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호의 역사이야기] 고양구 서오릉 탐방기(2)
[이동호의 역사이야기] 고양구 서오릉 탐방기(2)
  • 이동호 월드코리안신문 명예기자
  • 승인 2021.01.25 09:06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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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릉(弘陵·제21대 영조의 첫 번째 왕비 정성왕후의 능)

영조비 정성왕후의 능인 홍릉 전경. 홍릉은 창릉과 이웃해 있으며 조선 21대 영조의 첫 번째 왕비 정성왕후 서씨의 능이다. 정성왕후 한 분만 모신 단릉의 형식이나, 석물의 배치는 쌍릉의 형식으로 조성했다. 비각 안에 있는 표석도 쌍릉의 형식을 생각하여 글을 새겼다. 능침은 숙종의 명릉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다.

♧정성왕후(貞聖王后) 이야기♧

영조의 첫 번째 왕비 정성왕후 서씨(1692년 12월7일~1757년 2월15일)는 본관이 대구인 달성부원군 서종제와 잠성부인인 이씨의 딸로 1692년(숙종 18)에 가회방 사저에서 태어났다. 1704년(숙종 30)에 숙종의 왕자 연잉군과 가례를 올려 달성군부인에 봉해졌고, 1721년(경종 1)에 왕세제빈으로 책봉된 후 1724년에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됐다. 정성왕후는 조선 역대 왕비 중에서 중전 재임을 가장 오래 했으나 영조 사이에서 소생을 낳지 못했다. 두 후궁에서 낳은 효장세자와 사도세자가 왕세자로 책봉될 때 양자로 입적하기도 했으며, 영조와 사도세자가 대립하게 되자 그 중심에 서서 갈등을 풀기 위해 노력했다. 평생 숙종과 경종의 왕비를 극진히 모시며 내명부를 지켰다. 그 후 1757년(영조 33)에 창덕궁 관리합에서 소생 없이 66세로 세상을 떠났다. 정성왕후가 세상을 떠난 후 영조는 친히 왕후의 행장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왕궁 생활 43년 동안 항상 웃는 얼굴로 맞아주고, 양전을 극진히 모시고, 게으른 빛이 없었으며, 숙빈 최씨(영조의 생모)의 신주를 모신 육상궁 제전에 기울였던 정성을 고맙게 여겨 기록한다.

대빈묘로 가는 깔닥고개

홍릉을 지나 소나무길입구를 지나 대빈묘로 넘어가는 길에 깔닥고개가 나온다. 이 고개를 넘으면 그 유명한 장희빈 묘가 있다. 대빈묘에 도착하기 전 그 옛날 드라마를 통해 기억되는 장면들과 오늘의 현실을 비교해보면서 묘한 인간사의 내면을 훔쳐보고 싶은 심정으로 깔닥고개를 넘어간다.

♧장희빈 이야기♧

1950년도 일성당 서점에서 펴낸 윤승한 저 역사소설 ‘장희빈’의 줄거리를 소개한다. 나이 서른의 현종은 신체가 강건하지 못해 자신의 사후를 걱정한다. 그는 영의정 허적과 우의정 김수항에게 동궁을 부탁하고 세상을 떠난다. 어린 동궁이 즉위하니 이가 숙종이다. 양반 가문의 침모로 일하는 옥순은 남인 측에 속한 역관 윤규의 딸인데, 남인과 서인의 당파 싸움에 휘말려 아버지를 잃는다. 후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옥순은 서인들에게 복수심을 품는다. 그녀는 중인 출신의 거부 장현의 후처로 들어가 옥정이라는 어여쁜 딸을 낳는다.

남인들은 옥정의 미모를 이용해 권력을 획득하려는 야심을 품고 그녀를 궁녀로 들여보낸다. 옥정의 미모는 궁궐에서도 눈에 띄어 왕의 총애를 받는다. 세월이 흘러 왕이 성장하자 호조판서 김만기의 딸이 왕비로 간택돼 들어온다. 그러나 왕의 마음은 이미 옥정에게 기울어 있어, 왕비 김씨와 옥정 사이에 갈등이 생긴다. 옥정이 왕을 믿고 안하무인으로 행동하자 왕비는 노여워하여 옥정의 잘못을 대왕대비에게 고하고, 옥정은 궁에서 쫓겨난다. 왕비 김씨가 죽고 새로 민씨가 왕비가 되자, 옥정은 재입궁한다. 왕비가 아이를 낳지 못하던 중 옥정이 먼저 왕자를 낳자 왕은 그녀를 총애한다. 이에 그녀는 왕비를 없애고 자신이 중전이 되고자 한다.

