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호의 역사이야기] 대구 불로동 고분군(古墳群)과 달성공원(达城公园) 탐방기
[이동호의 역사이야기] 대구 불로동 고분군(古墳群)과 달성공원(达城公园) 탐방기
  • 이동호 월드코리안신문 명예기자
  • 승인 2021.01.04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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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모가 계신 제2의 고향인 대구에서 며칠을 보내면서 역사 탐방할 곳을 찾다가 대구 동구 불로동 고분군과 달성공원, 서문시장, 삼성상회 터 등을 돌아보기로 하고 길을 나섰다.

대구 불로동(不老洞) 고분군(古墳群)

​고분군을 탐방하는 데는 우리의 선사·고대시대를 살펴보아야 한다. 대구 남구 월성동 유적지를 보면 기원전 3만년 전~1만년 전 구석기시대에 사람이 살았다고 전한다.

대구 상동, 대봉동, 서변동 유적지를 보면 기원전 3500년~2000년 신석기시대의 삶의 흔적을 볼 수 있다.

기원전 10~4세기경 청동기시대로 대구 달서구 진천동, 이천동, 대봉동 등의 고인돌 유적과 서변동, 월성동 등 마을 유적 등이 나타난다.

기원전 3세기경부터 사회는 철기 사용으로 초기 철기시대를 맞아 생산력이 급격히 증대하고 유력한 지배자가 출현, 국가 발생의 전 단계로서 매장 문화도 고인돌이 사라지고 널무덤(木棺墓)이 나타난다. 바로 고분군이 이를 증명한다.

고분군의 조성 연대는 기원 후 5~6세기 경이며, 경주 지역은 땅 평면에 묘를 썼으나 구릉지대에 묘를 쓴 것으로 보아 가야국의 영향권에 있었다고 추론된다.
고분군의 조성 연대는 기원 후 5~6세기 경이며, 경주 지역은 땅 평면에 묘를 썼으나 구릉지대에 묘를 쓴 것으로 보아 가야국의 영향권에 있었다고 추론된다.

불로동 고분군은 팔공산 남쪽 줄기가 낮아지면서 금호강의 북쪽 충적평야와 만나는 구릉지에 형성된 삼국시대 고분군으로 현재 275여 기의 고총·고분이 밀집 분포된 대규모 고분군이다. 전체 고분군 면적은 약 94,000여 평(312,239㎡)으로 1938년 일제강점기 시대에 학계에 알려진 이후, 1968년 경북대학교 박물관에서 2기의 소형분 조사를 시행했다. 2001년에는 경상북도 문화재연구원에서 주능선에 위치한 대형분 2기와 주변 석곽묘 10기를 발굴 조사했다.

대구 달성공원 인근 비산동, 평리동 등의 구릉지에도 고분군이 분포돼 있고(현재는 일반 주택 밑에 있어 발굴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함), 경북 고령에 있는 대가야 고분군도 같은 시대의 맥락이라고 보인다. 고분군을 조성한 시대가 초기 철기시대 삼국시대라고 칭하지만, 대가야국을 편입해 사국시대로 칭해야 한다는 역사학자들의 주장도 있다.

일부 석곽 중에는 가운데 칸막이를 쌓아 시신을 매장하는 공간과 유물을 부장하는 공간을 구분한 것도 있다. 출토된 유물로는 금귀걸이, 유리구슬, 목걸이 등 장신구와 말 그림이 새겨진 토기류, 재갈, 말띠드리개 등의 마구류, 화살촉, 도끼, 낫 등의 무기류와 상어(돔배기) 뼈 등 음식물 등 다양하다. 이러한 관련 고고학의 성과를 참조해 보면 불로동 지역을 통솔하던 유력한 정치 집단이 조성한 고분군으로 추정된다.

사진에서와 같이 이 당시 낮은 곳에서부터 고분이 서고 위쪽으로 묘를 써 나간 것으로 보여진다.
사진에서와 같이 이 당시 낮은 곳에서부터 고분이 서고 위쪽으로 묘를 써 나간 것으로 보여진다.

