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24] 토론토 한인사회에 불쑥 나타난 탈북자 가족
[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24] 토론토 한인사회에 불쑥 나타난 탈북자 가족
  • 송광호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고문
  • 승인 2021.03.08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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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어떻게 바뀌어왔으며, 또 어떻게 변화해 갈 것인가? 1989년 이래 북한을 8차례나 방문해 취재한 송광호 토론토 주재 언론인이 방북 때마다 보고 느낀 점들을 시리즈로 정리했다. ‘바뀌어온 북한’에 초점을 맞춘 이 글은 현재와 같은 남북경색국면에서 긴 눈으로 북한의 새로운 변화를 조망하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편집자주>

북한 코로나19 검역 소독검사

캐나다는 난민이민자에겐 참 좋은 나라다. 한편으론 한심한 나라처럼 보이기도 한다. 누구든 이민국을 찾아 난민신청을 하면 쉽게 받아주는 국가인 듯싶기 때문이다. 신청비용도 없다. 서류가 접수되면 임시 주민번호 증을 발급받고 약 1년 남짓 심사날짜를 기다린다.

한때 신청서류가 밀려 심사통보가 2년 이상 걸리는 시기도 있었다. 그 대기기간 중 정부는 난민신청자에게 매달 거주비용 일부와 자녀교육비, 병원비 등 경비일체를 전액 제공한다. 일단 난민접수가 통과되면 정부판정이 내려질 때까지 신청자를 먹여 살린다. 시민권자나 꼭 같은 조건의 대우를 받는다. 이후 심사판정 때 난민지위가 승인되면 영주권을 받게 된다.

캐나다는 세계 각처에서 난민들을 받아들이는 대표적인 국가다. 늘 지속적으로 난민을 받아들이고 한쪽에선 심사를 한다. 여기에 편승해 대한민국거주 탈북자들이 몰려들었다. 난민과는 전혀 해당 안 되는 한국에 정착했던 탈북자들이다. 그들은 이번엔 ‘탈남자’로서 다시 보따리를 싸들고 대거 캐나다 난민창구를 두드려 온 것이다.

고향을 등지고 구사일생 한국 땅에 왔다가, 왜 언어도 안 통하는 영어권지역으로 무작정 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정부 정착금이 부족해서인가. 한국은 캐나다와 비교해 이젠 뒤떨어진 나라가 아니다. 더구나 탈북자는 실지로는 한국난민으로 캐나다이민국에 거짓말로 신고해야 하니 진실성이나 모양새도 안 좋다. 지난 10여년 사이 이런 식으로 3천명에 달하는 탈북자들이 캐나다에 밀물같이 들어왔다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현재도 토론토에 수백 명이 남아있다고 밝혀져 있다.

재일교포 북송. 1959년 니키타 항구(만경봉 호).
재일교포 북송. 1959년 니키타 항구(만경봉 호).

토론토교포사회는 탈북자라면 무조건 구명운동에 발 벗고 나선다. 어려운 처지의 동족을 돕자는데 반대할 이유가 없다. 탈북자 중엔 심각한 범죄자가 포함돼 있는 가능성을 간과하고 있다. 또 구별해 낼 수도 없다. 어쨌든 그간 한인기독교계와 일부 한인정계인사가 앞장서 탈북자를 위한 탄원서와 서명운동 등을 벌여왔다. 그로 인해 다수의 추방 직전 탈북자들이 구제됐고, 마침내 영주권까지 받는 결과가 초래됐다.

나는 모스크바에 상주하던 시절 우연찮게 탈북자들을 접했다. 90년대 초반이다. 그때 탈북자라면 전부 기아선상에서 헤매는 불쌍한 동족으로만 여겼다. 또 사실이 그랬지만 다른 경우도 경험했다. 탈북자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 경우다. 기아현상은 지방주민에 관련된 얘기이고, 평양 거주나 고위급 탈북자 경우는 달랐다. 이번 소개는 캐나다입국 탈북자 제1호 리성대(66년생) 경우와 북한 황장엽 관련 얘기다. 탈북자스토리는 이번을 끝으로 더 이상 다루지 않겠다.

