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32] 1970년대 한국과 캐나다 토론토
[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32] 1970년대 한국과 캐나다 토론토
  • 송광호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고문
  • 승인 2021.05.13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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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어떻게 바뀌어왔으며, 또 어떻게 변화해 갈 것인가? 1989년 이래 북한을 8차례나 방문해 취재한 송광호 토론토 주재 언론인이 방북 때마다 보고 느낀 점들을 시리즈로 정리했다. ‘바뀌어온 북한’에 초점을 맞춘 이 글은 현재와 같은 남북경색국면에서 긴 눈으로 북한의 새로운 변화를 조망하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편집자주>

토론토 차이나타운
토론토 차이나타운

내 캐나다 이민 생활이 올해로 만 46년째다. 캐나다에 이주한 지 얼마 안 된 교포들은 나 같이 오랜 이민자를 속칭 ‘원주민’이라 부르기도 한다. 1970년대 중반까지 토론토에는 한인교포들이 많지 않았다. 온타리오주(수도 토론토) 거리엔 단 한 개 한국식당도 없던 시절이다. 캐나다는 미국과 달리 한인 이민역사가 짧다. 학창 시절에는 캐나다 수도 오타와 만 알았지, 토론토(Toronto)는 듣지도 못하던 도시였다. 70년대 초 형제들이 먼저 온타리오주에 정착해 있어, 나 역시 가족초청으로 토론토로 오게 됐다.

이민 당시인 75년에는 캐나다에서 몬트리올(불어권)이 가장 큰 도시였다. 2번째가 토론토(영어권)다. 그래선지 몬트리올이 먼저 캐나다에서 하계올림픽을 개최한 도시다. 다음 해인 1976년 몬트리올에서 첫 캐나다올림픽을 열었다. 그때 대한민국 최초의 금메달리스트가 나왔다. 레슬링 자유형 종목 양정모 선수다. 이미 우리가 다 아는 얘기다. 지난 1936년 베를린올림픽 때는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에 우승했지만, 그땐 일제강점기였다. 양정모선수가 첫 올림픽 금메달을 따고 귀국하던 날, 서울시청 앞은 ‘개선 환영식’으로 태극기를 앞세운 시민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들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 토론토와 몬트리올 두 대도시 순위가 바뀌었다. 토론토가 캐나다 최대도시가 됐다. 그러나 올림픽 경우 오늘날에도 토론토는 개최지 도시와는 거리가 멀다. 번번이 타 국가 도시와 경쟁에서 밀렸다. 토론토는 캐나다 최대도시인데 아직 한 번도 국제올림픽을 열지 못했다.

캐나다 70년대는 이민 초창기에 속한다. 그때 이미 10년 이상 사는 교포들이 적지 않았다. 당시는 10년이란 기간이 엄청 길게만 느껴졌다. 어린 시절 조선 땅이 36년 동안 일제식민지였다는 사실처럼, 긴 시간 흐름으로만 상상됐다.

그러던 내가 근 반세기 세월을 캐나다에서 보낸 것이다. 서울 토박이로 고향보다 더 많은 햇수가 타향 땅에서 흘러갔다. 그것도 해외직장 아닌 거의 한국기자 직업으로 평생 이민자 세월을 보냈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어느 틈에 시간이 짧게만 보이는 연륜에 접어들었다.

송광호 한국전력(성동지점)
송광호 한국전력(성동지점)

이번엔 당시 이민생활 글을 소개한다. 사실 남의 얘기 듣는 것처럼 지루하고 재미없는 일이 없다. 다만 근 반세기 전의 우리 한국과 캐나다 일부 환경내용이니 참고 바란다.

1975년까지 나는 서울 한 변두리 서민 아파트에 거주했다. 외조모와 단둘이서 살았다. 당시 20대 후반의 국영기업체(한국전력) 직원이었다. 그때 병역문제로 무척 고민했다. 외조모를 홀로 남겨두고 3년간 군대를 다녀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보충역요원이라, 언제 군에 입대할지 가늠할 수 없었다. 한전은 좋은 직장이었지만, 군대를 다녀올 때까지, 따로 저금해 둔 돈도 없었다. 외조모는 북한이 고향이라 한국에는 일가친척이 단 한 명 없었고, 문맹자였다.

어느 날 우연히 고교동창 박영기를 만났다. 서울대 상대 재학 중 행정고시에 붙어 사무관으로 근무하는 동기였다. 어쩌다 보니 사정을 털어놓게 됐다. “야, 나는 외조모와 둘이 사는데, 언젠가는 노인네 혼자 남겨놓고 군대에 가야 하는데 고민이다. 캐나다에 형제들이 있으니 차라리 외조모와 함께 이민도 생각해 본다. 무슨 좋은 방법이 없겠나?” “그래? 해외이민 관계를 잘 아는 보사부(보건사회부)에 친한 공무원이 있는데 한번 내게 들려라. 소개해 줄 테니 알아보자.”

