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봉철 회고록⑪] 사우디에서 뜻밖에 듣게 된 태권도 코치 제안
[현봉철 회고록⑪] 사우디에서 뜻밖에 듣게 된 태권도 코치 제안
  • 현봉철 민주평통 쿠웨이트지회장
  • 승인 2021.07.26 10:5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광복 직후 제주도에서 출생, 4·3사태 때 부친 실종, 홀어머니 밑에서 태권도에 전념해 전국체전 우승, 월남전 참전, 중동 건설 붐 때 사우디 건설 현장에서 활동, 쿠웨이트 한인회장과 민주평통 지회장으로 봉사··· 현봉철 회장의 생애는 이처럼 우리나라 현대사의 굴곡과 맥을 함께 하고 있다. 한국경제 발전사와도 궤도를 같이하고 있다. 현봉철 회장의 삶을 시리즈로 소개한다.[편집자주]

민주평통 쿠웨이트지회가 주최하고 주쿠웨이트한국대사관이 주관한 평화 통일 기원 사막 트레킹

그 외에도 말단기사가 일을 펼치는 게 어렵게끔 하는 요소들이 많았다. 의견충돌이 있으면 무조건 직위로 밀어붙이는 형국이었다. 그러면 말단기사 입장에서는 할 말이 없을 수밖에 없다. 이런 적도 있었다. 토목공구 회식 때였다. 상사인 박낙원 과장님과 공구 직원들이 공구 단합대회를 위한 술좌석을 갖던 중에 나는 술에 의지해 말을 쏘아붙인 적이 있었다. 평소 쌓인 불만을 술에 의지해 전부 털어놓은 것이다. 따지고 보면 행패라고 해야 할 행동이었다. 그래야 앞으로 마음의 풀릴 거란 생각이 들 정도로 힘들었던 때였다. 돌이켜보면 일을 잘하자는 목적이었지만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내가 예의 없는 행동을 많이 한 편인 점은 인정한다.

현장이 차근차근 정리되어가고 주변에서 사우디 열대에서도 이렇게 묘목 번식장(Propagation House)에서 많은 수종을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이 기적 같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H그룹에서 VIP가 출장 오면 소장이 제일 먼저 내가 있는 사무실과 현장을 보여주고 나머지 현장을 보여 드렸다. 김성주 H중공업 회장님도 현장 방문 시 나의 사무실에서 일제시대 겪은 일 등 여러 말씀을 내게 들려주셨다.

또 다른 회사에서도 견학을 왔다. 사우디 정부에서도 우리한테 많은 관심을 보였다. 우리 현장의 감독관은 핀란드 회사 사람이었다. 그는 불필요한 요청을 많이 했고, 무엇을 흠잡을 것이 없는가를 끊임없이 살폈다. 그는 때로는 박사라는 둥 전문가라는 둥 하면서 현장을 확인하고 점검했지만, 우리가 하는 일들이 어마어마한 규모로 진행되고 있어서 감히 코멘트 하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 모든 것은 주변에서 얻은 지혜와 미국에 2년 있으면서 배우고 느낀 점들을 적절히 적용한 덕분이었다.

그 당시 중동에서는 조경 붐이 일고 있었다. 중동에서 조경이라 하면 초원(Greenery)을 만드는 것이었다. 즉 사막을 푸르게 만드는 작업이었다. 기름 수출로 중동에 갑자기 돈이 넘쳐나니 사막을 푸르게 만드는 사업들이 많이 이뤄졌다. 물은 담수화해서 얻고 인력은 빈국에서 수입하여 쓰는 식으로 해서 조경 사업을 펼치고 있었다.

사진 오른쪽이 현봉철 회장

나는 상대적으로 이른 시기에 조경을 시도한 셈이었다. 먼저 기후와 물과 흙과 수종의 특성 간 조합을 여러모로 실험하고 체험하며 성과를 올리고 있었기에 나중에는 현장 경험 면에서는 권위 있는 위치에 설 수 있었다.

그래서 한국 각사로부터 조경에 대해 많은 지원 요청을 받았다. 한국에서는 산업은행 직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중동지역 조경에 대해 강의하기도 했다. 이런 경험은 큰 역할을 했다. 당시 현장 공사에서 클레임이 들어와도 조경에 대해 아는 바가 너무 없어서 대응을 못 하던 실정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건설사들은 당시 중동에서 공사 수주를 많이 했지만, 조경을 등한시하는 바람에 나중에 곤욕을 치르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나라에서 아주 잘 나가던 한 건설회사는 조경을 너무 가볍게 여긴 나머지 클레임이 걸려 회사가 정부 관리로 넘어가는 바람에 문을 닫기도 했다.

