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 '초토회'가 찾은 공주 공산성과 익산 미륵사지... 나태주 풀꽃문학관도 둘러봐
[탐방] '초토회'가 찾은 공주 공산성과 익산 미륵사지... 나태주 풀꽃문학관도 둘러봐
  • 이종환 기자
  • 승인 2020.12.06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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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성 어원은 곰(熊)이 아닐까?...“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나태주 풀꽃문학관
나태주 풀꽃문학관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나태주 시인의 시 ‘풀꽃’ 전문이다. 이 시를 담은 액자와 판각을 마음껏 본 것은 충남 공주에 있는 ‘풀꽃문학관’에서였다.

대한걷기협회 임원과 이사들이 참여하는 ‘초토회’는 12월 정기모임으로 충남 공주의 공산성을 도는 여정을 택했다. 마침 임영선 대한걷기협회 사무처장이 장남 결혼식을 이날 오후 전북 익산에서 가져서, 공주에서 초토회 걷기행사를 갖고 익산 결혼식장을 찾기로 한 것이다.

이날 초토회는 소규모 모임으로 축소했다. 당국의 코로나 방역 방침에 맞추다 보니 무리지어 결혼식장을 찾기가 어렵기도 했거니와, 걷기 행사 역시 큰 모임을 피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풀꽃문학관 안에서. 맨 왼쪽이 나태주시인의 부인이다.
풀꽃문학관 안에서. 맨 왼쪽이 나태주시인의 부인이다.

오전 8시 양재역에서 집합해 협회 스타렉스 차량으로 공주로 향할 때 대한걷기협회 창립자이자 초대 회장을 지낸 김범석 전 성관관대 스포츠학부 교수가 “공산성을 찾는 김에 인근에 있는 나태주 시인 문학관부터 먼저 가보자”고 제안해, 모두들 맞장구쳤다.

1945년 충남 서천에서 출생한 나태주 시인은 공주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43년간 초등학교 교사 및 교장으로 지내며 2007년 공주장기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했다. 197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한 그는 시집 39권, 산문집 10권 등을 내놓으면서 독자들의 마음을 울리는 시와 산문들을 소개해왔다.

이날은 마침 미리 연락을 받은 나태주시인의 부인이 일부러 나와서 풀꽃문학관 문을 열어주면서, 시인이 작업하고 생활한 방안으로도 안내했다. 부인은 우리가 떠날 때 나태주 애송시집 ‘사랑에 답함’이라는 시집도 한사람에 한권씩 선물해줬다.

그후 찾은 곳이 공산성이었다. 초토회의 걷기 행사는 금서루를 오르면서 시작됐다. 공산성은 금강을 끼고 남쪽에 서 있는 산마루를 방어요새로 만든 성이다. 성벽을 따라 길을 오르내리는데, 인근 주민으로 보이는 한 중년의 아주머니가 “성벽 따라 한바퀴 도는데 40분정도 걸린다”면서 “천천히 걸으면 더 걸린다”고 덧붙였다.

초토회 모임은 보통 아침에 만나 오전 내내 걷고는 늦은 점심을 하고 헤어지거나, 때로는 오후에도 걷기도 해서 많이 걸을 때는 대여섯시간 넘을 때도 있다. 하지만 이날은 익산의 결혼식장을 방문해야 해서 발길을 서둘렀다.

공산성에서 금강을 내려다 보자, 강 속에 옛 다리 터가 보였다. 교각을 이룬 것으로 보이는 나무들이 까만색 밑부분만 남아있었다. 민족백과사전에 따르면 공산성은 백제시대는 물론 조선시대까지 지방행정의 중심지였다. 백제가 멸망한 직후에는 의자왕이 잠시 거처하였고, 이곳을 거점으로 나당연합군에 대항하는 백제부흥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1623년 이괄(李适)의 난 때는 인조가 잠시 피난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공산성에서 금강을 내려다보며.
공산성에서 금강을 내려다보며.

우리는 성벽을 돌면서 성이 금강 남쪽에 붙어서 자리잡은 것을 보니 주로 북쪽 오랑캐를 막기 위한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공산성의 공(公)이라는 이름이 곰이라는 발음에서 전와된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네요. 백제때는 웅진성 즉 곰나루성이라고 불렀다고 하니까요.”

공산성이 곰산성에서 변형된 게 아닌가 하는 근거없는 얘기도 나누면서, 우리는 북쪽문인 공북루와 남쪽문인 진남루를 거쳐서 다시 금서루 쪽으로 내려왔다. 짧게나마 길을 걸은 뒤 우리는 익산 결혼식장으로 갔다. 결혼식장은 코로나로 인해 하객들이 줄었다고 해도, 1층 입구는 출입하는 하객의 체온을 재고, 명부를 작성하느라 다소 붐볐다.

공산성 입구의 공적비들
공산성 입구의 공적비들

우리는 혼주와 신랑을 만나 축하를 하고는 나와 다시 익산 미륵사지로 향했다. 미륵사지의 안내판에는 이 절이 백제에서 가장 큰 절이었다고 적혀있었다. 미륵사는 백제 무왕(600∼641년) 때 창건되었으며, 고려 때까지도 성황을 이루었으나 조선 중기 이후 폐찰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선 정조 때의 ‘와유록(臥遊錄)’에는 “미륵사에 오니 농부들이 탑 위로 올라가 낮잠을 자고 있었으며 탑이 100여 년 전에 부서졌다고 하더라”는 내용도 있다고 한다. 미륵사지에는 일부 허물어진 채 남았던 서석탑이 유명하다. 이 9층석탑은 최근 수리작업으로 지금은 돌이끼 없는 깨끗한 모양으로 바뀌어 옛탑의 정취가 사라진 게 아쉬웠다.

석탑 뒤로는 금당 유적도 남아 있었다. 미륵사지에는 모두 3개의 금당이 있었다고 하는데, 금당을 지탱한 주춧돌들만 봐도 그 규모가 과연 얼마나 대단했을지 상상할 수 있게 했다. 우리는 미륵사지를 찾아 절터 입구 양쪽의 큰 연못을 지나고 당간지주와 서석탑, 새로 복원된 동석탑을 둘러본 후 아쉬운 마음으로 서울로 발길을 돌렸다.

익산 미륵사지의 서석탑
익산 미륵사지의 서석탑
미륵사지 금당터 주춧돌 유적들
미륵사지 금당터 주춧돌 유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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