함께 만나 보니 정말 모르던 이민규정이 있었다. 군대 관련 없이 해외 출국이 가능한 방법이 있었다. 대한민국 법에 저촉되지 않고 외국이민이 가능한 조항이다. 내 경우는 결혼 후 자동적으로 호적에서 분가가 되니, 결혼만 하면 전 가족이민(독립이민)으로 수속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또 당시는 유신정치 체제하라 맘에 들지 않던 때다. 퇴근 후엔 거의 매일 직장동료들과 술 한 잔씩 하던 때다. 하루는 퇴근 후 명동입구엔가 중고교 동창 엄영섭을 만났다. 서울대 문리대 나온 친구다. 그는 급히 어딘지 가는 중이었다. “어. 반갑다. 차 한 잔도 못 하나?” “미안하다. 지금 학원에 급히 가는 중이야. 시간이 없어. 담에 보자”하곤 가버렸다.

그때 심적으로 좀 타격을 입었다. 20대인 동창들은 뭔가 아직도 배우느라 열심히 사는데, 나만 허구한 날 술로 노닥거리는 것 같아서였다. 물론 좋은 직장이라고 있었지만, 만족스러운 삶은 아니었다. 일단 가족초청 이민절차를 시작했다. 외조모와 함께 토론토 이민행 수속을 했다. 중매로 배우자도 소개받았다. 그런데 외조모는 막상 캐나다 준비가 끝나자,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송광호 평양 2005 봄축전

“사람이 죽을 때면 오히려 고향으로 돌아온다는데, 내가 70이 넘어 왜 말도 안 통하는 외국으로 가겠느냐? 안 간다”고 고집했다. “당초 할머니 때문에 계획을 세우고, 겨우 일이 끝났는데, 안 가시면 어떻게 해요?”하고 우겼다. “그야 네가 하도 외국에 나가길 원하는 것 같아 함께 수속은 했다만, 안 가겠다. 캐나다에 있는 네 엄마를 한국으로 들어오라고 해라. 나와 함께 여기서 살면 되지. 너희만 캐나다로 가라”고 막무가내셨다.

결국 외조모 뜻대로 중매결혼 한 달 만에 한국을 떴다. 무척 무모한 결정이었다. 아무 기술도 없었고, 거의 빈손인 채였다. 가진 재산도 없었지만, 당시 해외이민자 외화유출 한도가 법적으로 극히 적었다. 지난 편에 언급했던 얘기다. 직장 퇴직금만 챙겨 갖고, 와이프와 둘이 이민을 떠났다.

당시 한국사회 현상 한 단면을 전한다. 그때 내겐 개인전화(백색전화)가 있었다. 96-2251. 옛 전화번호를 기억한다. 당시 서울가정에 일반전화기는 두 가지 종류였다. 백색전화와 청색전화. 색깔을 말하는 게 아니다. 매매나 소유이전이 가능한 백색전화는 가격이 서민아파트와 맞먹었다. 70년대 중반까지 서민아파트가격이 100만원 정도했는데, 백색전화 값이 120만원이었다. 청색전화는 개인양도나 매매가 안 된다. 요즘 일반가정집 전화와 마찬가지다. 백색전화는 전화가설이 힘든 관할 지역일수록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웃기던 시대였다.

캐나다 갈 때 아파트와 전화는 그대로 두고 떠났다. 일체 외화반출이 허용 안 되기도 했지만, 어머니가 일단 캐나다에서 돌아오고, 외조모가 아파트에 그대로 계셨기 때문이다.

회사 관련해 다른 얘기다. 국영기업은 개인기업과 많이 다르다. 한전(직장)에 다닐 때다. 가끔 인사발령이 나면 다른 지점으로 옮기곤 했다. 동부지점에서 성동지점, 북부지점 등. 그런데 한번은 갑자기 지방으로 발령이 났다. 서울근무에서 지방발령은 무슨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한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총무과의 한 지인이 귀띔을 해줘 미리 알게 됐다.

박정희와 맥아더 장군

그간 소위 이권부서라는 업무(창구)부서에 오래 근무해, 타 부서 간부 눈에 거슬렸는지 모른다. 문제는 외조모를 서울에 남겨두고, 나 홀로 지방근무가 어렵기도 했지만, 도대체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었다.

