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기고] 후지산에서 본 환상적인 일출 광경
[해외기고] 후지산에서 본 환상적인 일출 광경
  • 이승민 칼럼니스트
  • 승인 2021.08.30 11: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일본에는 일생에 한 번은 후지산이란 말이 있다. 일본인이라면, 후지산 정상을 밟아보고 싶은 마음은 누구라도 간절하기 때문이리라. 한 달 전부터 등산날을 정했지만 아쉽게도 오늘은 비가 온다는 뉴스가 있었다. 여름날 비 좀 맞으면 어때. 비 내리는 후지산 등산을 즐겨보자. 

하늘엔 비구름이 덮여 있었고 아침부터 더위가 위세를 부렸다. 한국에서 가져온 밀집모자를 눌러 쓰고 준비한 등산 가방을 등에 메고 전차에 몸을 실었다. 요코하마역에서 남서쪽으로 1시간 40분쯤 달려 고덴바역에 도착했다. 후지산 5고메로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후지산 비 소식 때문인지 등산객이 없었다. 나 혼자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이 되자 외국인 한 사람이 내 뒤에 섰다. 승객 두 사람을 태운 버스는 후지산 속으로 달려들어 갔다. 두 남자는 서로 인사를 나눴다. ‘아난도’라는 이름의 인도에서 온 유학생이었다. 그는 일본 홋카이도대학에서 건축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내년에는 박사학위를 받는다고 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버스는 등산 입구에 도착했다. 나란히 산길을 걸었다.

“고덴바 등산로는 모래밭이 많군요. 사막을 걷는 기분입니다.”
“그렇군요. 후지산에 사막길이 있었다니 놀랍습니다.”
“저기 그늘 바위에서 뭣 좀 먹고 갑시다.”

이름 모를 바위에 도시락을 펼쳐놓았다. 아난도는 ‘앙꼬’없는 밀가루 빵과 망고잼을 내어 놓았고, 나는 오곡밥에 깻잎, 고추, 마늘, 고추장을 내놓았다. 서로 가져온 음식을 나눠먹으며 흥미로운 점심시간을 가졌다. 나는 깻잎에 밥과 마늘을 싸 먹고 푸른 고추를 고추장에 찍어 먹었다. 후지산에서 먹는 한국식 식사는 꿀맛이었다. 내가 맛있게 밥 먹는 것을 지켜보던 아난도가 웃으며 말했다.

“한국인은 참으로 대단합니다, 매운 고추장에 마늘을 싸 먹고 또 고추를 고추장에 찍어 먹죠?” 웃음이 나와 웃었다. 외국인 입장에서 보면 호기심 가득 의아할 만도 했다.
“한국인은 일이든 먹는 것이든 싱거운 것은 싫어하지요. 심심한 것보다 화끈한 것을 좋아합니다.”

나는 물을 많이 가져왔다. 아난도에게 물을 나눠 주고 후지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구름 속에서 해님이 방긋 웃더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가방 속에서 비옷을 꺼내어 입었다.

“해 뜨고 비가 오는군요.”
“그렇군요, 오늘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습니다.”

빗방울 소리를 들으며 걸었다. 저만치 앞에 2800m 이정표가 보였다. 백두산보다 높은 곳을 밟고 있었다. 비는 그치고 하늘은 맑고 뜨거운 햇살이 쏟아졌다. 땀이 줄줄 흘렀다.

“몹시 덥군요. 좀 쉬어 갑시다.”

바위를 의자 삼아 물을 마시며 쉬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나무는 한 그루도 보이지 않았고 자갈과 바위뿐이었다. 해맑던 하늘은 다시 변했다. 먹구름이 밀려왔다. 천둥소리가 귓전에서 울렸고 번개는 머리 위에서 번쩍거렸다. 갑자기 굵은 비가 쏟아져 내렸다. 안개들이 모여들어 벌거벗은 후지산에 옷을 입혀주고 있었다. 먹구름과 안개로 두 겹의 옷을 입은 후지산은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후지산의 산신령은 우리에게 호통을 치고 있었다.

“일본 제일의 산을 그렇게 쉽게 오르려 하느냐.” 두 남자는 겁없는 말썽꾸러기들처럼 천둥과 번개 속으로 기어올랐다.

“아난도 씨, 내 뒤를 바짝 따라오세요. 잘못하면 길을 잃고 맙니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왔다. 후지산은 변덕이 심했다. 갑자기 어둠이 거치더니 해님이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다.

