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주열의 동북아談說-66] 복어, 미나리 그리고 슌판로(春帆楼)
[유주열의 동북아談說-66] 복어, 미나리 그리고 슌판로(春帆楼)
  • 유주열(외교칼럼니스트)
  • 승인 2021.08.03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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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 여름도 더웠다. 일년 중 가장 더운 시기인 삼복의 복달임은 보양식을 먹고 더위를 이겨내는 것이다. 오래전 삼복더위의 특별한 보양식을 소개해주겠다는 지인을 따라간 곳은 뜻밖의 복어요리 집이었다. 삼복의 복(伏)이 복어의 복(鰒)이었던가 싶다.

복은 겨울철이 제철인데 한여름에 복이라니. 그러나 요즈음은 냉동·양식 등으로 일 년 내내 복요리를 즐긴다고 한다. 펄펄 끓는 복 맑은 탕에 하얀 복어 살보다 미나리를 먹는 기분이 더 좋았다. 주인아줌마는 복국의 간도 맞고 국물이 충분히 우러났다면서 마지막으로 미나리를 듬뿍 넣어주었다. 복어와 미나리의 맛을 알고 그동안 기피했던 복어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미국에 이민 가서 열심히 살아가는 ‘미나리’ 같은 재미교포의 삶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 대박이 났다. 아무 데서나 잘 자라는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우리의 미나리가 국제화된 기분이다. 허준의 동의보감에 위험한 독이 있는 복어에는 반드시 미나리가 있어야 해독작용을 한다고 했다.

서울에서 가까운 임진강이 바다와 만나는 기수(汽水) 지역에 황복이 유명했다. 황복을 탈없이 맛있게 먹기 위해 미나리의 공급이 필요해서인지 서울에는 동 이름에 미나리밭(서대문구 미근동)이 있을 정도로 미나리가 많았다고 한다.

중국의 자료에도 복어를 먹은 기록이 오래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생선이 복어인데 복어는 독이 있어 요리를 잘못하면 생명을 잃을 수 있다는 긴장감이 오히려 미각을 자극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중국 송나라의 소동파는 복어의 맛(味道)은 죽음과 바꿀 만한 가치가 있다(值那一死)고도 했다.

복어를 먹는 한중일 3국 중 일본이 늦게 시작했지만 복요리 기술이 가장 앞섰다고 한다. 특히 종이처럼 얇게 써는 복회(사시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동양 최초로 정부 공인 복요리집이 시모노세키에 있다고 하여 몇 년 전 다녀온 적이 있다.

일본에서 복을 하돈(河豚)이라고 쓰고 읽기는 ‘후구’라고 했다. 하돈은 중국 문헌에서도 보이므로 중국에서 전해진 것 같다. 정약전의 ‘자산어보’에도 복어를 돈어(豚魚)로 표시하고 있다. 복어가 물속에서 ‘꿀꿀’ 하는 소리를 내어 ‘강의 돼지’ 또는 ‘돼지 생선’의 의미로 표기한 것 같다.

‘후구’는 복(鰒)의 일본식 발음으로 보이나 복어의 맹독성으로 잘못 먹으면 ‘후구’의 발음이 나는 불우(不遇) 또는 불구(不具)가 된다고 주의를 준다. 그러나 독만 잘 제거하면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 복어의 맛을 즐길 수 있다면서 일본 규슈지방에는 후구를 오히려 복(福)으로 표기 ‘후쿠’라고 부른다.

시모노세키에 복어요리점으로 정부허가 1호점이 나온 것은 이곳이 고향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입김이 컸다고 한다. 가난한 서민 출신의 이토는 어릴 때 복어를 먹은 적이 있어 그 맛에 빠져있었다. 그는 전문 요리사를 양성해 독을 제대로 제거하면 좋은 생선요리가 된다고 믿었다.

시모노세키에서 관문해협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아카마(赤間) 신사가 있다. 아카마신사는 붉은색의 용궁 모양으로 12세기 무사집단 간의 전쟁에 휘말려 이곳 앞바다에서 익사한 다섯 살의 어린 천황 안토쿠(安德)를 모신 신사이다. 아카마신사 옆에 사찰이 있었는데 메이지유신 후 불교가 탄압을 받아 사찰이 헐리고 어느 안과의사가 절터를 사들여 아담한 건물을 짓고 안과 병원을 개업했다.

개업한 지 오래지 않아 안과의사가 죽자 이토가 미망인을 설득해 위치가 아까운 병원을 개조, 복어요리점을 개장토록 권하면서 정부 허가를 내주고 슌판로(春帆楼)라는 상호도 지어주었다. 이토는 슌판로에서 안전하게 복어 맛을 즐길 수 있었고 1885년 초대내각 총리대신이 되자 도쿄에도 복어요리점 허가를 내주어 의심 많은 관료들도 복어 맛을 볼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1894년 조선에서 동학란이 일어났다. 조선정부는 청국에 군사파견을 요청하자 일본은 10년 전 청국과 맺은 톈진조약에 근거 군사를 파견했다. 동학란 진압을 두고 청일양국의 갈등이 전쟁으로 연결됐다. 청국의 리홍장(李鴻章)이 이끄는 북양군대는 보기와 달리 부패해 나약했다. 청국은 육전과 해전에서 연전연패해 당시 아시아 최고라는 북양함대의 최신 함정이 침몰되고 뤼순 및 류궁다오(劉公島) 기지가 점령됐다. 일본군은 산하이관(山海關)까지 진출, 베이징 점령도 시간문제로 보였다.