즉시 고위층인 작은삼촌에게 뛰어갔다. “회사에서 갑자기 지방으로 본사 발령이 났다고 연락받았어요. 제 처지가 시골로 갈 수 있는 형편이 아니잖아요.” “너, 회사에서 무슨 잘못한 것 있었냐?” “아니요. 전혀. 지방발령 이유도 좀 알았으면 해요. 얼마 전 한전연수원 영업실무교육 시험에서는 전부 A등급을 받았는데요.”

삼촌은 그 자리에서 한전 본사로 전화를 했다. “아. 인사부장이오? 내 조카가 서울동부지점에 있는데, 이름이 송광호라고 하오. 어제인지 갑자기 지방으로 발령이 났다는데, 무슨 일인지 알아 봐줘요. 그간 회사에서는 아무 실수도 없었다던데, 무슨 명분인지.” 최병찬 인사부장은 내 지방발령을 즉시 취소하겠다며, 어디를 원하는지 묻는 것 같았다. 삼촌은 “지방만 아니면 되오. 서울지역이야 어디든 괜찮겠지”하고 전했다.

쉽게 지방발령취소가 됐다. 대신 변두리 지점인 영등포로 재발령 통보가 나왔다. 사실 외조모만 아니었다면 구태여 삼촌에게 부탁하지 않았을 것이다. 서울에서만 살아서, 평소 1~2년쯤은 지방근무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이유도 모르고 지방발령은 전혀 예상 못 했다.

일생에 첫 직장이었던 한국전력은 많은 첫 사회경험을 안겨줬다. 개인회사가 아닌 반관반민(국영기업체) 구조라, 회사개성이 강한 측면이 있었다. 말단직원도 정의롭지 못한 상사에게 대항하고, 다투는 경우를 여러 차례 목격했다. 그래도 사내에서 불이익을 당하지 않았다. 아마 개인회사라면 상상도 못 하리라. 더구나 한전은 어느 지점이든 강력한 노동조합이 결성돼 있었고, 거친 노조 간부들도 많았었다고 기억된다.

박정희 귀국 가도 환영

나는 평소 노조에 대해 탐탁하지 않게 생각했다. 노조는 필요한 부분이긴 하나 그 폐단이 많아 보였다. 일부에선 노조를 ‘필요악’이라고 부르는 시각이다. 어느 업체든 일반사원은 몸담은 부서에서 성실히 일하지, 누가 노조 쪽을 기웃거리나. 내 한전 대 경험으로는 무능하거나 불량한 사원들이 많았다.

한 가지 캐나다 경우를 보자. 특히 캐나다 은행은 노조가 일절 없다. 캐나다 모든 공공 기업체와 조직체들이 노동조합이 거의 형성돼 있는데 반해, 캐나다 은행들만 노동조합이 없다. 한국 경우는 아마 ‘금융노조’라고 부를 것이다. 오래 거주한 한인교포들조차 캐나다 은행들이 노조가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

이는 내 아내가 오랜 세월 캐나다은행에서 일해 내용을 잘 안다. 1976년부터 만39년간 캐나다 로열뱅크(Royal Bank) 본점에서 외환관리 담당으로 근무했다. 그 긴 근무처에는 한국사람 한 명도 없었으니, 영어가 자유롭다. 그 긴 세월을 다운타운 중심 은행본점 빌딩에서 보낸 것이 신기할 정도다. 은행노조가 없어서인지, 캐나다은행 주식값은 늘 안정돼 있고, 상승세다. 퇴직했어도 은퇴연금이나 보험혜택이 직장 다닐 때와 별 차이가 없다. 이 부분은 나중 기회 되면 더 부연하기로 하자.

내 형제들은 캐나다 온타리오주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어머니 역시 토론토에서 형제 자녀들 손자, 손녀들을 돌봐주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서울에서 전문학교(대학)를 나온 어머니는 북한에서 교사 생활을 했다. 외조모는 일자무식이지만, 외동딸인 어머니는 인텔리에 속했다. 내 서울사대 부속 초등교시절 한때는 학부모 사친회 회장을 맡아 치맛바람의 중심에도 있었다. 부친은 10여 년간 지병으로 서울대 병원 특실에 장기간 입원해 계시다 결국 돌아가셨다. 그 때문에 어머니는 아예 서울대학 병원 병실에서 부친 간병생활로 세월을 지냈다.

