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호의 역사이야기] 의릉 탐방기
[이동호의 역사이야기] 의릉 탐방기
  • 이동호 월드코리안신문 명예기자
  • 승인 2021.03.01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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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북구 석관동에 있는 의릉 입구 전경
서울 성북구 석관동에 있는 의릉 입구 전경

의릉은 서울특별시 성북구 화랑로32길 146-37(석관동)에 있는 세계문화유산 유적지로 지정된 조선 저의 20대 경종(景宗)과 그의 계비인 선의왕후(宣懿王后)가 안장된 능(陵)이다.

의릉 주위에는 1972년 7월4일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던 구 중앙정보부 강당 건물이 있고, 이문동 한국외국어대학교 캠퍼스, 석관동 한국예술종합학교 캠퍼스가 위치해 있다.

일반적으로 조선 왕릉의 쌍릉(雙陵)은 좌우로 조성되나 의릉은 왕과 왕비의 두 봉분을 앞뒤로 배치한 동원상하봉(同原上下封) 형식 (또는 상하이봉릉(上下異封陵) 형식이라고도 부름)으로 조성한 것이 특이하다. 능역 위에 경종의 능이 그 아래에 선의왕후 능이 자리 잡고 있다.

이는 정혈(正穴)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풍수지리적 이유 즉 능역의 폭이 좁아 산천의 좋은 기운이 흐르는 맥을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능을 위아래로 배치한 것이며 또한 자연의 지형을 훼손하지 않으려는 이유라고 한다. 이런 동원상하릉 형식은 여주 영릉(寧陵·제 17대 효종과 인선왕후 장씨 능)과 의릉 두 왕릉에서만 볼 수 있다.

의릉에 들어서면 홍살문 앞에 금천이 흐르고 그 위에 금천교가 있으며, 정자각은 정청이 앞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에 양쪽에 1칸씩 익랑을 덧붙인 것이 특이하다. 따라서 여느 정자각보다 규모가 크고 웅장해 보인다.

경종은 장희빈으로 잘 알려진 희빈 장씨(張氏)와 숙종의 장남으로 1688년(숙종 14년) 태어나 1670년(숙종 16년) 세 살 때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1717년(숙종 43년)에 3년간의 청정대리를 끝내고 숙종이 세상을 떠나자 1720년에 경덕궁(경희궁)에서 즉위했다.

홍살문에서 바라본 의릉, 정자각 뒤로 동원상하봉 형식의 경종과 선의왕후 능이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홍살문에서 바라본 의릉, 정자각 뒤로 동원상하봉 형식의 경종과 선의왕후 능이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경종(景宗)의 생애는 어릴 적부터 편치 않았으며, 재위 4년 동안 신임사화(辛壬士禍) 등 당쟁이 그치지 않았고 소생 없이 병약하여 재위 4년 만인 1724년 창경궁 환취정에서 37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를 두고 비운의 왕이라고 부른다. 한편에서는 경종의 죽음에 대해 독살설도 있으나 확인된 기록은 없는 상태다.

경종의 계비 선의왕후(宣懿王后)는 함원부원군 어유구(魚有龜)의 딸이며, 세자시절 첫 번째 세자빈이었던 단의왕후가 1718년(숙종 44년)에 사망하면서 세자빈에 책봉되었으며 경종이 즉위함에 따라 왕비가 되었다. 1730년(영조 6년) 경희궁 어조당에서 26세로 세상을 떠났다.

경종(景宗) 이야기

경종 이야기를 하려면 경종의 생모 장희빈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장희빈 이야기는 2021년 1월 19일 올린 이조왕릉 역사기행 4화 서오릉 탐방기에서 대빈묘(장희빈 묘)에서 이미 올렸다. 여기서는 경종을 비운의 왕이라고 부르는데 왜 그렇게 부를까를 고찰해 본다.

실록에는 경종이 병들고 허약했던 왕이었다는 기록뿐 왜 병약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다만 실록과 야사로 면면을 짐작해 볼 뿐이다.