캐나다 상륙 탈북자 제1호 리성대는 북경주재 북한대사관 경제(무역)담당 외교관이었다. 지난 2001년 8월 토론토에 탈북자가족으로 한인사회에 불쑥 나타났다. 중국 북경에서 위조여권을 이용해 토론토로 입국한 것이다. 리성대(66년생/ 당시 35세)와 11살 연상인 부인 오순애(55년생), 그리고 4살 된 아들과 함께였다. 리성대부부는 둘 다 재일교포 출신이다. 하지만 부인은 토론토 상륙 3개월 후 다시 대만, 일본을 거쳐 평양으로 되돌아갔다. 결국 30대의 리성대와 아들 둘만 남아 캐나다교포사회 최초의 탈북자신분이 된 것이다.

외아들인 리성대(Ree, Song Dae)는 부모와 일본에서 북송선(만경봉 호)을 타고 와 평양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평양사회과학원 간부였다. 리성대는 “나는 1990년 1월 김정일 위원장지시로 평양 젊은 층에서 첫 간부를 기용할 때 가장 먼저 뽑힌 청년세대 1기생 선발주자였다”며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북경 소재 북한대사관에서 고위급 경제담당 관리로 일하면서, 중국을 발판으로 일본과 러시아 등을 상대로 해외에서만 11년간 무역업(외화벌이)에 종사해 왔다고 밝혔다.

김정은 승리구호

나와 처음 만났을 때도 손에는 무전기 같은 두터운 3대의 휴대전화를 지니고 있었다. 국내, 국제용 등 전화라고 말했다. 보통 북한은 외국에 거주할 때 가족이 분리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리성대 경우 해외 장기체류자로서 식구들이 함께였다. 그만큼 당국에 신뢰가 깊었던 것 같다. 중국에서 10년 이상 외화벌이로 잘 나가던 그가 탈북을 결행케 된 것은 극히 사소한 사건 때문이었다. 어느 날 중국과 한국과의 축구시합 TV방영을 여러 동료와 볼 때였다. 한국 팀이 먼저 한 골을 넣자 저절로 소리를 치며 박수를 쳤다. 그게 발단이었다. 누군가가 ‘북한간부가 적성국 한국을 위해 환호성을 올렸다’며 그 행위자체를 ‘자질상의 문제’로 삼은 것이다.

당시는 그러한 사실을 몰랐으나, 나중 그러한 내용을 정보를 통해 알게 됐다. 언제나 그를 은밀히 감시하는 눈길이 있었다. 그동안 여러 잘못들이 모여 당국에 보고됐던 것이다. 언제 평양에서 송환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이었다고 한다. 사실 1997년 2월 서울로 망명한 황장엽 비서도 비슷한 경우였다. 먼저 리성대 와 인터뷰한 당시 내용을 한데 묶어 그의 탈북과정 스토리를 전한다.

<나 (리성대)는 일본에서 태어나 북송선을 타고 평양에서 살았다. 청년세대 1기생 간부로 선발돼 해외(중국)에서 11년간 살다 보니, 정신무장이 느슨해진 것은 사실이다. 그간 내 여러 실수가 보고됐음을 알았고, 평양송환 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북으로 되돌아가기 싫어 탈북을 결심했다. 무역업을 했기 때문에 수중엔 돈 여유가 있었다. 캐나다는 한국과 무비자협정이 체결돼 있는 선진사회라 적당해 보였다. 나는 곧잘 연변출신 조선족으로 행세해 중국에도 한국친구가 있었다.

