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주열의 동북아談說-61] 원경왕후와 무인정사(戊寅靖社)
[유주열의 동북아談說-61] 원경왕후와 무인정사(戊寅靖社)
  • 유주열(외교칼럼니스트)
  • 승인 2021.03.08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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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근교 양수리는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다. 북한강의 흐름이 빠르다면 남한강은 완만하다. 남한강의 상류를 거슬러 오르면 여주시가 나온다. 여주는 본래 여흥이라 불렀고 여흥은 여강에서 유래됐다. 남한강의 일부지만 유독 이곳을 여강이라고 부르는 것은 강심이 깊어 검게 보이기 때문이다. 여흥이 여주로 승격된 것은 세종의 왕릉(英陵)이 이곳으로 천장돼 오면서부터다.

효도가 극진한 세종이 부모님이 계신 대모산 헌릉의 서쪽에 자리를 잡았는데 당대의 풍수대가는 “장남을 잃을 수 있는 좋지 않은 자리”라고 반대했지만 무시했다. 풍수설을 불가신불가폐(不可信不可廢)라고 했던가. 그 후 세종의 장남 문종, 손자 단종,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 차남 예종의 장남 인성대군 등이 줄줄이 요절하자 조정은 명당을 찾아 천장할 것을 의논한다. 마침 여흥에 조선 최고의 길지를 찾아냈다. 우연인지 모르지만 세종으로서는 어머니 원경왕후의 고향 즉 외가로 찾아온 셈이다.

조선 초기 태종비인 원경왕후 이후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 고종 및 순종황제의 명성황후와 순명효황후 등 4명의 왕비와 4명의 부원군(왕비의 아버지)이 여흥민씨 집안에서 배출됐다. 그래서인지 여주의 숲속에는 밤만 되면 부엉이가 내려와 “부원군” “부원군”하고 운다고 한다.

여주의 남한강변에는 고승 나옹과 그의 제자 무학과 인연이 깊은 신라고찰 신륵사가 있다. 대모산 헌릉에는 불교를 싫어하는 태종이 반대해 원찰을 짓지 못했지만 세종과 소헌왕후의 합장릉인 영릉에는 신륵사가 원찰로 지정됐다. 야사에는 민다경으로 알려진 원경왕후의 친정 여흥민씨 집안은 고려 중기부터 대대로 과거에 급제한 명문가로 아버지 민제 역시 고려말 문과에 급제, 한성부윤을 지냈다.

민제는 이성계의 5남으로 자신의 제자인 이방원을 사위로 맞이했다. 이방원 16세, 민다경 18세였다. 당시 경화(京華)세족 여흥민씨가 변방 함경도 무인 출신의 이성계 집안보다 가문의 격은 훨씬 높았다고 한다. 이방원은 결혼한 다음 해에 최연소로 과거에 급제해 주변을 놀라게 했다. 이러한 성과로 21세에 당대 최고의 유학자이자 정치가인 문하시중 이색의 서장관으로 발탁돼 명나라를 방문했다. 그 후 조선건국 초기 조선의 왕자 자격으로 수도 남경을 다시 방문, 명 태조 주원장을 두 번씩이나 만나, 후에 중국을 잘 아는 외교군주라는 명성을 얻기도 했다.

민제는 사위의 앞날을 열어주기 위해 당대 최고의 책사 하륜을 소개해 주었다. 이방원은 스승이자 멘토인 장인과 총명한 부인 그리고 득실득실한 처남들에 둘러싸여 여흥민씨 집안의 기세에 눌린 듯했다. 민다경도 여성의 위상이 높았던 고려사회의 분위기로 건장한 남자 형제들과 함께 성장해 여걸풍이었다고 한다.

그 무렵 혁명가 정도전은 권력을 사유화한 고려왕들의 폐행을 경계해 재상 중심의 신권(臣權) 정치로, 위로는 임금을 보필하고 아래로는 백관을 통솔, 백성을 편안하게 다스리는 이상국가 건설을 꿈꾸었다. 그는 공양왕의 선양을 이끌어내어 전쟁영웅 이성계를 추대해 새 왕조 조선을 건국했다. 이성계의 전폭적 신임을 받은 정도전은 신권강화를 못마땅해하는 왕자들을 견제하기 위해 그들의 사병을 혁파하고 무기를 회수했다. 민다경은 정도전의 불순한 전횡을 의심하고 때를 기다려 무기를 집안에 감추어 두었다.

태조 이성계는 개국공신이자 첫 왕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 방석을 세자로 책봉했다. 본래 수도 개경의 권문세족 규수인 강씨는 뛰어난 지략으로 시골 무인 출신의 이성계를 도와 복잡한 중앙정치판을 풀어나가게 하고 대담한 결단력으로 막후에서 조선건국을 성공시킨 일등공신이었다. 불행히도 건국 4년 만에 정치동반자 왕비 강씨가 죽음으로써 이성계는 멘붕상태에 빠져 정사를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병환으로 드러눕는 일이 잦았다. 민다경은 태조 이성계의 병중의 틈새를 이용, 머뭇거리는 이방원을 부추겨 1398년 무인년에 사직을 안정시킨다(靖社)는 명분으로 정변을 일으킨다.