경종의 아버지 숙종 임금 역시 자식 교육에는 엄격했다. 경종 역시 부왕의 바람대로 4살 때 천자문을 떼고 8살 때 성균관 입학례를 신하들 보는 앞에서 치렀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어린 시절 영특하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일반 왕자들과 다를 바 없이 잘 자라났다.

정자각에서 바라본 의릉, 앞의 능이 선의왕후 능, 뒤의 능이 경종 능이다.
정자각에서 바라본 의릉, 앞의 능이 선의왕후 능, 뒤의 능이 경종 능이다.

그러나 경종이 14살 때 생모인 희빈 장씨가 아버지가 내린 사약을 받는 비극적 사건이 발생한다. 자신의 거처에 신당을 짓고 인현왕후를 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죄목이다. 장희빈이 사약을 받고 죽던 날 희미한 꼬리를 남기고 자취를 감춘 심상치 않은 혜성이 궁궐의 밤하늘에 보였던 날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일설에서는 이날의 정황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사약을 받은 희빈 장씨는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고 싶다고 숙종에게 애원을 거듭했다. 숙종은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한때 부부의 연을 맺었던 여인의 마지막 소원을 끝내 거절하지는 못했다. 결국, 세자를 희빈 장씨에게 데려다주었고, 이때 예기치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갑자기 독기 서린 눈빛으로 변한 희빈 장씨가 세자에 달려들어 세자의 하초를 움켜쥐고 잡아당겨 버린 것이다. 곁에 서 있던 환관들이 겨우 세자에게서 장씨를 떼내어 놓았지만 세자는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았다.

이 일화는 장희빈의 간악함을 극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후세의 호사가들이 지어낸 야사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경종에게 있어 어머니 장희빈의 죽음은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경종은 평생 원인이 명확하지 않은 병환에 시달렸고 자식도 낳지 못한 채 승하하고 말았다. 어쩌면 경종의 짧은 인생은 혜성이 남기고 간 흔적이 아니었을까.

동원상하릉 형식으로 조성된 의릉. 이런 동원상하릉 형식은 여주 영릉과 의릉 두 왕릉에서만 볼 수 있다.
동원상하릉 형식으로 조성된 의릉. 이런 동원상하릉 형식은 여주 영릉과 의릉 두 왕릉에서만 볼 수 있다.

경종은 아버지 숙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태어나서 돌이 지난 후 바로 왕세자가 되고 거의 30년을 왕세자로 지냈지만 거의 원인 모를 병환에 시달려 재위 기간 4년 동안 업적을 남길 기력도, 틈도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비록 몸은 성치 못했지만, 천성이 착하여 경종의 따뜻한 성정이 실록 곳곳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 실례로 자신을 낳아 준 어머니는 아니었지만, 인현왕후를 마음으로 섬겼고, 살아서 자신에게 몹시도 엄한 아버지였지만 숙종이 병석에 들 때마다 십수 년 동안 약시중을 거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또한, 실록은 경종 사후에도 경종은 아량이 넓어 신하들의 좋고 나쁜 간언들을 마음을 열어놓고 받아들였으나 이상적인 정치를 보좌할 충직한 신하들을 찾지 못한 한스러움이 표현되고 있다.

또한 경종은 살아생전 37년 동안 정비 단의왕후 심씨와 계비 선의왕후 어씨 외에 일절 후궁을 두지 않았다. 이로 미루어 보아 천성은 곱고, 효성도 지극하고, 주색을 멀리하며 가정적인 왕이었으나 자식 복과 처복이 없는, 늘 병환으로 신체적으로 고통이 많아서 제대로 정사를 펴지 못한, 시대를 잘못 태어난 '불운의 왕'이라고 세인들이 안타깝게 부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필자소개
월드코리안신문 명예기자
중국 쑤저우인산국제무역공사동사장
WORLD OKTA 쑤저우지회 고문
세계한인무역협회 14통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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