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호의 역사이야기] 망국으로 몰고 간 시부와 며느리 정쟁(政争)-2
[이동호의 역사이야기] 망국으로 몰고 간 시부와 며느리 정쟁(政争)-2
  • 이동호 월드코리안신문 명예기자
  • 승인 2021.05.24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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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 홍릉(洪陵) 이조왕릉 탐방
고종황제와 명성황후 합장릉 전경

시부는 흥선대원군 고종의 아버지이며 며느리는 명성황후 민비를 칭한다. 두 사람의 정쟁에는 고종을 빼놓을 수 없다. 고종은 명성황후와 일심동체이다. 그러니 정쟁은 아버지와 아들의 정쟁일 수도 있다. 즉 '권력은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만고의 진리가 구한말 역사 속에서 실증된다. 문제는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 모두가 시대의 걸출한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시대의 영걸들이 합쳐서 융합하지 못하고 반목했다는 것이다.

서로를 성장시키며 건강한 경쟁이 아니라 오로지 상대를 쓰러뜨리기 위해 전력을 다하여 역사를 만들어갔으니 나라의 운명은 불을 보듯 뻔했다.

19세기 후반 구한말 서서히 침몰해 가는 조선에 두 사람의 걸물이 나타난다. 두 사람 모두 찬사와 비난을 한 몸에 받는 등 평가는 극단적으로 양분된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강력한 카리스마로 정치력을 발휘하여 정국을 휘어잡고 열강들의 인정을 받았던 인물 흥선대원군(兴宣大院君·1820~1898)과 명성황후(明成皇后·1851~1895)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흥선대원군의 등장

흥선대원군은 둘째 아들 명복이 익종(효명세자)의 양자가 되어 왕으로 즉위하면서 권력의 핵심으로 등장했다. 원래 대원군의 칭호는 종친 중에서 왕위를 계승했을 때 왕의 생부에게 내려주는 작위인데 조선에서 나온 4명의 대원군 중에서 생전에 이 지위에 오른 사람은 흥선대원군이 유일하다. 그런데 이 대원군 직위는 예우 차원일 뿐 제도적 권력이 보장되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에게는 아들인 고종이 나이 어려 등극하는 바람에 익종비 순원왕후(고종의 양어머니, 흔히 조대비라 부른다)가 수렴청정 권한을 흥선대원군에게 양도했기 때문에 흥선대원군이 섭정이 되어 합법적 권력으로 국정을 관장할 수 있게 됐다.

흥선대원군은 집권 10년 동안 조선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우선 60년에 걸친 안동 김씨 세도정치를 종식했다. 당파를 초월한 인재를 고루 등용시켜 국정을 쇄신하고 부정부패를 엄단했다. 47개소 서원만 남겨두고 전국의 서원을 철폐하여 서원들의 민폐를 근절시켰다. 군포를 개혁하고 경제제도, 조세제도를 바로 잡았다. 대전회통(大典會通)을 편찬하여 법제도를 정비했다. 사치를 단속하고 의복을 간소화하여 사회분위기를 일신했다.

쇠락해가는 국운을 중흥시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았다. 그렇지만 무리하게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백성들에게 많은 고통을 안기고 쇄국정치를 강화함으로써 국가의 근대화를 스스로 막아버리는 실정을 저질렀다.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의 고수는 성공적인 내치의 치적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이씨조선의 역사에 치명적 오점을 남긴다. 이와 더불어 문제는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시작한 지 10년이 지나도록 공식적인 수렴청정 기간이 끝났는데도 섭정에서 물러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여기서부터 불행은 시작된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사진=국사편찬위원회 제공]

명성황후의 정치 일선 등장

명성황후를 왕비로 선택한 사람은 흥선대원군이다. 이씨 왕가에서는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등 외척 가문의 발호에 진저리를 내던 시대에 흥선대원군 역시 명성황후를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성장했고, 친정 식구들이 변변치 못해 외척 발호의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기대와는 달리 만만찮은 인물이었다. 시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고종이 성년이 된 뒤에도 권좌에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자 1873년 11월 고종을 앞장세워 친정을 선포케 하고 흥선대원군을 강제로 실각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정치 일선에 등장하게 된다. 명성황후가 대단한 인물임은 훗날 고종이 직접 쓴 '명성황후 행록'에서 보면 짐작할 수 있다.

내가 근심하고 경계하는 것이 있으면 대책을 세워 풀어 주었다. 특히 외국과 교섭하는 문제에서 먼 나라를 끌어들여 가까운 나라를 견제하길 권하니 다른 나라에서는 모두 감복했다. 황후가 일찍이 나에게 말한 것들이 지나고 보면 모두 그대로 이루어졌으니 황후의 통달한 지식과 멀리 내다보는 안목, 앞날에 대한 헤아림은 고금에 견줄 사람이 없을 정도로 탁월하다. 훌륭한 공덕으로 나를 잘 도와주었기 때문에 내가 정사를 돌볼 수가 있었다."

이렇듯 명성황후는 고종의 정치적 동반자이자 상담자였으며 외교 정책에도 깊이 관여했음이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외척 민씨 일가들의 전횡이 촉발되고, 무속에 빠져 국고를 탕진하는 등 실정에 의한 부정적 측면도 나타나 비난도 감수해야 했으나 명민한 판단력과 총명한 지혜로 조선의 생존을 도모했다는 평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일본이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명성황후를 시해한 것도 명성황후가 일본의 조선 침탈을 저지하는 버팀목 역할을 확실히 했기 때문에 제거하기로 한 데서도 알 수 있다.

