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지혜의 시가 있는 아침] 천년 묵은 달아 –김세영 시인
[신지혜의 시가 있는 아침] 천년 묵은 달아 –김세영 시인
  • 뉴욕=신지혜 시인
  • 승인 2021.02.02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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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영
김세영


천년 묵은 달아

숨길도 얼어붙어
빙폭으로 드리워진 하늘자락

유성처럼 미끄러져 내려오는
천 개의 빛살을 가진 한 사람

남산의 돌계단을 내려오는 그가
방전된 시간바늘이 온몸에 꽂혀
달빛에 번뜩이는 고슴도치 같네

어긋나 지나쳐버린
그때 그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천년 묵은 달이 길 위에 영사하는
옛 도성의 흔적을 더듬어 가네

달하 노피곰 도다샤
어귀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아직 육탈하지도 않은
설익은 그리움에 몽유하는
나를 보고, 마애불이 설핏 웃는구나

동 트자, 혼백의 그림자만
향나무 밑에 남겨두고
황망히 돌아가는 저 사람

어긔야 즌데를 드디욜세라
어긔야 어강됴리*

나뭇가지에 걸린 청동거울,
그 속에 비친 나와 뒷모습이 닮았구나

어귀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고전시가 「정읍사」에서 인용


유려한 시간의 흐름을 뛰어넘어 생생하게 살아있는 시의 진경과 절창을 만나보라. 바로 ‘천년 묵은 달아’이다. 그 음률이 어찌나 생생한지, 온종일 뇌리 속을 돌아다니고 허밍으로 번지는 이 시, 이 시를 읽은 당신은 돌아서도 이 시가 떠오르며 구절들이 저절로 읊어질 것이다.

이 시엔 백제가요 정읍사의 구절들이 소환돼 있다. 옛 가요에서 유래된 음률이 이 시편 전체에 혈이 돌게 하여 시의 절정에 이르게 한다. 대체 이 시속 정경은 어디까지 개화하듯 활짝 펼쳐지는 걸까. 그 혼과 넋으로 간곡하면서도 열렬한 주문 같은 ‘달하 노피곰 도다샤’의 구절이 시인의 자아와 조응하고 융합될 때 어찌 혼연일체 되지 않겠는가.

이 신비한 백제의 전설 가요와 현실을 내왕하고 소통할 수 있는 시는 오직 시인만이 빚어낼 수 있는 절창의 시! 천년이 흘러도 그 가요의 정한은 무색해지지 않을 이 시의 드라마틱한 장면 속, 우리는 시인의 역작에 초대된 것이다. “남산의 돌계단을 내려오는 그가 / 방전된 시간바늘이 온몸에 꽂혀 / 달빛에 번뜩이는 고슴도치 같네” “어긋나 지나쳐버린/ 그때 그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 / 천년 묵은 달이 길 위에 영사하는 / 옛 도성의 흔적을 더듬어 가네” 라고 시인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하늘에서 내려온다고 한다.

또한 여기서 백제 어느 행상인의 아내가 부른 “달하 노피곰 도다샤/ 어귀야 머리곰 비취오시라*”의 추임새가 이 시에 불꽃을 당기고 더욱더 열기의 도가니로 몰아간다.

그렇다. 이 시의 고대와 현실의 구분 없이 천년 세월이 흘러도 천년사랑으로 흐르는 시의 푸른 맥과 혼을 되짚어보게 하는 참된 시를 맛보게 한다. 혼과 넋이 들어 있는 우리의 시란 과연 무엇인지를 깊이 자성케 하며, 각성토록 한다.

고대, 현재, 미래마저 무화된 이 시적 테마는 시각, 청각의 감각을 넘나들며 우리시의 가치를 횃불처럼 승화시킨다. 천년 전이나 현재를 자유자재 넘나들며 천년 묵은 달 아래 당신과 내가 아직도 바로, 지금, 여기, 진행 중인 것이다. 자 우리 모두가 이 진경의 대서사적 역작 속에 캐스팅된 출현진이다. 어느새 이 시속에 매료된 독자들은 그 중독성에 감염되어, 영 헤어나지는 못할 것이다. 어귀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김세영 시인은 2007년 「미네르바」로 등단, 시집으로 『하늘거미집』 『물구나무서다』 『강물은 속으로 흐른다』 가 있으며, 서정시 선집 『버드나무의 눈빛』, 디카시집 『눈과 심장』이 있다. 부산의과대학, 서울의과대학 대학원 졸업, 내과 전문의, 의학박사, 성균관의대 외래교수 역임, 계간 『포에트리 슬램』 편집인, 한국의사시인회 고문, 시산맥시회 고문, 한국문학예술인협회 고문, 제9회 미네르바 작품상, 14회 한국문협 작가상등을 수상했다.

필자소개
《현대시학》으로 등단, 재외동포문학상 시 부문 대상, 미주동포문학상, 미주시인문학상, 윤동주서시해외작가상 등을 수상했다. 세계 계관시인협회 U.P.L.I(United Poets Laureate International) 회원. 《뉴욕중앙일보》 《미주중앙일보》 《보스톤코리아》 《뉴욕일보》 《뉴욕코리아》 《LA코리아》 및 다수 신문에 좋은 시를 고정칼럼으로 연재했다. 시집으로 『밑줄』, 『토네이도』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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