한국가짜여권을 입수해 처음 토론토에 닿자 한국총영사관 담당자를 만났다. 그는 나를 한 호텔로 안내해 줬으나, 내 여권을 뺏으려 했다. 나를 진정 생각해 주는 것 같지 않았다. 중간에 몰래 호텔을 도망쳐 나와 교포지 광고에서 한국인 하숙집을 찾았다. 하숙집주인은 교포신문사에 탈북자가 나타났다고 연락해, 한인들이 비로소 내 존재를 알게 됐다. 이후 나는 계속 옮겨 다녔다.

1.4후퇴 흥남부두

토론토엔 아는 사람 한 명 없었다. 아내가 일본 부모에 전화하니 펄펄 뛰고 빨리 평양으로 돌아가라고 난리였다. 아내 아버지는 일본 조총련 최고위간부로 북한충성의 골수파인물이었다. 결국 아내는 3개월 후 나와 4살짜리 아들을 남겨둔 채 홀로 평양으로 되돌아갔다. 토론토공항에서 헤어지며 “잘 사시오!”하고 울며 뛰어가던 모습이 생생하다.

나는 처음부터 한국인 이민업자나 하숙집 주인을 잘못 만났다. 한인이민업자에게 5천 달러 수수료를 주고 난민신청 등을 부탁했다. “그런데 6개월이 지나도록 신청조차 안 해 놓았다. 아까운 돈과 시간만 날리고 허송세월을 보낸 셈이 됐지요.” 나중 알고 보니 비용 없이도 난민신청용지에 써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나는 적지 않은 돈을 받고서도 전혀 일하지 않은 한인이민업자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난민변호사로 바꾸고서야 쉽게 난민신청이 등록됐다.

주위 친구 한 명 없으니 너무 외로웠다. 이삿짐을 도와주는 비슷한 또래 한인을 만나 술을 함께 할 때 내가 탈북자임을 밝혔다. 그는 깜짝 놀라더니 한국 고위층을 잘 안다며, 나를 한국으로 안내하겠다고 고집했다. 대신 한국에서 정착금이 나오면 절반을 달라는 것이다. 그에게 탈북자라고 고백한 자체를 후회했으나 이미 쏟아진 물이었다. 그래도 외로움에 그와 자주 술을 먹었다. 그는 일정한 직업도 없는 듯 보였다. 하루는 말다툼 끝에 그를 때렸다. 나는 체격이 말랐지만 예전 권투를 해서 싸움에는 자신이 있었다. 애초 내 탈북자신분을 밝힌 게 잘못이었다. 그 후 그를 만나지 않았다.

나는 계속 거처를 바꿔 다녔다. 일요일에는 교회를 전전했다. 어느 교회든 전부 따뜻이 맞아줬고, 그들에게는 내가 연변에서 온 조선족이라고 말했다. 나는 어린애 때문에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한번은 중국의 가깝던 북한동무에게 전화를 했더니 “북한에서 리성대 찾는 광고를 중국 인민일보에 며칠째 실렸었다”고 알려주었다. 나는 캐나다 땅에서 조용히 살고 싶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사람들을 잘못 만나 일이 꼬이고 있었다.>

최총재부인이 기증한 서예가 한일동 선생 10폭 병풍

리성대는 토론토 교포신문의 첫 탈북자가 등장보도로 많이 알려져 있었다. 당시 토론토에는 탈북자가 전혀 없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한편 리성대는 의심으로 똘똘 뭉쳐있는 사람이었다. 왜 그런지 한국정부나 캐나다 정부 관리들을 계속 피하는 눈치였다. 오히려 그들에게 솔직히 털어놓고 도움을 청하는 게 좋았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그의 고생은 자업자득인 셈이다. 더구나 성격도 조변석개로 변해 통 믿음이 가지 않았다.