실은 나는 조경 분야에서 전문가라고 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무에서 시작해서 환경에 적응하면서 열심히 하다 보니 부족한 기본기에 비해서 크게 성과를 올려 외적으로 돋보일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현장 파악을 위해 우선 자료 수집에 힘을 기울였다. 먼저 장비를 사진으로 찍어서 그 스펙을 보면서 정리하고 머릿속에 넣었다. 수종은 사진 앨범을 만들어 학명, 현지 명칭 등 항목별로 종명을 정리해 머릿속에 넣었다. 또 자재도 유럽 미국 등 수입국 별로 정리했다.

또 특별한 수완이 있었다면, 지역에서 업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정보를 교환하는 방법이었다. 그 결과 수주금액의 67% 정도 되는 선에서 실행 예산을 받아서 거기서 50% 범위에서 실행하려고 노력했다.

재마부대 병원 방문<br>
재마부대 병원 방문

여하튼 사방팔방으로 혼신을 다해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도 대우 면에서는 실망스러운 일이 생겼다. 상관은 나를 위해 특진 요청을 했다는데 진급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학벌이나 여러 면에서 특진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했던 듯했다. 2년째에도 진급 운운했지만 역시 지지부진했다.

어느 날 돌연 나는 귀국 신청을 했다. 여러 차례 만류를 받았지만 한 번 마음 먹은 일이라 되돌리고 싶지 않았다. 사실 각 공구장부터 기술부장, 소장까지 내가 요구하는 것은 다 들어준 편이었다. 그래서 고맙게 생각하며 몸 바쳐 일했던 것이다. 나는 기사임에도 불구하고 현장 밖으로 나갈 때는 공구장들이 쓰는 짚벤을 사용할 수 있었다. 현장 내에서는 위계질서 때문에 픽업을 사용했다. 그 외도 내가 관리하는 차량이 따로 있었다. 차가 없는 과장급도 있던 상황에서 말이다. 말하자면 특별대우를 받으면서 열심히 일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2년간 600% 보너스도 받았고, 휴가 때면 여러 배려도 받을 수 있었다.

귀국 신청을 하고 돌아갈 날을 기다리던 어느 날, 태권도 운동을 한 후배를 지사에서 만났다. 서로 연락을 주고받고 지내던 중 그 후배가 먼저 귀국하게 되었다. 귀국을 앞두고 하는 그가 하는 말이, 자신은 여가를 이용해 프랑스 대사관에서 태권도를 가르쳤는데 내가 맡아서 가르치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현장도 아니고 시내에 나가 가르쳐야 하는데 그만큼 시간도 들 것이고, 과연 공구장과 소장이 허락할지가 의문이었다. 몇 번에 걸쳐 대화하고 프랑스 대사관 관계자들을 만나서 협의했다. 내가 현장에 묶여 있는 사정을 설명하자 그쪽에서는 할 수 있는 거라면 어떤 협력이라도 해주겠다고 했다.

최종적으로는 프랑스대사관에서 한국 태권도를 Mr. Hyun을 통하여 배우고 싶다, 주 3회 오후 7시 이후에 태권도 교습을 했으면 한다는 공문을 현장으로 보내는 것으로 합의를 했다.

공문은 내가 초안을 만들고 업무부에서 최종적으로 작성해 프랑스 대사관으로 보내, 대사관이 다시 현장으로 보내도록 했다. 하지만 공문을 보내기도 전에 현장에는 그 소식이 음으로 양으로 퍼졌고, 소장은 소문을 들었을 텐데도 별말이 없었다.

쿠웨이트한인회 주최 체육대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송파구 올림픽로35가길 11(한신잠실코아오피스텔) 1214호
  • 대표전화 : 070-7803-5353 / 02-6160-5353
  • 팩스 : 070-4009-2903
  • 명칭 : 월드코리안신문(주)
  • 제호 : 월드코리안뉴스
  • 등록번호 : 서울특별시 다 10036
  • 등록일 : 2010-06-30
  • 발행일 : 2010-06-30
  • 발행·편집인 : 이종환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석호
  • 파인데일리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월드코리안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k@worldkorean.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