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은 오늘날의 국립대학이라 할 수 있는데, 조선시대에 인재양성을 위해 서울에 설치한 교육기관이다. ‘성균(成均)’은 ‘인재로서 아직 성취하지 못한 것을 이루고, 풍속으로서 아직 가지런하지 못한 것을 고르게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성균관은 조선시대의 국가지도 이념이었던 유학을 가르치고 공부해 인재를 길러내는 그 중심적 역할을 했다. 공자의 사당이 성균관에 있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성균관에는 아무나 입학할 수 없었다. 조선시대 과거제도의 한 축이었던 생원시, 진사시라는 시험에 합격해야 성균관에 입학할 기회와 자격이 주어졌다. 성균관의 정원은 세종 때 200명으로 정착됐다. 성균관 학생인 유생들은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에서 생활하면서 일정한 출석 점수를 얻으면 다음 단계의 과거시험인 대과(大科)에 응시할 수 있었다.
국가에서는 성균관 유생들에게 밭과 노비 등을 제공했고, 교육 경비로 쓸 수 있는 곡식도 지급했는데, 이는 경제적 걱정 없이 기숙사에서 오직 학업에만 정진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전원에게 장학금을 지급한 것이다. 성균관 유생들은 묵묵히 공부만 했던 것이 아니라, 나라의 정치가 어지러워지면 집단으로 임금에 글을 올려 충언했고(儒疏), 그들의 정당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수업을 거부하고(捲堂), 아예 성균관을 나가버리기도 했다(空館). 조선시대에 공관과 권당이 모두 아흔 여섯 차례나 벌어졌는데, 초기에는 국왕의 불교 숭상에 대한 것이 제일 큰 이슈였다.
퇴계 이황, 율곡 이이, 다산 정약용처럼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대학자들이 모두 성균관 출신이었고, 근대의 민족주의 역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단재 신채호도 조선조 말 성균관에 입학해 공부했다. 때로는 왕이 성균관을 방문해 나라의 앞길을 물어보기도 할 만큼 인재의 텃밭이었다. 1515년 조선조 11대 왕인 중종이 찾아와 이들에게 정치적 조언을 구했을 때, 당시 성균관 유생 조광조는 이렇게 말했다.
“법도와 기강의 큰 줄기를 세우십시오. 군주 혼자 정치를 할 수 없으니 반드시 신하를 믿고 일을 맡기십시오.”
조선 후기에는 나라의 교육 재정이 줄어들고 과거제도가 공정하게 운영되지 않으면서 성균관의 기능이 약화되었다. 반면 지방 곳곳에 생겨난 서원에서의 교육의 질이 높아지기 시작하면서 인재를 키우는 명문 교육기관으로 떠올랐다. 말하자면 성균관이라는 국립대와 서원이라는 명문 사립대가 경쟁하는 양상이었다.
1945년 광복과 함께 성균관대학 기성회가 조직되어 과거 성균관의 전통을 계승할 대학의 수립에 나섰고, 그것이 1946년 9월 사립 성균관대학으로 명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물론 오늘의 성균관대학교는 예전의 성균관과는 그 태생과 성격이 다르다. 그러나 그 경내에는 공자를 모시는 사당인 문묘(보물 141호)가 아직도 여전히 건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