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봉철 회고록⑭] 작은 어촌에 불과했던 쿠웨이트 최대 부국으로 성장해
[현봉철 회고록⑭] 작은 어촌에 불과했던 쿠웨이트 최대 부국으로 성장해
  • 현봉철 민주평통 쿠웨이트지회장
  • 승인 2021.08.17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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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직후 제주도에서 출생, 4·3사태 때 부친 실종, 홀어머니 밑에서 태권도에 전념해 전국체전 우승, 월남전 참전, 중동 건설 붐 때 사우디 건설 현장에서 활동, 쿠웨이트 한인회장과 민주평통 지회장으로 봉사··· 현봉철 회장의 생애는 이처럼 우리나라 현대사의 굴곡과 맥을 함께 하고 있다. 한국경제 발전사와도 궤도를 같이하고 있다. 현봉철 회장의 삶을 시리즈로 소개한다.[편집자주]

미국의 이라크 침공(2003)[사진=위키커몬스]
미국의 이라크 침공(2003)[사진=위키커몬스]

순탄하게 일이 풀리면서 몇 해가 지났다. 하지만 중동 아니랄까 봐 또다시 전쟁이 터졌다. 2003년 2월14일 미군이 이라크를 침공한 것이다. 핵 포기 선포로부터 침공에 이르기까지 쿠웨이트와 모든 중동 국가들이 요동을 겪게 된다. 미국이 후세인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내는 과정이었다. 미국이 강대국임을 힘의 논리로 증명할 때였다.

다시 경기는 침체기로 들어섰다. 반미 감정은 높아가기만 했다. 테러가 빈번하게 일어났고 미국인들이 테러 대상이 됐다. 이 때문에 가능하면 미국인이 있는 곳은 가서도 안 되고 가까이 살아서도 위험했다. 미국인과는 가능한 한 거리를 두는 게 테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혜였다.

쿠웨이트에서도 보수와 반미(시아파) 간 갈등으로 수시로 교전이 일어났다. 쿠웨이트 군 내부 반미주의자들이 기관총을 소지하고 반정부 활동을 하기도 했다. 종교 간 갈등도 수위가 높아지며 사회가 긴장국면으로 치솟았다

사우디 수니파 그룹이 폭탄을 가져와서는 시아파의 모스크를 폭파하는 바람에 인명 피해와 건물의 피해가 많이 나기도 했다. 때로는 미군 차량들이 이동 작전하는 도로에 시아파 단체들이 항의성 농성을 벌이는 일도 자주 일어났다. 작전 차량 사이에 끼어드는 시아파 단체들의 차들도 흔히 볼 수 있었다. 간접적인 시위였다. 미군 중무장 군장비들은 이동을 가로막은 차들을 그대로 밀어서 뭉개버리기도 하고 뭉개진 차들은 길 주변에 전시해 시민들에게 홍보하기도 했다.

쿠웨이트 안에서 무슬림 수니와 시어파는 서로 간에 보이지 않은 기 싸움이 대단했다. 신앙을 놓고도 세력을 나누고 편 가르기를 했다. 어찌 됐든 쿠웨이트도 전쟁에 있어서는 미국에 힘입었기에 승리할 수 있었을 뿐이다. 전비 지출은 막대했을 것이다.

이라크 아르빌에 주둔했던 한국군[사진=자이툰 부대]
이라크 아르빌에 주둔했던 한국군[사진=자이툰 부대]

그 무렵 미국의 요청으로 연합군 형태로 우리 군이 파병됐다. 우리 군은 이라크 아르빌에 주둔하고, 다이만 부대(공군 지원단)는 쿠웨이트에서 지원을 했다. 많은 나라들로부터 주둔군에 대한 질타와 비난이 뒤따랐다.

