한 송광호 토론토 주재 언론인이 방북 때마다 보고 느낀 점들을 시리즈로 정리했다. ‘바뀌어온 북한’에 초점을 맞춘 이 글은 현재와 같은 남북경색국면에서 긴 눈으로 북한의 새로운 변화를 조망하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편집자주>
 

양산사용이 많은 평양 여성들
양산사용이 많은 평양 여성들

두 번째 검문(검색)에 걸린 것은 지난 2006년 평양공항 출국 때였다. 출국장 X레이 검사 시 셔츠 주머니에 들어있던 조그만 메모지로 인해서였다. 통과 직전(모든 물건을 꺼내 놓을 때) 노트 종이가 나온 것이다. 실상 단순 메모에 불과한 종이였다. 검색원(보위부)은 내용을 한번 훑어보더니 따로 나를 옆으로 세웠다. “안내원은 어디 있소? 부르시오.” 출국장 밖에서 지켜보던 안내원이 달려왔다. 나는 검색원 손의 종이를 가리켰다. 안내원이 종이에 손을 대려 하자 검색대원은 그 손을 ‘탁’ 치며 “가만있어요”라고 소리친다. 메모 내용을 세밀히 살피고 설명을 들은 뒤 종이만 압수한 채 우리(나와 안내원)를 보내줬다. 안도의 숨을 쉬고 있는데 또다시 나를 부른다. ‘또 무슨 일인가?’ 그는 한결 부드러운 태도로 “실은 종이에 쓰인 ‘군대’ 글자 때문이요” 한다. 그제야 이해가 갔다.

북에선 군인 관련해 무척 민감하다. 한 미주교포는 신혼부부 북한군인 사진을 찍었는데, 호텔 짐을 보니 그 사진만 분실됐다고 한다. 내금강(금강산) 삼일포에 갔을 때다. 큰 식당 앞에 주차한 ‘검은색 번호판’ 표시 자가용이 보였다. 사진을 찍으려 하자 안내원이 난색을 보인다. “그건 군대 차인데 시끄럽게 만들지 맙시다”하고 만류해 그만둔 적이 있다.

유원지 정류장 휴식처
유원지 정류장 휴식처

출국 공항에서 걸린 메모지 건은 어처구니없다. 그해 방북 때는 평양 서산호텔(30층)에 묵었다. 2000년도부터 국제태권도행사가 평양에서 자주 열려 체류 장소가 체육촌(태권도전당, 축구경기장 등)에 가까운 서산호텔로 지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평소 나는 위장이 안 좋았다. 여행 시에 늘 상비약을 갖고 다니지만 마침 배탈 난 것이 쉽게 낫지 않았다. 호텔 측에서는 5층에 한의사가 있다고 알려줬다. 호텔 방 어디에든 한의장소 표시는 없었다. 복도는 전력난 탓으로 컴컴했고, 방 찾기도 쉽지 않았다.

30대 후반 한의사는 침을 맞자며 10센티 남짓한 대나무 장침을 꺼내 든다. 겁이 덜컥 났지만 거부할 상황이 아니었다. 침이 위생적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에라 모르겠다. 죽기야 하겠는가.’ 눕혀놓고 장침으로 배 가운데를 깊이 찔렀다. 어쨌든 좀 나아졌다. 침 한 번에 미화 10달러다. 그 후 서너 차례 그와 접촉하며 친해졌다. 그때 한의 경력을 듣고 간단히 메모한 종이였다. 그 속에 군대 복무가 한 줄 적혔는데 그게 문제가 된 것이다. 그 정도로 북에선 군 관련해서 엄청 신경을 썼다.

방북 횟수가 늘어나면서 눈 익은 안내원이나 접대원(봉사원)이 아는 체하며 반긴다. 동무란 말도 자주 사용하게 됐다. 한 상점 접대원에게 “동무, 저것 좀 봅시다”하니 옆 점원이 내 ‘동무’란 소리를 듣고 말 억양을 고쳐준다. “아니야요. 기렇게 부르는 게. 동‘무’ 데것 좀 봅세다 해야디.” 하며 ‘무’에 악센트를 넣는다. 모두 한바탕 웃었다. 또 무안해진 건 택시 관련해서다. 서산호텔 건너편 산언덕 위에 양강 호텔이 있다. 그 호텔 서점에 다녀오고자 했다. 택시를 불러 달라고 호텔 여성 안내에 말했더니 막 웃는다. 옆 동료들에게 “여기 선생이 저기 호텔(양강) 가는데 택시가 필요하단다, 야.” “기래? 택시?” 하며 함께 웃는다.