대형 고분 주위에 소형 묘들이 있는 것은 이 당시에도 순장(살아있는 사람을 산대로 매장)하는 풍습이 있었다는 설을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주요 고분으로는 1938년 18호, 22호 고분을 최초 발굴한 이래 2002년 91호, 93호분 등 총 275기의 고분이 있다. 문제는 이런 역사적인 우리의 고대 역사 유적지를 보존 관리하는 정부의 역사바로보존하기 개념이 확고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1978년 6월23일 사적 제262호로 지정됐으나 여느 사적지와는 다르게 보존 시설들은 거의 전무하고 고분군들도 무방비하게 방치되고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달성공원(达城公园)

주변에는 북성로가 있으며 오래된 주택들이 즐비하다. 북성로 초입에 삼성상회 터가 있다. 그리고 달성공원에서 300m 거리에 서문시장으로 들어가는 큰장 네거리가 있어 시내로의 접근성이 좋다.

달성공원은 대구광역시 중구 달성공원로 35번지에 있는 공원이다. 본래 달성토성이었다.

입구에 향토역사관이 있고 드넓은 잔디광장이 있으며 각종 동물 우리가 있다. 역사와 관련된 것으로는 달성 토성, 관풍루, 최제우 상, 달성 서씨 유허비, 이상화 시비, 어린이 헌장비, 이상용 구국기념비, 허위 선생 순국기념비 등이 있다.

달성공원 정문 전경
달성공원 정문 전경

대구의 역사는 기원전 1세기 전후 비산동, 평리동, 신천동, 만촌동, 지산동 등의 유적에 의하면 달구벌국이 성립됐다. 기록으로는 신라 첨해이사금(沾解尼师今) 15년(AD261년)에 달벌성(达伐城)을 쌓고 나마(奈麻) 벼슬의 극종(克崇)을 성주로 삼았다는 내용이 삼국사기(三国史记)에 전하지만, 달성은 청동기시대부터 지역의 중심을 이룬 집단이 그들의 생활 근거지를 이용해 쌓은 토축성(土築城)이다.

신라의 왕을 추대하는 6촌장회의는 박혁거세, 석타래, 김알지 등 3 성골 중에서 왕을 추대케 돼 있었는데 김알지 성골이 달구벌국의 시조라는 설이 있다. 이런 연유에서인지 통일신라의 수도를 경주에서 달구벌로 천도하자는 주장이 강력하게 대두됐는데

신라 신문왕 9년(AD 689년) 6촌장회의에서 적극 반대하는 바람에 통일 신라 수도를 경주에서 달구벌(达句伐·대구시의 옛날 이름)로 옮기려는 시도가 좌절됐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남아있다. 어쨌든 통일신라 말까지 달구벌(현재 대구)은 군사·교통의 요충지였다.

달성이 지금과 같은 공원으로 조성된 것은 1905년이고, 그 후 일제의 침략전쟁 수행과 식민지 지배 정책의 일환으로 1914년 대구신사(大邱神社)가 이곳에 세워졌다.

일제강점기 시대 순종이 대구에 내려와 달성공원을 순시했을 때 일본은 신사참배를 순종에게 강요했으나 순종은 참배하지 않고 떠났다고 전해진다.

1966년 8월에 신사 건물을 해체하고 공원 내부를 정비한 후 오늘날과 같은 동물원 겸 공원으로 시민에게 개방하고 있다.

달성토성 위로 옮겨온 경상감영의 정문 관풍루
달성토성 위로 옮겨온 경상감영의 정문 관풍루

‘산적의 딸’ 영화 촬영지가 바로 달성공원이고 1956년 촬영됐다. 그 당시 달성공원은 성곽으로 둘러싸인 산림이 우거진 성곽 안의 분지였다. 분지 안에 6·25 피난민 학교인 대서초등학교에 필자가 다녔다. 학교가 끝난 후 숲에 숨어서 영화 촬영을 본 기억이 지금도 뚜렷하다. 숲속의 움막 주위로 말을 타고 왔다 갔다 하거나, 칼싸움하는 걸 신나게 보곤 했다. 일요일이면 동네 친구들을 데리고 와 온종일 배를 곯아가며 영화 촬영을 재미나게 구경하곤 했다.