전세가 불리해진 청국은 일본과 강화교섭에 나섰다. 교섭장소로 나가사키를 원했으나 일본은 대본영이 있는 히로시마를 고집했다.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는 청국의 협상대표로 톈진조약에서 카운터파트였던 리홍장을 초청하고 장소는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의 중간지점이며 자신의 고향인 시모노세키(당시는 馬關)으로 정했다.

시모노세키에는 국제회의를 할 만한 마땅한 장소가 없었다. 이토는 자신의 단골 복어요리 집인 슌판로를 생각해 냈다. 복어요리는 잘 먹으면 복이 되지만 잘 못 먹으면 독이 될 수도 있는 이중성이 있어 청국과 협상을 조심스럽게 끌고 가기에는 적당해 보였다.

리홍장을 태운 독일선박이 1895년 3월 톈진을 출발, 시모노세키의 건너편 규슈의 모지(門司) 항에 도착했다. 청국은 선박을 숙소(船中泊)로 정하고 회담 장소로 왕복할 계획을 세웠다. 이토는 73세 고령의 리홍장을 배려해 회담장 슌판로 인근의 인조지(引接寺)라는 절을 청국 대표단 숙소로 제공했다. 인조지는 과거 이 지역의 영주였던 모리(毛利) 집안의 절로서 임진왜란 후 일본에 파견된 조선통신사 일행의 숙소로 사용된 적이 있었다.

협상 대표로 일본 측은 이토 히로부미 총리대신, 무쓰 무네미쓰(陸奧宗光) 외무대신 그리고 청국의 경우 리홍장 전권대신과 그의 양자 리징팡(李經芳)이 내정됐다. 리징팡은 주일 공사를 역임해 일본어가 능통했다. 슌판로에서 이토와 마주한 리홍장은 협상에 앞서 인사말로 분위기를 띄웠다. “일본이 전쟁을 통해 오랫동안 미몽(迷夢)에 빠진 청국을 깨어나게 했다. 앞으로 청일양국은 형제처럼 연대해 서세동점(西勢東漸)에 대비하자.”

청일양국이 수차 담판을 했지만, 전세가 유리한 일본이 양보하지 않아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리홍장이 가마를 타고 숙소로 돌아가는 도중에 일본 우익 청년의 피스톨에 저격되는 사건이 터졌다. 총알이 리홍장의 왼쪽 눈 아래 박히는 중상이었다. 4년 전 1891년 5월 방일 중인 러시아의 니콜라이 황태자가 교토 인근의 오쓰(大津)에서 경호경찰이 휘두른 칼을 맞는 생각하기도 싫은 황당한 사건이 연상됐다. 일본으로서는 부끄러운 일이 연속 발생한 것이다.

메이지천황이 크게 놀라 전의를 보내고 이토는 복어의 독을 씹은 것처럼 당황해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일본의 요구조건이 너무 완강해 회담의 진척을 보지 못한 청국으로서는 하늘이 준 기회였다. 후에 리홍장은 “이 총알이 나라를 구하겠구나”하고 생각했다고 한다. 세계 톱 뉴스가 된 리홍장 피습사건으로 청국을 지원하려는 서구열강의 개입을 우려한 일본은 청국의 요구를 대폭 들어주어 회담을 서둘러 마무리지었다. 리홍장으로서는 죽음과 바꿀만한(值那一死) 회담의 성과였는지 모른다.

“청국은 조선이 완전무결한 자주독립국임을 확인하고 조선의 자주독립을 해치는 조공, 전례 등은 영원히 폐지한다”를 제1조로 하는 시모노세키(馬關)조약이 이렇게 탄생했다.

시모노세키의 슌판로를 찾았다. 청일양국의 회담장은 역사자료관으로 보존돼 있고 바로 옆에 슌판로라는 간판을 내건 현대식 건물로 숙박도 가능한 새로운 복어요리전문 레스토랑이 영업을 하고 있었다.

슌판로와 인조지 사이 좁은 300m 길은 ‘리홍장의 길’로 명명돼 있었다. 이곳에서 간발의 차이로 목숨을 구한 리홍장은 피습 다음해인 1896년 5월 러시아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고 유럽과 미국을 순방하는 등 왕성한 외교활동을 하다가 1901년 11월 베이징 자택에서 천수를 누리고 79세로 세상을 떠났다.

날은 어둑어둑해졌다. 인근 인조지도 둘러보았다. 인적이 드문 조용한 절은 지난 역사를 아는 듯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是亦過矣)”고 침묵으로 말하고 있었다.

유주열(외교칼럼니스트)
유주열(외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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