“우리 여기서 좀 쉬어 갈까요?” 비옷을 벗고 바위에 걸터앉았다. 비에 젖은 후지산 풍경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별천지였다. 하얀 구름 아래로 펼쳐진 풍경은 신선들의 정원 같았다. 후지산은 안개 옷을 하나씩 하나씩 벗더니 완전히 벗어버리고 말았다.

“후지산은 여성 산 같지 않아요?”
“그렇군요, 19살 수줍은 아가씨 몸매 같아요. 목욕을 하고 물 묻은 그대로 서 있는 여인 같습니다.”
“그런 여인을 본 적이 있나요?”
“물론이죠, 일본 목욕탕에서 봤습니다.”

일본에는 혼탕이 있어 그런 모습을 볼 수가 있다. 두 남자는 후지산 여인의 가슴에 올라 앉아 노래도 불러가며 즐겁게 이야기했다. 

“인도에서 제일 높은 산은 무슨 산이죠?” 
“히말라야 산입니다.” 
“히말라야에 한 번 가보고 싶군요.”
“꼭 오세요, 인도에 오시면 제가 동행해 드리겠습니다.”

일어나 다시 걸었다. 후지산 정상이 가까이 보였다. 산정에 구름이 일더니 굵은 빗방울이 떨어졌고 추위가 몰려왔다. 땀에 젖은 옷이 추위에 얼어붙는 것 같았다. 눈보라가 휘날렸고 먹구름은 후지산의 밤을 재촉했다. 어둠이 짙어왔고 이정표 만 간간이 안내를 해줄뿐 인적이 없었다. 바람이 점점 세차게 불었다. 추워 걸음이 빨라졌다. 후지산의 칼바람은 태풍보다 더했다. 몸도 지치고 배도 고팠다. 갑자기 어둠 속에 건물 하나가 길을 막았다. 산장이었다.

“야, 산장이다(やまごやだ)” 문을 두드리자 선녀 같은 아가씨가 나왔다.

“이 험난한 산속에 이렇게 아름다운 선녀가…” 산장 아가씨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안으로 안내해주었다. 따뜻한 장작 난로가 피어있었다.

“춥죠? 어서 이리 앉으세요.”
“아가씨, 고마워요. 여기는 한겨울이군요. 추워서 죽는 줄 알았어요.”
“그렇습니다, 후지산 높은 곳은 일 년 내내 겨울입니다. 배고프실 테니 식사부터 하시죠.” 아가씨가 만들어 준 카레라이스로 저녁밥을 먹었다.
“카레하면 인도가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인도 사람들은 한국인들 김치처럼 즐겨 먹죠.” 아가씨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우리들 옆에 앉았다. 산장을 운영하는 아키코라고 하는 아가씨였다.
“아가씨, 여기가 몇 미터 정도 되나요?”
“표고 3,200m 되는 곳이에요.”
“참으로 높은 곳에서 사시는군요. 무섭지 않으세요?”
“무섭긴요, 자연에 순응하면서 살면 전혀 무섭지 않아요. 그런데 두 분은 어느 나라에서 오셨나요?”
“이분은 인도에서, 저는 한국에서 왔습니다.”
“어머나, 그렇게 멀리에서 저의 산장까지 찾아 주셨군요. 참으로 반갑습니다. 몇 년 전 일본 황태자님께서도 여기서 주무시고 정상까지 등산하셨어요. 오늘 밤 황태자님 일행이 주무셨던 방에 두 분을 황태자로 모시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후지산에 오길 잘했군요. 영광입니다.”

즐겁게 이야기하는 동안 하늘에서는 달님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아가씨는 달구경을 하자며 우리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쟁반 같은 둥근달이 휘영청 후지산 상공에 떠 있었다. 망망한 달빛 아래 아득하게 펼쳐진 후지산의 모습은 낮에 본 그 자태와는 또 달랐다. 먼 산을 바라보며 님을 그리워하는 애처로운 여인의 모습 같았다. 달구경을 하고 밤 9시가 좀 지나 잠이 들었다.

아난도가 날 깨웠다. 시계를 보니 새벽 2시였다. 두꺼운 겨울 잠바를 입고 가죽장갑을 끼고 가방을 등에 메었다. 손전등으로 길을 물어 어둠속을 한 걸음 한 걸음 올랐다. 새벽이 밝아 오기 시작했다. 새벽 4시 반이 되어 후지산 정상을 밟았다. 아난도는 산 아래로 펼쳐진 구름을 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우리는 구름바다 위에 서 있었다. 하얀 구름이 발아래서 소복소복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구름들이 몰려와 하얀 옷을 입혀주었다. 어디를 보아도 하얀 나라, 금방이라도 천사들이 춤을 추며 나타날 것만 같았다.