하루는 우리 집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그때 거실에 세워둔 최홍희총재 태권도글씨액자를 보더니 깜짝 놀란다. “아, 최홍희 태권도총재를 아십니까.” “최 총재야 오래전부터 토론토시민인데 잘 알지. 서예가로 명필이요. 저 액자는 1989년 4월 내게 써 준 태권도 한글글씨요. 보통 한문태권도 글씨인데 한글글씨는 드물어요.” “저도 두 번 북경(북한)대사관에서 만난 적이 있어요. 최 총재는 북에서 최고위층 인물로 대우받는데 토론토에 사는 줄 몰랐어요···”

이참에 최홍희 서예솜씨와 그의 스승 ‘옥람 한일동’ 선생 존재를 알린다. 최홍희는 대한민국 국전에서 서예부문 특선에 두 번 당선됐다. 옥람 한일동 선생의 수제자였다. 옥람은 일제강점기 조선전국(일제 선전) 서예대회 대상(장원)을 차지한 인재로 택견에도 조예가 깊었다. 최홍희는 옥람에게서 어릴 때 서도와 택견도 함께 배웠다. 평양 모란봉 부벽루 현판에 걸려있던 3명 서예가 (추사 김정희, 석봉 한호, 옥람 한일동)중 한명이었다.

6.25전쟁 중 폭격으로 그 현판이 불타버렸다. 특히 최 총재가 애지중지 소장하던 옥람 작품 10폭 병풍(첨부)은 문화재에 속했다. 최 총재 타계 후 나는 최 총재 부인 한춘희 여사를 설득해, 그 10폭 병풍을 옥람의 고향인 강원도 동해시 부곡동(당시 김학기시장)에 무상 기증케 했다. 당시 동해시에서 박물관을 건립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동해시의 두 명 공무원이 즉시 달려와 인수해갔다.

송광호와 고 문명자기자(평양 목란관) 우편
송광호와 고 문명자 기자(평양 목란관)

문제는 그 후 동해시 박물관건립 건은 영구 취소됐기 때문에 발생됐다. 물론 고의성은 없었으나 기증자 입장에선 일종의 사기행위나 다름없었다. 박물관 건립을 약속하고 귀중한 유품을 가져갔기 때문이다. 그럴 때 동해시 측에서는 정중히 사과나 양해를 구해야 하는 것이 상식 아닌가. 그러나 아무도 기증 건에 사과 한 번 하지 않았다. 최 총재 부인은 “20년 남짓 세월 동안 단 한번 고맙다는 인사나 새해 연하장 한 장 보낸 적 없었다”고 섭섭해 했다.

수년전 한국방문길에 동해시를 찾았다. 만남을 약속했던 심규언 시장은 자리에 없었다. 그때 대신 김종문 부시장을 만나 기증자 요구대로 “박물관 건립이 무산된 만큼 유명 문화재급 병풍이니, 인근 삼척박물관이나 또는 타 박물관으로 이관해 많은 사람들이 관람토록 하기를 원한다”고 건의했다. “만일 그렇게 못 한다면 동해시에서 마냥 갖고 있을게 아니고, 차라리 한일동 선생유족에게 전해주는 게 좋겠다는 것이 기증자의 뜻”이라고 전했다.

그때 김 부시장은 “한번 시에 기증을 했으면 그만이지, 왜 여러 말씀이 많은가?”하는 식의 반응에, 태도가 아주 오만불손해 놀랐다. 정중히 사과를 해도 부족할 판인데 너무 어이가 없었다. 그나마 함께 자리했던 정의출 과장이 공손히 끝까지 예의를 갖춰줘 참았던 것이 기억난다. 아무튼 한일동 서예가 병풍의 동해시 주선 기증 건으로 나는 최 총재 부인에게 크게 신용을 잃었다. 한 고미술 전문가에 따르면 대한민국 유일한 옥람 서예가의 10폭 병풍가치는 가격을 정할 수 없을 만큼 귀중한 보물에 속한다고 평가했다.

