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칼럼] 다문화 2세를 향한 두 가지 시선
[대림칼럼] 다문화 2세를 향한 두 가지 시선
  • 송향경 박사
  • 승인 2021.01.04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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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향경 박사. 중앙민족대학과 대외경제무역대학을 거쳐 서울대학교에서 한중비교문학으로 박사학위 취득.
송향경 박사. 중앙민족대학과 대외경제무역대학을 거쳐 서울대학교에서 한중비교문학으로 박사학위 취득.

한국의 다문화가족 관련 논의는 줄곧 결혼 이민자의 한국 사회 적응 및 정착과 연관됐다. 그동안 많은 정책의 방점은 주로 결혼이주여성을 노동력 착취, 성적 유린 등에서 보호할 수 있는 제도적 보호장치에 있었다. 2007년에 ‘재한외국인처우기본법’이 제정되고 2010년에 제1차 다문화가족정책 기본계획이 수립되는 등 제도적 층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변하는 현실의 문제점들을 모두 아우를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특히 다문화가족이 많아질수록 다문화 2세를 에워싼 각종 문제가 부각되고 있다.

그들에게 눈길을 돌린 문학작품이 2000년대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다문화 2세인 ‘아카스’의 시점에서 일상의 다양한 폭력을 보여주는 김재영의 「코끼리」(2005), 3인칭 시점에서 유창한 영어와 이쁜 혼혈 외모로 ‘배려’ 받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결국 국민의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게리의 이야기를 보여준 전성태의 「이미테이션」(2011) 등이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부류의 소설에서는 다문화 2세가 한국 사회에서 경험하는 비균질적인 대우를 제도와 현실의 차원에서 보여주면서도 그들에 대한 교육적 차원이 두드러진다.

하지만 최근에 발표된 김애란의 단편 소설 <가리는 손>(『창작과비평』 2017년 봄호)과 강화길의 단편 소설 <손>(『문장』 웹진, 2017)은 위의 소설과는 매우 다른 방식으로 다문화 2세에 접근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 두 작품에서는 모두 다문화 2세 아이를 관찰하는 어른의 시선 자체의 문제점을 그대로 드러낸다.

강화길의 소설 <손>을 볼 때, 주인공 김미영은 딸 민아와 함께 서울에서 시댁이 있는 시골 마을의 초등학교 담임으로 전근한다. 김미영은 아이가 일곱 명뿐인 5학년 반을 맡았는데 골치 아픈 일이 하나 있었다. 그녀는 그 반 용우라는 아이의 주도로 아이들이 대진이라는 아이를 지속적으로 괴롭힌다고 생각한다. 용우의 할아버지는 이장님이고 어머니는 베트남 출신이었다. 다문화 2세를 다루는 식상한 내러티브라면 아이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는 대진의 자리에 용우가 있겠지만 이 소설에서 용우는 학교에서 덩치가 가장 크고 잘생긴 데다가 공부도 잘하고 인기까지 많은, 흔히 말하는 ‘킹카’이다.

손이 없는 날 메주를 빚는 마을에서 갑자기 김미영의 딸 민아가 없어진다. 김미영은 용우가 민아를 데려간 것이라고 단정 짓고 용우에게 달려들면서 소동을 벌여 메주 행사를 망치기 직전에 이른다. 부지불식간 김미영이 마을의 손(마을에 들어와 사람들을 해코지하고 방해하는 년)이 된 셈이다. 따라서 마을의 평화를 깨는 것은 혼혈인 용우가 아니라 마을의 생리를 모르는 도시에서 온 김미영이었다. 결말에 이르면 독자들은 지금까지 소설을 이끌어왔던 김미영의 시점에서 서술되고 있는 서사를 믿을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용우가 김미영이 생각했던 가해자가 맞는지 아니면 담임인 김미영의 오해로 억울하게 의심받은 피해자였는지 헷갈리게 된다. 소설은 다문화 2세 아이를 학교 폭력의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라는 새로운 형상으로 설정하고 출발했다. 하지만 결말에 오면 용우의 가해자 모습은 사실 마을 공동체를 이해하지 못한 외부자 시선이 그려낸 오해가 아닐까 하는 추측에 이르게 한다. 기존과 다른 다문화 2세의 형상에 대한 두 번의 자리 옮김은 사회적으로 굳어진 다문화 2세에 입혀져 있던 형상들을 뒤흔들어 버린다. 마을은 ‘공동체’답게 용우의 편이 됐고 소설은 외부자 김미영을 공포로 몰아넣는 것으로 끝난다. 소설은 끝까지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 않는 것으로 용우를 교차적으로 관통하던 가해자와 피해자의 2분법을 깨뜨린다.