​1954년 달성공원 안에 피난민학교(대서초등학교)에 입학해서 3학년까지 다니다가 성곽 아래 서부초등학교와 병합하는 바람에 서부초등학교에서 1960년에 졸업했다. 학교 통학은 늘 걸어 다녔다.

​3·3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민중봉기는 1960년 2월28일 대구 중고생들에 의해 발원 봉기돼 3월15일 마산 김주열 학생 사망 사건은 독재 타도를 외치는 시위대에 기폭제가 돼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하면서 4·19혁명까지 이르는 과정을 필자는 중학교 1학년생으로 선배들의 데모 행렬을 먼발치서 지켜봐야 했다.

세 사람의 대통령을 배출한 대구는 필자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살았던 제2의 고향이다. 대통령을 세 사람이나 배출했던 도시라면 응당 대한민국에서 제일 발전된 도시로 남아있어야 했는데 전연 발전하지 않은 도시로 남아있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달성공원 주변을 보더라도 60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옛말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서문시장은 조선 중기부터 형성된 시장으로 서문시장 옛 이름은 대구장이다. 대구장은 조선시대에 평양장, 강경장과 함께 전국 3대 장터 중 한 곳이었다. 1920년대에 대구 시가지가 확장되면서 서남쪽에 있던 천황당지를 매립해 다시 장을 옮긴 것이 오늘날의 서문시장 위치이며, 1922년 공설시장 개설 허가를 받았다.

대구광역시 중구 대신동에 위치한 대구 최대의 전통시장 입구 모습. 6·25 사변 이후 대구 뿐만 아니라 전국에서도 손꼽힐 만한 대규모 재래시장이었다.
대구광역시 중구 대신동에 위치한 대구 최대의 전통시장 입구 모습. 6·25 사변 이후 대구 뿐만 아니라 전국에서도 손꼽힐 만한 대규모 재래시장이었다.

현재 서문시장의 대지면적은 8,200평(27,062㎡), 건물 총면적은 19,667평(64,902㎡)이다. 1지구, 2지구, 4지구, 5지구, 동산상가, 건어물 상가 등 6개 지구로 구성되고, 약 4,000여 개의 점포가 들어서 있으며, 상인 수는 약 2만여 명이다. 주거래품목은 주단·포목 등 섬유 관련 품목으로 전국적으로도 유명한 원단시장이 있다. 그 밖에 한복, 액세서리, 이불, 의류, 청과건어물, 해산물 등 다양한 상품이 거래된다.

​필자가 어린 나이일 때 부모님께서 장사하시던 서문시장에서 대화재가 발생해 시장이 전소된 적이 있었다. 시장 건물을 복구할 때까지 임시 건물에서 고생하시던 부모님 모습들이 눈에 선하다. 서문시장 화재는 광복 후 화재가 되풀이되는 인습 행보를 계속해 왔다. 주된 이유는 재래시장의 고질병 중 하나인 오래된 전기시설 때문이다. 큰 화재만 들어보면 1967년 1월1일 대화재 전소, 1975년 11월2일 4지구·1지구 2층 화재 전소, 1976년 12월17일 3지구 화재 전소, 이 때문에 서문시장에 3지구가 없어졌다. 2005년 2지구 대화재 전소, 2016년 11월30일 1지구와 4지구 사이에서 대화재 등이다.

​이렇게 서문시장이 불났다 하면 깜짝 놀랐던 기억 때문에 이번 서문시장 탐방에서 현대식 건물로 화재 없는 시장으로 재탄생하지 못하고 여전히 재래시장의 무방비스러운 건물 난맥상을 보니 마음이 무겁다. 대구가 발전하지 못하고 60년 전과 진배없는 모습에서 괴이함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60년 만에 돌아본 대구 역사 탐방을 무거운 발걸음으로 끝을 맺는다.

필자소개
월드코리안신문 명예기자
중국 쑤저우인산국제무역공사동사장
WORLD OKTA 쑤저우지회 고문
세계한인무역협회 14통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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