결국 부친이 끝내 회복 안 되고 세상을 떠나면서, 남은 재산이란 거의 없다시피 했다. 더구나 남에게 돈까지 빌려줬다가 날려 빈손뿐이었다. 그 때문에 어머니는 우리 형제들에게 늘 미안해했다. “너희에게 건네줄 재산이 하나도 없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너희들이 결혼 하면 애들이나 열심히 잘 봐주는 일밖에 없겠다”고 하셨다. 주변 가까운 친척(사촌)들은 모두 국회의원, 대학교 총장, 고위 공무원이나 공기업 임원 등으로 중상류 생활을 하는데, 우리만 몰락한 집안 환경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임수경 전대협 행진(평양축전)<br>
임수경 전대협 행진(평양축전)

1970년대는 막강한 박정희 유신정권 체제일 때다. 지금 박정희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경제대국 기초를 수호신으로 받들지만, 당시 한국사회는 그렇지 않았다. 국가 긴급조치선포 등 흉흉한 시대 상황 속에서, 박정희는 독재자라는 인식이 높았다. 일부 권력자들은 막대한 불법자금의 해외유출로 평이 안 좋았다. 서민들만이 정식 해외이민조차 거의 빈 몸(1백 달러 허용)으로 외국에 내보냈다. 당시 토론토 한 달 아파트 비용이 2백 달러 남짓 할 때다. 이러니 누구든 해외이민자 경우 전전긍긍하며 적은 액수라도 숨겨 갖고 나가기 바빴다. 정부가 오히려 이민자에게 법을 어기는 만드는 범죄를 조성하는 격이었다.

당시는 외화뿐이 아니다. 해외이민 경우 경찰서 ‘신원조회’ 통과가 필수조건이었다. 아무런 전과나 범죄사항이 없어도, 특히 보안법 관련해 까다로운 경찰조사로 사람을 피곤케 했다. 그 시절은 아마 남이나 북이나 정부시스템이 마찬가지가 아닐까 판단된다. 또 1974년 육영수 여사가 불의의 총탄에 유명을 달리하자, 김현옥 서울시장 등이 박통을 위해 채홍사 역할을 맡았다는 소문도 심심찮게 서울 장안에 나돌던 시절이다. 어쨌든 그러한 사회 환경 아래 직장을 다녔던 나는 박정희 대통령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내 친 삼촌(4째) 중 한 명은 육사 2기로 5.16 이전 이미 별을 달고 있었다. 6.25전쟁 시기엔 헌병사령관이었다. 박정희와 같은 육사 2기 동기생이지만, 군사쿠데타에 가담 안 해 5.16 후 곧 예편당했다. 하루는 삼촌 댁에 들렀더니 무척 기분이 상해 계셨다. 그때 집안 어른들 대화를 우연히 들으니, 얼마 전까지 영관급(중령)이던 군대 후배에게 수모를 당했기 때문이다. 육사 8기생 이낙선 중령이 상공부장관이 됐는데, 삼촌 등 옛 상관인 장성들에게 반말로 함부로 대해 울분이 쌓여 있었다. 세상이 변했다지만, 군 세계에서 영관급과 장성급 차이는 상당히 다르지 않은가. 좀 세련되고, 요령 있게 상대를 대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박통시절 삼촌이 유정회 국회의원이던 때, 나는 한국을 떠났다. 그때 고모부 역시 다선 국회의원이라, 집안에 가까운 친척 두 명이 정치인으로 활동하던 때였다. 토론토에 닿자, 한인교포사회에선 북한 관련 얘기들이 자주 들렸다. ‘누구누구는 빨갱이라 조심해야 된다’는 등 소문이 파다했다, 친북신문 계 ‘뉴 코리아타임스’ 주간지도 일찍 발행되고 있었다.

그런 교포사회 환경 아래 나는 온타리오 주정부에서 제공한 기술대학(테크니컬 칼리지)를 다녔다. 매주 최소생활비 혜택까지 받았다. 그때 약 2년간 대학에서 어카운팅을 공부했다. 그러나 회계공부를 중도 포기하고, 지난 1981년 첫 교포일간지가 출범하면서 창간 멤버가 됐다. 기자 경험이 없으니 언론 관련 서적 등을 통해 나름대로 독학공부를 했다. 기자로서 주요기록이나 자료를 소홀히 안 하고 모아두는 습관이 그때부터 생겼다.

아무튼 캐나다에서 한국기자 일을 근 40년간 붙들고 있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또 영어보다 거의 한국말을 구사하는 이민인생을 살다 보니, 영어 실력은 오히려 퇴보하고 한국말(단어)도 시원치 않다. 또 한국사회는 늘 새로운 용어들이 쏟아져 나오지 않는가. 지금도 따라잡기 힘들다.

필자소개
강원도민일보 북미특파원,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전 대표
대한민국 인권상 수상, 관훈클럽 국제보도상 수상, 한국신문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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