평양 역 전경
평양 역 전경

그 정도 거리면 걸어가는 게 상식이었던 모양이다. 내겐 꽤 먼 거리였다. 택시도 없었고, 불러주지 않았다. 나중 안내원과 함께 갔다. 북 주민들은 매일 출퇴근을 위해 한두 시간씩 걷는다. 평양 거주 시민들 외엔 누구든 걷는 게 일상화돼 있는 듯싶다. 평양 외곽지대와 지방에선 더욱더 그렇다. 버스 노선이 없으니 어쩌겠는가. 청진 혁명역사학과를 나왔다는 애국열사릉 강사도 금강산 여성 안내원도 거주하는 집까지는 상당한 거리였다. 그러나 누구든 걷는 게 생활화돼 있으니 모두 건강한 체질인가보다. 그들은 걷고 또 걷는다.

처음 밝혔듯 내 방북취재 횟수는 8번이다. 1980년대 2번, 90년대 2번, 2000년대 4번. 그러나 방북 횟수가 무슨 그리 큰 의미가 있겠는가. 그 중 ‘1997년 9월 초의 4번째 방북’이 내겐 가장 중요한 취재였고 뇌리에 깊이 남는다. 그때를 회상해 적는다. 내겐 너무 소중한 체험이었다. 오래전 일이나 당시 취재자료가 아직 남아있다. 그때 방북 신청은 승인이 아주 힘들었다. 당시는 북한 형편이 엄중한 시기 아니던가. 어찌 보면 남의 불난 집에 불구경 가는 셈이 됐으니. 우여곡절 끝에 가까스로 입국비자를 받았다. 8월 하순 무렵부터 9월 초까지 10박 11일. 당시 여러모로 힘든 시기의 북한 상황이었다. 훗날 참고를 위해 새삼 소개한다.

북한의 1996-97년은 6·25전쟁(조선 전쟁 부름) 때보다 더욱 극심한 고통을 준 시기였다고 한다. 정부배급이 끊긴 지 오래였고 지방에서는 아사자가 속출했다. 탈북이 일상화되기 시작했다. 97년 방북 당시 나는 이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겉모습의 평양은 예전 그대로 평온했기 때문이다. 버스나 전차 등 교통수단엔 여전히 시민들이 넘쳐났다. 노래방도 늘었고, 자동차도 증가해 있었다. 특히 중국인소유 자가용만 1천 대를 넘었다고 들었다. 평양 거주 중국인들은 그들끼리 연합체를 이루고 상권을 형성했다. 평양시민들은 그들을 “장사질만 하는 떼놈”이라고 멸시했다. 중국인들은 아파트도 밀집으로 거주했다.

개선 역 지하철 상점
개선 역 지하철 상점

호텔마다 외국인이 들락거렸다. 나중 알고 보니 북을 돕는다고 온 유엔 산하 직원들이 많았다. 베이징에서 1주일에 2번 운항하는 평양행 민항기(승객 138명)에 늘 손님이 꽉 찬다고 한다. 스튜어디스는 이를 ‘만땅됐다’고 표현했다. 평양행 기내에는 여전히 미주교포(이산가족)가 있었다. 옆자리의 두 여성이 물었다. “어디서 오세요? 우리는 미국 하와이에서 왔어요. 얼마나 냈습니까?” 알고 보니 커미션 얘기다. 그들은 1인당 4천달러씩 내고 친척 만나러 가는 길이라 한다. 미주 창구에서 이산가족 만남 주선에 1인당 3-4천 달러라는 소문은 진작 듣고 있었다. 설마 했는데 사실이었다.

토론토에서도 1인당 1천 달러라는 얘기를 들었다. ‘통일사업’을 빙자해 북에서 창구승인을 받고 이산가족 상대로 한 일종의 비즈니스였다. 빌어먹을 놈들. 이젠 북미주에 살아도 돈 없으면 북한 가족조차 만날 수 없게 만들었다. 이게 해외 일부 한인교포들의 민낯이다. 지금은 어떻게 흐름이 달라졌는지 모르겠다. 또 시카고인지 매년 최신 해외학술서적을 북한에 전문적으로 공급해 주는 창구가 존재한다고 들었다.

북미 친북단체는 소리 없이 뿌리를 넓혀가는 듯했다. 그즈음 미주지역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게 LA 노길남 (금년 3월 코로나19로 사망)이 1999년 창간한 민족통신이다. 강릉 출신인 그는 서울 재외언론인 행사에 두세 번 참석했고, 토론토에도 온 적이 있다. 나보다 늦게 90년대 초 북한에 첫발을 디뎠으나 강원도에 연관이 있고 비슷한 또래여서(나보다 2살 연상) 곧 가까운 사이가 됐다.