이방원은 선발제지(先發制之)의 기습전으로 감추어 둔 무기를 꺼내고 심복과 민씨 처남들을 동원해 세자 방석을 폐위하고 정도전 일파를 일시에 제거한다. 이방원은 적장자 계승원칙을 내세워 큰형 이방과를 세자로 옹립하고 태조 이성계가 양위하자 정종으로 즉위토록 한다. 후에 정국이 안정되자 자연스럽게 양위를 받아 스스로 왕이 되고 민다경은 원경왕후가 된다.

왕이 된 태종 이방원은 자신을 도와준 처남들의 막강한 힘에 위협을 느끼고 왕권강화를 위해 이들의 숙청을 계획한다. 특히 세자 양녕이 어릴 때 외가에서 자랐기 때문에 외숙들과 각별한 사이로 양녕이 왕이 되면 외척의 세도정치가 정사를 농단할 것을 우려했다.

태종은 양녕을 폐세자하고 처남들을 차례로 귀양 보내 사약을 내린다. 부원군 민제는 허물없고(無咎), 병들지 않으며(無疾), 근심할 일 없고(無恤), 후회 없는(無悔) 삶을 바라면서 이름 지어준 네 아들에 대한 자신의 꿈이 깨어지자 상심해 죽는다. 원경왕후로서는 남편을 위한 킹메이커의 대가로 친정이 몰락하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다. 태종은 셋째 아들 충녕(세종)에게 양위하고 상왕이 되어 후견정치를 이어갔다.

원경왕후의 친정 여흥민씨가 멸문의 화를 입고 있을 때 숙부 민량의 딸로 개국공신 김온과 결혼한 종자매 민씨 부인도 화를 피하지 못했다. 김온은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의 차남 학성(울산의 옛 지명)군, 김덕지의 후손으로 이성계의 요동정벌에서 위화도 회군에 참여, 회군 공신으로 양주목사를 하고 있었다.

66세의 김온이 사촌 처남들과 무인정사를 성공시켜 이방원이 권력을 잡도록 도왔지만 그의 여흥민씨 말살에 희생됐다. 불안한 민씨 부인은 아들 3형제를 데리고 남으로 남으로 피신해 전라도 장성까지 내려오게 됐다. 지금의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맥동마을이다. 장성군에 가면 가마솥을 엎어 놓은 것 같은 형국의 명당터(覆釜穴)에 민씨부인의 무덤이 있고 그 옆에 남편 김온의 단(壇)이 있다.

조선의 문묘에 배향된 18명의 대학자(해동 18현)의 한 사람인 하서 김인후는 김온의 5대손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신동으로 불리었고 퇴계 이황보다 9세 연하인데 성균관에서 교류하고 사화를 피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성리학 연구와 후진을 양성했다. 김인후의 10대손인 김명환은 가난한 선비였지만 자신의 셋째 아들 김요협은 전라북도 부안군 줄포의 대부호인 영일정씨 집안의 무남독녀와 결혼했다. 김제 만경평야가 있는 줄포는 고려시대부터 조운항으로 번영했고 목포와 군산보다 먼저 개항된 곳이다.

군수를 지낸 김요협은 처가인 부안에서 김기중, 김경중 형제를 두었고 후사가 없는 장남은 차남 김경중의 아들형제 중 김성수를 양자로 입양했다. 고향 인촌리에서 호를 딴 인촌 김성수는 일본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중앙학원을 인수, 민족교육의 요람으로 키우는 한편 1920년도에 민족언론 동아일보를 창간했다. 후에 보성전문학원도 인수해 고려대학으로 발전시켰다.

인촌 김성수는 독립 후 대한민국의 제2대 부통령을 역임했고, 그의 동생 수당 김연수는 일본 교토제국대학 졸업 후 경성방직을 경영하고 후에 제당업 등으로 성공한 삼양그룹을 창업했다. 고려대 총장과 국무총리를 지낸 한국 지성의 거목 김상협이 김연수의 둘째 아들이다. 일제강점기 일본 메이지대학에 유학해 판사와 인권변호사를 역임하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초대 대법원장으로 법조인의 사표가 된 가인 김병로도 하서 김인후의 15대손이다.

조선왕조 500년의 왕들이 모두 원경왕후의 피를 받은 후손들이지만, 전라남도 장성에서 시작된 민씨부인 세 아들의 후손들은 조선조 문과급제자 14명을 길러낸 호남의 4대 명문가로 성장해 조선조와 대한민국에 걸출한 인물을 다수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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