옥정의 세력에 힘입어 남인이 득세하고 서인이 몰락한다. 남인과 결탁한 옥정의 모함에 숙종은 결국 왕비 민씨를 내쫓고 옥정을 왕비로 맞아들인다. 옥정의 친정인 장씨 일가와 남인들은 막대한 권력과 부귀를 누린다. 옥정은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폐비 민씨가 복위될까 두려워한다. 그녀는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폐비를 죽이려 하지만 실패하고, 오히려 숙종의 총애를 잃는다. 옥정에게서 마음이 떠난 숙종은 폐비를 섬기던 무수리 최씨와 동침한다. 최씨가 임신하자, 옥정은 그녀를 고문하는 등 악행을 저지른다.

마침내 옥정은 궁에서 쫓겨나고, 폐비 민씨가 복위된다. 옥정이 쫓겨나자 남인이 몰락하고 서인이 다시 득세하지만, 서인은 다시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어 당쟁이 끊이지 않는다. 옥정은 궁에서 쫓겨난 후에도 왕비를 독살하는 등 악행을 거듭하다 사약을 받는다. 옥정의 아들은 후에 자라 경종이 되고, 최씨의 아들은 후에 영조가 된다. 피바람을 일으킨 당파 싸움은 후에 정조대에 이르러서야 잠잠해진다.

인현왕후와 장희빈은 영화나 TV 드라마에서 역사의 라이벌로 많이 다루어져 왔다. 대체적으로 인현왕후는 후덕하면서도 내로남불이 아닌 스스로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여인으로, 한편으로 장희빈은 표독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세상에 없는 악의 여인으로 묘사되곤 했다. 그러나 인현왕후는 폐비돼 퇴출 6년 동안 얻은 지병 때문에, 장희빈은 인현왕후를 무고한 죄로 사약으로, 두 여인 모두 연이어 세상을 떠난다. 지금까지가 우리가 알고 있는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스토리다.

그러나 인현왕후전 드라마에서는 장희빈이 죽을 때까지 발악하는 것으로 묘사했으나 조선실록에서는 그런 구절은 보이지 않는다. 이로 미루어 보아 두 여인은 한 남성을 사이에 두고 시샘의 다툼으로 두 여인을 상극으로 치닫게 했던 숙종의 인간적인 내면의 세계를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두 여인이 연이어 세상을 뜨자 숙종은 탕평정치를 시도한다. 이것은 후일 영·정조 시대의 문화정치 부흥기의 토대가 된다. 그동안 숙종이 시도했던 환국정치(요즈음 친위 쿠테타)로 인해 왕권 확립에 명분을 집중하는 모습을 읽을 수 있다. 이런 상황으로 미루어 보아 승자와 패자, 선이냐 악이냐 하는 이분법적인 극단주의가 만연했던 그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따른 객관적 평가도 뒤따라야 할 것 같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인가. 요즈음의 세계정세와 한국의 정치 상황이 자꾸 조명되는 것은 왜일까?

제20대 경종 사친 옥산부대빈 장씨 대빈묘(大嬪墓)

깔닥고개를 넘으면 바로 우측 조금 안쪽으로 대빈묘가 나온다. 대빈묘는 조선 19대 숙종의 후궁이자 20대 경종의 사친인 옥산부대빈(희빈) 장씨의 묘이다. 대빈묘는 후궁 묘제의 형식에 맞게 조성했다. 문석인, 망주석, 장명등, 상석, 향로석, 혼유석, 묘표석을 배치했고, 봉분을 보호하기 위해 곡장을 둘렀다. 묘표석에는 ‘有明朝鮮國玉山府大嬪張氏之墓(유명조선국 옥산부대빈장씨지묘)’라고 새겨져 있다.

1701년(숙종 27)에 희빈 장씨가 세상을 떠나(자진(自盡)), 이듬해인 1702년(숙종 28) 양주 인장리(현 구리시 인창동)에 묘를 조성했다. 그러나 묘소 자리가 불길하다 하여 1719년(숙종 45)에 광주 진해촌(현 광주시 오포읍 문형리)으로 이장했다. 이후 1969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의 서오릉(西五陵) 경내의 대빈묘(大嬪墓)로 옮겨졌다. 어쩐지 다른 능이나 원에 비해 초라하다.