그러면 용우와 같은 아이가 마을의 주민이 아니고 우리 집에 있으면 어떻게 될까? 김애란의 <가리는 손>은 바로 이 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다. 강화길의 <손>이 담임의 입장에서 다문화 2세를 바라보았다면, <가리는 손>은 엄마의 시선에서 다문화 2세 아이를 그리고 있다. 김애란의 소설은 베트남 남편과 결혼하고 이혼한 한국인 엄마와 열다섯 살 된 아들 재이의 이야기이다. 엄마는 아이가 커가는 과정에 여느 보통 한국 엄마와 다름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최근에 와서 엄마에게는 큰 고민이 하나 생기게 된다. 며칠 전 동네의 노인 구타 및 치사 사건 현장을 찍은 동영상에 재이도 찍혔기 때문이다. 엄마는 제과점에서 동네 사람들이 이 동영상을 운운할 때 재이를 다문화라고 하면서 사건의 ‘주동자’로 수군거리는 것에 겁이 났다. 그래서 재이에게 물으니 재이는 가해자 아이들과는 모르는 사이이고 사건 당시 우연히 근처에 있었을 뿐이라고 했다. 대답을 들은 엄마는 이번에는 재이가 사건 현장을 목격하면서 폭력의 충격을 받은 피해자일까봐 전전긍긍한다. 특히 눈을 뜬 채 한 손으로 입을 가린 동영상의 재이 표정이 엄마의 짐작에 무게를 실어주었다.

하지만 단순한 피해자라고 생각하기에는 내키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동영상에는 자리를 떠났던 재이가 다시 돌아와 뽑기 기계에서 뽑은 라이언 인형을 집어가는 모습이 찍혔는데 경찰관이 왜 신고를 안 했냐고 묻는 말에 재이는 그날 학원 수업을 빼먹은 사실이 엄마에게 들통날까 봐 걱정돼서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녀는 재이가 그날 학원 수업이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재이 표정의 수수께끼는 생일날 촛불 앞에서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얼굴에서 풀어진다. 생일상에 재이와 마주 앉은 엄마의 눈에는 웃음을 머금은 재이의 얼굴과 사건 당일 재이가 막은 손 뒤에 가려졌던 표정이 겹쳐진다. 결국 재이가 손으로 가린 것은 공포에 질린 경악이 아니라 폭력을 당하는 노인을 향한 웃음일 수도 있었다. 이렇게 되면 재이는 동네 사람들이 운운했던 주도자도 아니고 엄마가 상상했던 피해자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우연히 조우한 노인의 죽음의 방관자이자 비웃기까지 하는 일종의 동조자였다.

어릴 적부터 일상에서 느낀 미묘한 차별로 상처를 받던 재이는 엄마한테도 위로받을 수 없자 점차 타인의 아픔에 무감각한 삐뚤어진 심성이 길러졌다고 할 수 있다. 재이와 엄마의 소통이 어긋나기 시작한 것은 사실 어릴 적부터였다. 어린 재이는 친구들이 자기를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이 싫다고 하자 엄마는 대뜸 그게 ‘칭찬’이라고 한다. 이는 엄마가 다른 사람들이 재이로부터 느끼는 ‘특별’함을 부정적으로 느끼는 재이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재이의 마음을 부정해 버린 결과를 낳는다. ‘칭찬’은 ‘비난’의 반대편의 것으로 엄마 역시 세상의 이분법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따라서 엄마가 재이를 동조자로 생각하던 동네 사람들의 반대편에서 피해자로 생각했을 때와 마찬가지였다. 엄마 역시 이분법의 틀로 재이를 바라보았다.

다문화 2세를 접근하는 시선의 관성은 가정의 벽을 뚫고 가장 친밀한 모자 관계에서도 유효성을 지니면서 재이는 엄마로부터도 공감을 얻지 못한다. 어린 재이가 대표 선출 선거에 나갔다가 모욕적인 문구로 상처받자 엄마는 재이를 아래와 같이 위로한다. “너의 아빤 여기 일하러 온 거 아니야. 공부하러 온 사람이었어. 고향 집에 하인도 있었대.” 그럼 학식이 적고 가난한 외국인 부모가 낳은 다문화 아이라면 모욕을 받는 게 마땅했을까?