리성대 는 북한생활 실상을 소상히 알려줬다. 북한돈은 중국이 전부 끌어간다고 주장했다. 북한 어느 장마당 경우든, 물주는 중국인(화교)이고 암시장도 중국인이 장악해 있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북한에는 돈이 없다는 것이다. 북한주민들은 중국인으로부터 물품을 건네받아 장사를 한다 했다.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되놈이 번다’는 비유 그대로다. 평양 북새동 아파트 경우 한 동이 전부 중국인들이 거주한다며, 평양 시내 운행되는 상당수의 자가용들도 중국인소유가 많다고 전했다. 또 북한주민들은 호텔이든 장마당이든 예전과는 달리 중국 돈을 선호한다고 밝혔다. 코로나19 이전까지 북한을 자주 다녔던 해외교포들도 “주민들이 미국달러보다 중국 돈을 더 선호해요. 북한에서 사용하기도 편리하고 더 ‘힘’이 있다고 해요”라고 전했다.

함북 주택들 일부

한편 리성대는 북한 연좌(Collective punishment)제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했다. 자신의 잠적 후 평양 과학원 홀아버지에 대해 미칠 영향 때문이었다. “황장엽 경우는 가깝거나 먼 친척들을 모두 뒤져 근 1만 명이나 잡아들이고, 뿌리를 뽑았다는 얘기를 들었어요.”라고 했다. 그는 또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뒤에 북경주재 북한대사관에 은밀히 공문이 시달됐는데, 완전히 남쪽을 타도해야 한다는 내용이었지요”라며, “당시 김대중 정부가 김정일의 기만정책에 완전 말려들었다”고 주장했다. 또 “북한은 변한 게 없고, 앞으로도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때 한국정부가 혹시나 하고 기대하던 ‘김정일의 남쪽방문’은 허황된 꿈이었다고 말해, 당시 강원도민일보에 기사를 실었던 기억이 난다.

리성대 난민심사 때였다. 캐나다이민-난민심사위원회는 리성대의 어린아들 심사는 통과돼, 영주권문제가 쉽게 해결됐다. 하지만 정작 리성대 경우는 부결됐다. 나중 재심을 청구했으나 두 번째도 기각됐다. 이유는 “리씨의 난민자격은 인정되지만, 북한 고위공무원으로 반인류적 범죄를 범한 북한정부에 공모했다 (complicity with a government guilty of crimes against humanity)”고 판결났기 때문이다. 다행히 5세 어린 아들 보호자로서 ‘정상참작’해 추방명령은 내리지 않았다. 한 이민전문변호사는 이러한 경우 ‘아들보호자 구실로 다시 정상참작 인도적 이민신청으로 영주권을 받을 수 있다’고 조언했다.

리성대는 다시 재심청구 허가요청서를 제출한 상태에서 나는 그와의 만남을 그쳤다. 나중 캐나다영주권을 받았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확인하지 않았다. 지금 그의 나이도 30대에서 50대 중반으로, 어린 아들도 20대 중반 청년이 됐을 것이다. 그들이 어디 살든 제2의 새로운 보람 있는 삶이기를 바랄 뿐이다.

북한 시멘트 공장

다만 생각하면 같은 탈북자라 해도 채씨 노인이나 리성대 또는 황장엽 비서 등 북한에서 양지쪽에 살던 인물들은 한국이나 해외에 나와서도 잘 풀린다는 점이다. 따지고 보면 리성대의 탈북은 북한정부 측면에서는 그가 국가공금을 횡령해 도주한 셈이니 범죄자임에는 틀림이 없다. 반면 북한에서도 음지에 살던 서민들은 자유 세계에 와도 역시 어려운 지경에서 못 벗어남을 목격하니 측은한 마음이다.

황장엽 비서 내용은 다음호로 미룬다. 황장엽을 망명시킨 주모자 이연길(켈로 KLO부대출신)전 대장과 황장엽 비서가 내게 밝힌 케케묵은 얘기(주간동아 폭로전)로 당시 관련 일을 새삼 전한다. 황 비서도 북에서 체포직전 극적으로 망명해 탈출한 대표적 케이스였다.(계속)

필자소개
강원도민일보 북미특파원,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전 대표
대한민국 인권상 수상, 관훈클럽 국제보도상 수상, 한국신문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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