♧옥산부대빈 장씨(玉山府大嬪 張氏) 이야기♧

옥산부대빈 장씨(1659년~1701년 10월)는 본관이 인동인 옥산부원군 장형과 파산부인인 윤씨의 딸로 1659년(효종 10)에 태어났다. 숙종대의 대왕대비였던 장렬왕후 조씨를 모시는 궁녀로 입궁하여, 숙종의 총애를 받아 1686년(숙종 12)에 숙원(淑媛, 내명부 종4품 후궁)이 됐다. 소의(昭儀)의 품계에서 1688년(숙종 14)에 숙종의 첫 아들 윤(경종)을 낳아 희빈이 됐다. 숙종은 희빈이 낳은 왕자를 원자(元子)로 책봉한다는 뜻을 밝히자 당시 집권세력인 서인은 강력하게 반대했고, 이 일로 인해 기사환국이 발생돼 남인 정권이 들어서게 됐다. 숙종은 환국 이후 인현왕후 민씨를 왕비의 자리에 폐위하고 희빈을 왕비로 책봉했다. 그러나 1694년(숙종 20)에 인현왕후 복위 운동과 숙빈 최씨 독살 사건이 발단이 되면서 갑술환국이 발생돼 서인 정권이 다시 들어서게 됐다. 이 사건으로 인현왕후가 다시 복위되고 장씨는 다시 희빈으로 강등됐다. 그 후 희빈은 1701년(숙종 27)에 인현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인현왕후를 무고한 혐의(무고의 옥)가 밝혀져 자진했다. 아들 경종이 즉위하자 1722년(경종 2)에 왕의 사친으로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으로 추존되고, 사당의 이름은 대빈궁, 묘소의 이름을 대빈묘라 했다

경릉敬陵(추존 덕종과 소혜왕후)

대빈묘를 지나 서오릉 정문 쪽으로 계속 내려오면 경릉이 왼쪽에 넓게 자리잡고 있다. 홍살문에서 바라본 경릉 전경. 경릉은 추존 덕종과 소혜왕후 한씨의 능이다. 추존이란 실제로 왕위에 오르지는 않았으나 세상을 떠난 후에 왕의 호칭을 내리는 것을 말한다. 덕종은 왕세자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자 의경세자의 시호를 받았으나, 둘째 아들인 자산군이 왕위에 오르자 덕종으로 추존됐다.

♧덕종(德宗) 이야기♧

추존 덕종(1438년 9월15일~ 1457년 9월2일)은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의 첫째 아들로 1438년(세종 20)에 경복궁 금중에서 태어났다. 1445년(세종 27)에 종실로서 도원군(桃源君)으로 봉해졌고, 1455년(세조 1)에 세조가 즉위하자 왕세자로 책봉됐다. 어려서부터 예절이 바르고 글 읽기를 즐겼으며 서예에도 능했으나 병세가 악화돼 승려들이 경회루에서 재를 올리고 병의 치유를 빌었는데, 이때 신숙주, 한명회 등도 함께 참여하여 세자의 완쾌를 빌었다고 한다. 그러나 병세가 더욱 악화돼 1457년(세조 3)에 경복궁 정실에서 20세로 세상을 떠났다. 덕종의 아버지인 세조는 계유정난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하고 조카 단종을 폐위하여 유배를 보냈다. 따라서 늘 이에 대한 마음의 짐이 있었으며, 사람들은 이러한 세조의 업보로 인해 그의 아들들이 단명했다는 이야기를 주고받곤 했다.