평양시 전경
평양시 전경

나중 토론토에서 개인 공항 환송할 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물었다. “노형! 아무리 사람이 없다지만 북에서 어떻게 노 형 같은 사람에게 박사학위와 메달을 주었는지 모르겠네요. 학력도 별로인데···” “왜 내가 어때서. 고교는 2차였지만 대학은 연세대를 나왔잖아요.” 공항에서 출발 시간이 많이 남아 공연히 시비조의 유치한 대화로 티격태격했다. “송 형이 정리해 발간됐다는 최홍희 회고록(1-3편)을 LA로 보내줘요. 새로 이사한 집 주소를 줄 테니.”

그날 내 말에 기분이 안 좋았던지 그 후 소식이 끊겼다. 우송한 책들이 반송 안 됐으니 받았을 것이다. 다만 아쉬운 점은 그가 계획했던 해외 언론인들의 방북주선이 무산된 일이다. 이상하게 그는 한쪽으로만 기울어져 있었다. 북에서 받은 박사 논문 제목은 ‘북조선이 이룩한 일심단결과 민족대단결 해법 연구’이었다. 고인이 됐으니 그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삼가하겠다.

얘기가 한참 빗나갔다. 평양에 닿자 북한당국은 대동강 호텔에 숙박케 했다. 10일간 일정을 보니 전부 평양 체류이다. 잠깐이라도 평양 밖을 벗어나고 싶었다. “어떻게 평양에서만 10일간 계속 묵습니까? 한번 금강산이라도 갑시다.” 금강산을 가야 중간에 황해북도를 거쳐 원산과 안변, 통천 등을 지난다. “금강산은 이미 예전에 다녀왔잖소?” “금강산이야 명승지이니 몇 번을 가도 좋지요. 열흘 동안 평양에만 있으랍니까.” 처음엔 반대하다가 마지못해 2박 3일의 금강산 여행을 허락해 줬다. “그럼 자동차 연룟값이랑 전부 내셔야 하오.” “걱정 마세요. 지금 나라가 어려운 형편 같은데 공짜구경 안 하렵니다.”

평양 물놀이 장
평양 물놀이 장

안내원에 따르면 평양에서 약 10여만 명 주민이 지방으로 떠나갔다고 전한다. 그는 “자진해서 타지역으로 ‘애국 봉사’로 갔지요. 국가를 위한 봉사지요”라고 강조했다. 식량난인 듯싶다. 나중 깨달았지만, 이때는 소위 고난의 행군 시기로 전환돼 있어 나라 전체가 풍전등화 상태였던 것 같다. 그해 97년 4월엔 북한 황장엽 비서가 한국으로 망명해 왔고, 8월에는 반대로 오익제 당시 민주 평통 정책자문위 상임위원(전 천도교 교령)이 월북하는 사건이 있었다. 또 그해 늦가을 한국은 IMF사태로 온 국민이 난리를 겪던 시기다. 한반도 전체가 출렁대고 있었다.

평양은 극심한 식량난, 연료난으로 인해 모처럼 등장했던 교통신호등 작동이 중단됐다. 다시 여성 교통안전원(애칭 네거리 무용수)이 종전처럼 교통정리를 하고 있었다. 최초의 북한 네거리 신호등 가설은 류미영 청우당위원장 장남 최건국 고교(서울사대부고) 선배가 독일에서 수입한 첫 작품이다. 교통안전원은 여성이라도 무술, 사격, 운전, 정비 자격까지 겸비해야 안전원이 될 수 있다고 한다. 한편 최 선배는 한국 이산가족을 위해서도 애를 썼다. 옛일이지만 북한 가족과 한국 가족을 북경호텔에서 극비리에 첫 만남을 성사시킨 적도 있었다.

숙소 대동강호텔(나중 화재로 전소함)에는 마침 밴쿠버에 거주하는 마이크 로우(56세/유엔 설비기술자)도 체류해 있었다. 그는 북한 여러 도시의 낙후된 공장시설 등을 새 설비로 바꾸려는 UN 프로그램 일환으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텅 빈 식당 둥근 식탁에 우리 둘 자리를 고정해 놓고 식사 때마다 바깥 세계정보와 북한 경험을 나누었다. 이때 영국 다이애나가 교통사고로 죽은 소식도 그를 통해 들었다. 실상 바깥 정보라야 외국에 전화해 듣는 소식이 고작이다.

대동강맥주 선술집
대동강맥주 선술집

방북 후엔 아예 바깥 세계와는 두절된 상태가 된다. 그가 캐나다에 전화했을 때 부인이 알려준 소식이라고 한다. 국제전화요금은 엄청 비쌌다. 1분에 몇 센트 하는 전화가 분당 8달러였다. 그것도 벨이 울리면서 통화요금이 계산됐다.(캐나다는 수신자가 받고 나서 통화료가 부과된다) 마이크는 “어제 간단한 팩스 한 장 보내는데 미화22달러가 나왔소. 세상에 이렇게 비싼 데가 어디 있겠소?” 투덜댄다.