“야, 태양이다!”

아난도가 소리쳤다. 하얀 구름이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붉은 구름 문을 열고 찬란한 태양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환상적인 해님의 등장에 천지가 숨을 죽였고 내 가슴은 두근거렸다. 해님은 그 모습을 완전히 구름 위에 나타냈다. 천길만길 홍비단을 구름 위에 깔아놓고 오색 찬란한 뭉게구름은 천국의 율동을 보여주었다. 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술공연으로 천상의 빛축제를 열어주었다.

태양은 구름들의 축하를 받으며 창공에 입장했고 구름은 태양의 조명을 받아 형형색색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입체적인 빛들의 미력은 펼쳐놓은 그대로가 하늘나라의 꽃밭이었다. 

모닥불처럼 활활 타오르는 이 오묘한 공간의 주인공이시여!
끝없이 광활한 화선지에 펼쳐놓은 신의 그림 무대여!

이렇게 가까이서 이렇게 아름다운 하늘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것은 기적이고 축복이었다. 나는 위대한 신비 속에 파묻혀 천지를 창조한 신 앞에 무릎을 꿇었다.
창조주시여, 천지는 신비의 빛으로 가득합니다. 이곳 세상은 오직 감동으로만 채워져 있습니다. 이 공간이 천상의 세계라면 이 경이로운 광경을 지상에 내려 병든 인간들의 마음을 치료하여 주소서

어느새 태양은 창공 높이 솟아 올라 찬란하게 웃으며 온 세상에 빛을 내려주고 있었다. 아난도와 나는 후지산의 신선이 된 것처럼 기뻤다. 황홀했던 일출 광경을 이야기하며 분화구를 한 바퀴 돌았다. 후지산 정상에는 우체통이 있고 기념품 가게도 있었다. 보고 싶은 얼굴들이 생각나 엽서에 편지를 써서 우체통에 넣었다. 기념품 몇 개씩을 사들고 돌방석에 앉아 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먼 산을 내려다보며 아난도는 인도의 동요를 불렀다.

“동요 참 좋군요. 인도의 노래가 이렇게 아름다운 줄 몰랐습니다.”
“어린 시절 고향에서 많이 불렀던 노래입니다.”

내려가는 발걸음은 즐겁고도 가벼웠다. 어젯밤 묵었던 산장에 들렸다. 아키코 씨는 달려나와 반겨주었고 콧노래를 불러가며 밥부터 차려왔다. 옆에서는 일본인들이 담소를 나누며 식사하고 있었다. 아키코 씨가 소개시해 주었다. 소설가 호소가와 씨, 화가 스도우 씨, 가수 스즈키 씨, 그리고 피아니스트 가네코 씨를 소개해주었고 이들은 후지산 시카(후지산 사슴)라고 하는 예술인 모임의 회원들이었다. 인사를 나누고 같이 앉아 즐거운 식사를 했다.

“이번 후지산 등산은 참 좋은 여행이 되었습니다. 잊을 수 없는 감동으로 오래오래 기억될 것입니다.” 작별인사를 나누고 아난도와 함께 일어섰다. 저들은 산을 올라가야 했고 우리는 산을 내려가야 했다. 서로가 헤어짐을 아쉬워했다. 아키코 씨가 웃으며 카메라를 내밀었다. 다같이 기념사진을 찍고 우리는 산을 내려갔다.

“우리가 후지산을 올랐다니 인간의 다리도 참으로 위대합니다.”
“그렇군요. 작은 두 다리로 저 높은 산을 정복하다니 인간도 대단합니다.”


하산하던 두 남자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뒤돌아 삿갓구름에 쌓여있는 후지산을 올려다 보았다. 산장의 아가씨는 멀어져 가는 우리들을 보면서 아직도 손을 흔들고 있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송파구 올림픽로35가길 11(한신잠실코아오피스텔) 1214호
  • 대표전화 : 070-7803-5353 / 02-6160-5353
  • 팩스 : 070-4009-2903
  • 명칭 : 월드코리안신문(주)
  • 제호 : 월드코리안뉴스
  • 등록번호 : 서울특별시 다 10036
  • 등록일 : 2010-06-30
  • 발행일 : 2010-06-30
  • 발행·편집인 : 이종환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석호
  • 파인데일리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월드코리안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k@worldkorean.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