덕종의 죽음에 관해서도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세조가 영월에 유배 보낸 단종에게 사약을 내리기로 마음먹고 잠이 든 날 밤, 그의 꿈에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가 나타났다. 그녀는 분노한 얼굴로 나타나 세조를 꾸짖었다. “너는 흉악하고 표독스럽게도 내 아들의 왕위를 빼앗고, 그것으로도 부족하여 벽지로 내쫓더니 이제는 목숨까지 끊으려고 하는구나! 무슨 원한으로 이러는 것이냐? 네가 나의 아들을 죽이니, 나 역시 네 자식을 살려두지 않겠다. ”이 후 꿈에서 깬 세조는 다시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고 있는데, 동궁전의 내시가 급히 달려와 세자가 위독하다는 말을 전한다. 세조는 급히 동궁으로 달려갔지만, 덕종은 이미 세상을 뜬 후였다고 한다. 현덕왕후의 저주 때문에 세자가 숨을 거두었다고 생각하고 분노한 세조는 단종 복위 사건을 빌미로 현덕왕후를 폐위한 뒤 능을 파헤쳐 바닷가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세조는 일찍 죽은 아들에게 의경세자라는 시호와 의묘(懿墓)라는 묘호를 내리고, 현재의 자리에 장례를 치루었다. 이후 1469년에 둘째 아들인 자산군(성종)이 예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처음 성종은 예종의 양자입적으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의경세자는 바로 왕으로 추존되지 않았고, 황백고(皇伯考, 백부)라 칭하고 의경왕(懿敬王)으로 추존하되 종묘에는 부묘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하여, 1470년(성종 1)에 의경왕으로 추존하고 능호를 경릉(敬陵)이라 했다. 그 후 본격적인 논의를 거쳐 1475년(성종 6)에 덕종으로 추존되고 종묘에 신주를 부묘했다.

♧소혜왕후(昭惠王后) 이야기♧

소혜왕후 한씨(1437년 9월8일~ 1504년 4월27일)는 본관이 청주인 서원부원군 한확과 남양부인인 홍씨의 딸로 1437년(세종 19)에 태어났다. 처음 도원군부인으로 봉해졌다가 1455년(세조 1)에 세조가 즉위하자 왕세자빈으로 책봉됐다. 그러나 1457년(세조 3)에 덕종이 승하하자 정빈(貞嬪)의 칭호를 받고 출궁하여 사저(현재의 덕수궁)에서 생활했으며, 1465년(세조 11)에 칭호를 수빈(粹嬪)으로 고쳤다. 1469년에 둘째 아들 자산군이 예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고, 의경세자가 의경왕으로 추존되자 인수왕비로 책봉됐다. 이때 인혜왕대비(안순왕후)와의 위차문제가 논의돼 형제 서열로 정해져 인수왕비가 인혜왕대비보다 높은 위치로 정해졌다. 그 후 1475년(성종 6)에 인수왕대비로 높여졌다.

소혜왕후는 성품이 총명하고 학식이 깊었을 뿐만 아니라 효성이 지극했으므로 세조가 ‘효부’라는 도장을 만들어 내리기도 했다고 한다. 불심이 깊어 불경을 언해하기도 했고, 부녀자의 교육을 위해 ‘명심보감’ 등의 유교서적을 재편집하고, 예의범절을 가르치기 위해 ‘내훈(內訓)’이라는 책을 간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나친 정치간섭으로 며느리 폐비 윤씨의 폐위와 사사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기도 했다.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후 대왕대비가 됐으며, 1504년(연산군 10)에 갑자사화로 연산군의 폭정에 대한 충격으로 창경궁 경춘전에서 68세로 세상을 떠났다.

순창원順昌園(순회세자와 공회빈)

경릉에서 서오릉 정문 쪽으로 내려오면 순창원이 나타난다. 정자각 넘어 봉분이 보인다. 순창원은 조선 13대 명종의 원자인 순회세자와 공회빈 윤씨의 합장 원이다. 1563년(명종 18)에 순회세자가 세상을 떠나자, 고양 경릉(敬陵) 근처인 현재의 자리에 묘를 조성했다.

♧순회세자(順懷世子) 이야기♧

순회세자(1551년 5월28일~ 1563년 9월20일)는 명종과 인순왕후 심씨의 원자로 1551년(명종 6)에 태어났다. 1557년(명종 12)에 왕세자로 책봉됐고, 1561년(명종 16)에 가례를 올렸으나, 2년 뒤인 1563년(명종 18)에 13세로 세상을 떠났다.

♧공회빈(恭懷嬪) 이야기♧

공회빈 윤씨(?~1592년 3월3일)는 본관이 무송인 윤옥과 파평윤씨의 딸로 생년은 미상이나, ‘선조수정실록’에 10세에 왕세자빈으로 간택됐다고 기록돼 있어 1552년(명종 7)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1561년(명종 16)에 순회세자의 빈으로 황대임의 딸이 왕세자빈으로 간택됐으나 병으로 인하여 간택을 중단하고, 대신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됐다. 그러나 1563년(명종 18)에 순회세자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덕빈(德嬪)의 칭호를 받았다. 이 후 1592년(선조 25)에 41세(?)로 세상을 떠났다.