종전보다 모든 가격이 올라있었다. 책임지도원은 이를 인정했다. “아무나 쉽게 살 수 없도록 물건가격을 올렸어요.” 가격 문제만이 아니었다. 상품도 부족했다. 필름이 부족해 구입하려 했으나 허사였다. 특급호텔인 고려호텔에도 없었다. 안내원은 자신 있게 말했다. “염려 마세요. 원산에 가면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중 원산 상점에도 없었다. 이 때문에 필름을 극히 아껴 사진을 찍어야 했다.

평양에서 어느 날 아침이다. 새벽 일찍 안내원 없이 호텔 옆 대동강변으로 나갔다가 벤치에 홀로 앉은 한 노인을 만났다. 김대(김일성종합대) 1기생(경제학부)이라는 그는 자주 운동하러 새벽 강가로 나온다 한다. “저는 캐나다에서 왔는데 나라 형편이 퍽 어려운 것 같아요.” 하자 “캐나다 대표단인가?” “아니요.” “대표단 아니면 우리나라에 못 들어오는데. 그래. 우리나라 경제가 망태기(망했다는 의미)가 됐어. 배급이 제대로 안 나오니 공장에선 기계 부속까지 떼어다 팔아먹는다던데 참 큰일 났어.” 한다. 한마디로 북한경제균형이 안 맞는다고 지적했다. 더욱이 전력, 석탄난 등으로 나라 사정이 악화돼, 언제 사정이 좋아질지 모르겠다며 탄식했다.

대동강 대낚시
대동강 대낚시

이 어려운 순간에도 나는 평양 안내 책자에 소개된 유명 요리전문점이라는 광복거리 광양루를 찾아 나셨다. 북한 자장면 맛은 어떨까 해서. 유명 숭어국(탕) 집도 닫혔고, 냉면으로 유명한 옥류관조차 재료가 부족해 외국 손님은 안 받는다는 소문이다. 도대체 안내원은 자신이 사는 평양 사정을 정말 모르는 것인지, 알고도 모른 체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 평양 중구역 빙상관 앞에서 구걸하는 한 조그만 소년(꽃제비)을 만났다. 깜짝 놀랐다. 평양 한복판에 거지라니. 안내원은 급히 쫓으려 했으나 소년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대여섯 살 정도 돼 보였다. “아닙니다. 적어도 10살은 됐을 겁니다. 지금 꽃제비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어요.” 나중에 호텔로 돌아와 마이크에게 낮에 본 꽃제비 얘기를 했다.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신의주에는 그런 소년들이 어디서든 쉽게 눈이 띤다”고 말했다.

방북 후에야 막상 북한 내부의 윤곽을 파악하게 됐다. 이때 고난의 행군, 꽃제비라는 용어를 한국 언론에 첫 게재했다. 중앙언론지가 아닌 내가 소속된 지방신문이다. 부산일보를 비롯해, 대구 매일신문, 강원일보 등지에 1면 첫 머리기사로 당시 북한의 어려운 실상을 보도했다. 이어 탈북문제 등도 곧 알게 된 사실이지만 지방에선 굶어 죽는 그 정도까지 인 줄을 생각을 못 했다. 함남 신포에서 23년간의 교사 생활을 포기하고, 청진으로 옮겨 장마당에서 음식 장사로 연명하던 한 여성 탈북자 말이 귀에 생생하다.

“송 기자님! 사람 영양실조 상태를 어떻게 쉽게 구별하는지 아세요? 생콩입니다. 생콩을 그냥 먹으면 건강한 사람은 좀 비린내를 느끼지요. 그러나 영양실조 경우는 생콩을 먹어도 아주 맛이 고소해요.” 국가에선 지방주민들 주거 이주를 통제하지 못했다. 국가배급이 완전 끊겨 너도나도 굶어 죽는 판국이다. 중국 땅으로 탈북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국경을 넘는 주민이 많으니 두만강은 ‘도망강’이라 불렀다. 북 간부들의 심화된 비리와 부정을 야유해 우스개 가사까지 생겼다. 인민(주민)들이 만든 이 가사를 유행가 노래처럼 들려줬다. <사회경우> 당비서는 당당하게 먹는다. 보위지도원은 보이지 않게 먹는다. 안전원은 안전하게 먹는다. <군대경우> 련(연)대장은 련(연)결된 것은 다 먹는다. 중대장은 중요한 것만 골라서 먹는다. 소대장은 소소하게 먹는다. 원산으로 가니 분위기가 마치 전쟁터 같았다.(계속)

필자소개
강원도민일보 북미특파원,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고문
대한민국 인권상 수상, 관훈클럽 국제보도상 수상, 한국신문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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