조선 제26대 국왕 고종, 대한제국 초대 황제 고종태황제, 덕수궁에서 촬영됐다.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반전에 반전

​아들 고종의 친정으로 강제로 물러나게 된 흥선대원군은 분노했다. 며느리의 농간으로 아들이 자신을 배반했다고 여긴 대원군은 원망의 화살을 명성황후에게 돌렸다. 명성황후 역시 대원군의 재기를 막고자 대원군 세력을 강하게 탄압했다. 이와 같은 갈등은 1882년 임오군란으로 재집권한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가 승하했다고 선포하나(장호원으로 피신한 명성황후의 복귀를 막기 위해서다), 피신했던 명성황후가 청나라와 교섭하여 대원군을 납치, 청에 유폐시킴으로써 1개월 만에 재집권 시도는 실패한다. 이로 인해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관계는 더욱 악화됐다.

이후에도 두 사람은 반목을 일삼았는데 명성황후가 청에서 돌아온 대원군을 계속 압박하자, 대원군의 울분은 극도에 달했던 것 같다. 이후 흥선대원군은 운현궁에 칩거하면서 청말(请末) 북양군벌의 지도자 위안스카이(원세개)와 공모하여 쿠데타를 도모했고, 동학농민군과 연계를 시도했으며, 1894년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과도 손을 잡았다. 이듬해에는 장손 이준용을 왕으로 옹립하려다 실패하기도 한다. 명성황후를 끌어내리고 다시 정권을 잡을 수만 있다면 누구와도 한 편이 될 수 있고, 무슨 짓인들 할 수 있다는 태도였다.

이에 대해 명성황후는 고종을 통해 대원군의 집 앞에 순검을 배치하고 “높고 낮은 신하와 백성들이 칙명 외에는 감히 대원군을 만나지 못하도록” 조치했다. 왕의 생부이니 처벌하지는 못하지만 대놓고 가택 연금을 한 것이다. 이러한 대립은 흥선대원군이 을미사변에 얽혀 들어가는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 시해에 협조했다는 주장, 묵인했다는 주장, 일본에 이용당했다는 주장이 있다) 비극이 벌어진 뒤에야 끝나게 된다.

홍릉에서 영원(영친왕 부부 묘)과 회인원(영친왕 차남 황세손 이구의 묘), 의친왕 부부묘(고종 차남), 덕혜옹주묘, 귀인장씨묘(고종 후궁 귀인 장씨·의친왕 모) 등 후궁 묘로 넘어가는 길. 이씨 조선 마지막 이왕가(李王家) 묘역이 집단으로 자리잡고 있다.

흥선대원군(1821~1898) 이하응은 43세(1864년 1월21일)에 섭정을 시작하여 1873년10월31일에 실각당한다. 권부 10년이었다. 반면에 명성황후(1851~1895)는 1866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왕비에 책봉되고 흥선대원군이 실각한 후 22세(1873년 11월) 때 정치 일선에 등장하여 시아버지 흥선대원군과 22년간 승자의 편에 서서 치열한 권력 투쟁을 벌이다 1895년 10월28일 일본인 자객에 의해 사망한다. 이를 을미사변이라 부른다. 반면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 시해 이후 잠시 정치 일선에 재등장하나 일본에 의해 토사구팽당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1896년 고종의 아관파천 이후는 유폐생활이나 다름없는 생활로 양주로 가 은거에 들어간다. 그러다가 1898년 1월 부인 여흥부대부인의 죽음을 본 후 2월 운현궁 별장 아소당 정침에서 쓸쓸히 사망한다.

고종은 을미사변 배후의 한 사람으로 아버지 흥선대원군이라고 봤기 때문이었을까 아버지의 장례식에 불참한다. 숨 가쁘게 돌아갔던 구한말 조선의 역사는 두 걸물의 연이은 죽음으로 망국의 길을 재촉하게 된다. 1875년 명성황후 시해로 나타나는 권력의 공백을 타개코자 고종은 1876년 아관파천을 단행하고 러시아를 내세워 일본을 견제하려 시도했으나 오히려 일본의 압박에 시달리다 못해 1년 만에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환궁하여 국호를 대한제국이라 선포하고 스스로 황제에 오른다.

그러나 두 걸물이 물러난 정국을 고종 혼자서 감당해 나가며 일본을 위시한 주위 열강 국가들의 견제와 압박을 헤쳐나가기엔 역부족이었을까 서서히 조선은 침몰해 가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서도 고종은 혼신의 힘을 다하여 국권 회복을 위해 노심초사한다. 그에 일환으로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대한제국의 국권 회복을 담은 밀서를 이준 열사를 통해 국제 열강들에 전달하려 했으나 일본에 의해 좌절되는 비운을 겪는다. 이 사건을 빌미로 일본은 고종이 아들 순종에게 황위를 양위토록 강요하여 스스로 퇴위를 하고 덕수궁에서 유배 아닌 유폐생활을 하다 1919년 1월 21일 승하한다.

필자소개
월드코리안신문 명예기자
중국 쑤저우인산국제무역공사동사장
WORLD OKTA 쑤저우지회 고문
세계한인무역협회 14통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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