다이만 부대 시설은 내 회사가 시공을 맡았다. 나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연합 공군 기지에 우리 공군이 숙식하고 업무를 수행할 생각을 하면서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 국위 선양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했다. 부족한 면도 있었겠지만, 우리 공군들이 쿠웨이트에 들어와 지장 없이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전시 상황이라 크고 작은 전투 때마다 비상이 걸렸다. 비상시에는 모든 것이 중단된다. 현장도 올스톱 된다. 현장에서는 기다리다 비상 해제가 되면 다시 움직이며 일을 진행했다.

당시 주쿠웨이트한국대사였던 박인국 대사는 공사 수주에 역점을 두어 힘들 쏟아부었고, 한국의 원유 수입물량 확보를 위해 쿠웨이트 정부와 10년 장기 계약을 체결했다. 그 무렵부터 한국과 쿠웨이트 간 교역 물량이 많아져 쿠웨이트에 지금 한국은 두 번째로 큰 수출국이 되었다.

2007년에 쿠웨이트는 비로소 전쟁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고 미개발 부분에서 공사 발주를 많이 하게 된다. 미국 덕에 이라크로부터도 안전지대가 되었다. 국경을 설정하며 펜스를 설치하고 국경 경비를 강화해 이라크-쿠웨이트 왕래를 단절시킨 것이다. 허가증을 받은 자에 한해 국경을 넘나들 수 있도록 했다. 이 조치로 인해 수많은 배드윈 유목민이 갈 길을 잃고, 각국에서 국적 없는 사람들 지위로 전락했다.

민주평통 쿠웨이트지회가 주최하고 주쿠웨이트한국대사관이 주관한 평화 통일 기원 사막 트레킹.
민주평통 쿠웨이트지회가 주최하고 주쿠웨이트한국대사관이 주관한 평화 통일 기원 사막 트레킹.

우리나라 기업들은 쿠웨이트 정부공사를 한 해에 40-50억불이나 수주하기도 했다. 쿠웨이트의 발주는 우리 건설 시장에 일대 변화를 일으킬 정도였다. 내수 경기도 차차 회복하고 원유의 힘이 다시 살아날 때였다. 쿠웨이트는 원유 수출로 순식간에 부국으로 급부상했다.

2010년에는 세계경기 침체로 쿠웨이트 경제가 크게 타격을 입기도 했다. 쿠웨이트 기업인들이 펀드에 가입하여 큰 손실을 보았다고 한다. 쿠웨이트 정부는 기업인이 본 250억불 손실을 지원해 주자고 국회에서 의결하기도 했다.

참고로 쿠웨이트를 소개한다. 쿠웨이트는 인구가 350만명에 불과하다. 본국인 120만명에 외국인 거주자가 230만명으로 외국인 거주자가 본국인에 비해 훨씬 많다. 면적은 우리나라 경상북도 정도의 크기다.

쿠웨이트는 이라크와 사우디 사이에 위치한 소국으로, 2차세계대전 전까지만 해도 작은 어촌에 불과했다. 쿠웨이트는 영국 식민지를 거치면서 많은 인도인이 유입됐다. 영국은 인도인을 교육시켜 중간층에 두고 대리 관리를 시켰다. 그래서 해방되기 전까지는 인도 화폐가 공동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쿠웨이트는 1961년 영국 식민지 신세를 벗어났다.

쿠웨이트가 일약 부국으로 성장한 것은 지하에 매장돼 있는 막대한 원유 때문이다. 이 원유로 인해 화폐 단위도 세계에서 제일 높고, GNP도 제일 높은 국가 중 하나가 됐다. 원유 수출로 인해 쿠웨이트 국민에 한해 사회보장도 최우선으로 제공하고 있어,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는 국가이기도 하다.

쿠웨이트에도 그늘진 면은 있다. 나라의 역사도 일천하고, 문화도 제대로 정립돼 있지 않다. 원유가 있다 보니 사람들도 게으른 편이다. 사회주의 성향이 강하며, 왕정과 의회 제도가 뒤섞인 특이한 정치 체제를 가지고 있는 나라다.<끝>

현봉철 민주평통 쿠웨이트지회장
사진 오른쪽이 현봉철 민주평통 쿠웨이트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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