비록 왕족이라 할지라도 나라에 병란이 발생하면 이렇게 이름도 없이 유명을 달리할 수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당시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한 나라의 운명이 풍전 앞의 촛불이나 진배없을진대 백성들이 마주치는 고초는 어떠했을꼬. 한 나라 군주의 능력이 중요함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음을 순창원에서 확인하고 서오릉 탐방을 마친다.

서오릉 순례 탐방을 마치면서

순창원 탐방을 끝내니 어느덧 해는 서산으로 넘어가고 어둠이 시작되려 한다. 오늘 서오릉 탐방은 서오릉 정문을 들어와 명릉,재실, 수경원, 익릉을 탐방한 다음 역순으로 서어나무길, 창릉, 홍릉, 대빈묘, 경릉, 순창원으로 순례를 마쳤다. ‘묫자리가 명당이면?’이라는 질문에 독자들은 어떻게 답할까 많이 궁금해진다.

오늘 탐방에서 혜경궁 홍씨의 3대에 걸친 파란만장의 삶,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상극적 운명, 영조와 사도세자 부자지간의 골육상쟁을 상상해보며 육신이 묻혀있는 능을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어느 신문에 난 기사를 떠올렸다. 조선의 ‘후궁’들은 명문가 출신부터 노비·과부까지 출신들이 다양했다. 그중에서도 태종(19명) 광해군(14명) 성종(13명) 고종(12명) 순으로 후궁을 많이 뒀고 현종·경종·순종은 단 한명의 후궁도 맞지 않았다는 기사를 떠올렸다. 우리가 배운 역사로는 임금은 왕손을 끊지 않기 위해 후궁을 두어 대를 끊이지 않게 했다고 했다. 과연 그랬을까? 인간의 다른 한 단면이 아니었을까.

필자소개
월드코리안신문 명예기자
중국 쑤저우인산국제무역공사동사장
WORLD OKTA 쑤저우지회 고문
세계한인무역협회 14통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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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한 2021-01-27 07:09:08
주권,자격,학벌없이 대중언론항거해온 패전국奴隸.賤民불교Monkey서울대.주권,자격,학벌없는 서울대.추종세력 지속청산!
http://blog.daum.net/macmaca/733

http://blog.daum.net/macmaca/2967

윤진한 2021-01-27 07:08:37
하느님에덤비며(창조신내리까는 부처처럼)유교부정,불교Monkey일본.하느님보다높다는 성씨없는 일본점쇠賤民.후발천황(점쇠가 돌쇠賤民.불교Monkey서울대 전신 경성제대설립)옹립.한국은 세계종교유교국.수천년 유교,하느님,조상신,공자 숭배.해방후 조선성명복구령 전국민이 행정법.관습법상 유교국복귀. 동아시아(중국,한국,베트남,몽고) 세계종교국중 하나인 한국이 불교Monkey 일본의 강점기를 겪으며 대중언론등에서 유교가 많이 왜곡되고 있음.
http://blog.daum.net/macmaca/3131

@ Royal성균관대(조선.대한제국 유일무이 최고교육기관 성균관승계,한국 最古.最高대).Royal서강대(세계사반영,교황윤허,성대다음예우)는 일류,명문.주권,자격,학벌없이 대중언론항거해온 패전국奴隸.賤民불교Monkey서

윤진한 2021-01-27 07:07:59
@

일제강점기 강제포교된 일본 신도(불교), 불교, 기독교는 주권없음. 강점기에 피어난 신흥종교인 원불교등도 주권없음.

주권없는 패전국잔재 奴隸.賤民이자, 하느님.창조신을 부정하는 Chimpanzee계열 불교일본서울대Monkey와 추종세력들이 학교교육 세계사의 동아시아 세계종교 유교,윤리의 종교교육 유교, 국사등과 달리, 일본강점기때 일본이 유교를 종교아닌 사회규범으로 했으니까, 유교가 종교아니라고 최근 다시 왜곡하는데,이는 일제잔재 대중언론에 포진하여 루머수준으로 유교에 도전하는것임.한국은 미군정때,조선성명복구령으로 전국민이 조선국교 유교의 한문성명.본관을 의무등록하는 행정법.관습법상 유교국임은 변치않으며 5,000만이 유교도임.

@

인도에서 불교도는,불가촉賤民.조계종승려賤民한국과비슷.강점기 하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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