이 두 소설은 모두 신뢰할 수 없는 저자를 내세워서 아이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인 담임 선생님과 엄마의 시선을 흔들어 놓는다. 두 작품의 결말은 한국 사회에서 다문화 아이에 흔히 입혀지는 두 가지 이미지(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이미지)를 전복시킨다. 다문화로 집합되던 기존 집단은 오늘날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변주를 보여주면서 한국 사회에 적응하고 어울리고 있다. 독자는 두 소설을 읽으면서 다문화 아이들을 동정하거나 서술자의 시선에 따라 오해하고 결말에 오면 그런 감정이 그릇됐다는 반전과 함께 그동안 편견에서 얼마나 자유롭지 못했는가를 실감하게 된다. 나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나는 올여름에 충주의 한 전통시장을 방문하게 됐다. 당시 나는 한 예능프로 현장에서 통역을 담당했고 그날 촬영은 전통시장에서 진행됐다. 시장이 마감된 오후 6시가 지나서 촬영이 시작됐고 출연진은 한 포장마차에서 연예인들의 ‘먹방’을 찍고 있었다. 밝은 조명과 연출된 높은 언성은 하루의 장사를 마친 시장의 적막을 부수었다. 아니나 다를까 좀 지나니 가게마다 내려졌던 셔터가 다시 빼꼼 열리면서 구경꾼들이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했다. 무심코 뒤돌아보니 한창 예능과 연예인에 호기심이 많은 십 대의 어린 주인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이 내 눈에 들어온 순간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귀여운 동남아 혼혈의 얼굴이었다. 알고 보니 이 전통시장에는 많은 다문화가정이 있었고 아이들은 주인집 자제들이었다.

순간 나는 그 광경이 매우 낯설게 느껴졌고 당혹하기까지 했다. 그리고는 곧 결혼 비자로 한국에 거주하는 한 아이의 엄마인 본인조차 다문화 아이들에 대한 일종의 선입견이 무의식중에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반성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만약 코로나 이전의 이태원이나 명동이라면 어떠한 피부색의 얼굴들에 에워싸이든 매우 당연시했을 것이다. 그럼 그 당혹감의 내용은 무엇일까? 왜 유독 전통시장이라는 공간으로 옮겨왔을 때 그토록 당혹했을까 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당시 내가 서 있었던 전통시장이란 시장이라는 일반 공간이 전통이라는 시간적 개념이 들어옴으로 하여 전환된 하나의 ‘장소’였다. 혹은, 나 스스로 그 공간을 유토피아적인 한국의 ‘순수’성을 강박적으로 전제하면서 토속적인 역사가 스며있는 ‘장소’로 이해했다. 따라서 나의 인식 속에서 전통시장이란 투박함, 토속적인 것을 지니고 재현하는 ‘개념 공간’이었다면 나를 바라보던 아이들에게는 ‘생활공간’(개념공간과 생활공간 관련 논의는 르페브르의 <제3공간>을 새롭게 명명한 서영채의 명명 방식과 재해석을 참고. 서영채, 「공간적 전회」, 『작가들』 73, 2020, 205쪽) 자체였다. 그들과 시선이 부딪치면서 느꼈던 당혹감은 동일한 공간에 대한 서로의 엇갈린 이해방식의 충돌에서 기인한 것이고 내가 공간을 이해했던 방식이 아이들로 인해 분할 당한 순간에 느낀 감정이기도 했다. 따라서 그들과 시선의 부딪침은 전통시장을 사유하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입장의 부딪침이라고 할 수 있다. 부딪침의 결과로는 주관적인 생활 장소로 전통시장을 소유한 아이들에게 내가 이해했던 방식인 개념 공간이 밀려났고 또 그것을 알아차림으로써 느낀 감정이 바로 당혹감이었다. 당혹의 순간은 전통시장의 주인이 이 아이들이라는 것을 깨닫고 인정한 순간이기도 했다.

다시 생각해보면 태어날 때부터 한국 국적이고 전통시장은 그들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이곳에서 접하는 시장의 생리가 자연스럽게 몸에 밴 아이들이 시장의 주인이 되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다. 결코 그 공간에서의 이방인은 국적을 달리한 부모들에게서 태어난 혼혈 아이들이 아니라 그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에 둘러싸인 타지에서 온 우리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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