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로⑲] 아프리카에서 상생하는 경제정책을 설계하다
[아프로⑲] 아프리카에서 상생하는 경제정책을 설계하다
  • 윤영준(기획재정부 사무관·前 아프리카개발은행 거시경제조사국 이코노미스트)
  • 승인 2021.10.28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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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PRO’는 국내 아프리카 전문가들의 모임이다. 외교부 한·아프리카재단에서는 이들의 활동을 소개한 책을 두 권 펴냈다. ‘Af-PRO, 한국과 아프리카를 잇다’는 제목의 단행본들이다. 한·아프리카재단의 허락을 받아, 이 책의 내용을 연재한다.[편집자주]

한아프리카재단경제세미나 발표중
한아프리카재단경제세미나 발표중

운영준 사무관은 2017년부터 2020년까지 코트디부아르의 경제 중심지 아비장(Abidjan)에 위치한 아프리카개발은행(African Development Bank: AfDB) 본부에서 이코노미스트로 파견되어 근무했다. 윤영준 사무관은 3년간 아프리카 대륙의 대표 개발금융기관 심장부에서 내로라하는 지역경제전문가들과 함께 호흡하며 아프리카 경제연구와 다양한 정책개발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기획재정부에서 우리나라의 경제정책을 수립하고 개발협력을 담당했던 실무 관료로서 한국의 발전 경험을 아프리카와 공유하고 현지 실정에 맞게 제안하는 일도 그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였다.

기획재정부의 일부 동료들이 AfDB 본부가 아프리카 대륙, 그중에서도 서부 아프리카에 위치한다는 이유만으로 AfDB로 파견을 주저하였지만, 윤영준 사무관에게는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는 것, 그리고 아프리카 대륙의 빈곤 해결에 작게나마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이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많은 사람들의 걱정과 우려 속에서 네 식구를 이끌고 아비장으로 향한 그는 어린 아이들에게 이 특별한 선택이 장차 자아를 형성하는 데 좋은 밑거름이 되리라고 판단했다. 실제로 아이들은 코트디부아르를 제2의 고향으로 여기고 있으며, 편견 없이 아프리카를 마주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를 수 있었다. 윤영준 사무관은 공무원으로서 국가가 허락한 특별한 경험을 혼자만의 추억으로 묻어둘 수 없어 3년간의 경험을 토대로 ‘아프리카, 미필적 고의에 의한 가난’이라는 제목의 책을 발간했다.

가족을 이끌고 코트디부아르에 삶의 여장을 풀다

AfDB 파견 근무자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본 순간, 가슴이 두방망이질했다. 기획재정부의 국제경제분야에서 근무해온 나는 전문성을 견고히 하는 다음 단계로 국제금융기구에서 일하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국제통화기금(International Monetary Fund: IMF), 세계은행(World Bank) 등 국제금융기구가 많지만, 그중 AfDB는 그 본부가 아프리카 대륙에 소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내게 대체불가한 장점으로 다가왔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이 점을 단점으로 뽑기도 하지만 군대로 치면 최전방인 셈. 한살이라도 젊을 때 현장에 나가 경험을 쌓고 싶어 AfDB에 파견 근무를 지원했다. 참고로 AfDB는 아프리카를 대표하는 다자개발은행(Multilateral Development Bank: MDB)으로 아프리카 대륙의 빈곤 퇴치와 경제 개발을 위한 금융을 지원하고 있다. 현재 아프리카 54개국과 역외 27개국을 포함하여 총 81개의 회원국을 두고 있다. 다행히 가족들도 내 의견을 지지하고 공감했다.

특히 당시 아이들이 만으로 5세, 9세, 11세로 생의 어느 시점보다 새로운 자극을 편견 없이 받아들이고 즐기리라고 판단했다. 우리 부부는 이 결정이 아이들이 앞으로 정체성을 확립하고 인생을 설계하는 데 좋은 밑거름이 되리라 확신했다. 하지만 역시나 내가 코트디부아르 아비장으로 떠난다고 하자 동료들은 측은한 눈길을 보냈다.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이니 괜찮을 거야”, “너무 힘들면 조기 복귀해”라고 입을 모아 위로하듯 말했다. 꼭 파견처가 AfDB이어서만은 아니었다. 본부가 북부 아프리카에 위치한 튀니지에 있을 때만 해도 AfDB는 꽤 인기 있는 발령지였다. 같은 기관인데 근무지가 북부 아프리카에서 서부 아프리카로 바뀌었다는 이유만으로 기피하는 대상으로 변했다는 사실이 새삼 의아했다.

AfDB브리핑룸에서 아이들과 함께
AfDB브리핑룸에서 아이들과 함께

사실 그전까지 나는 아프리카를 잘 몰랐다. 아프리카 대륙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쉽게 저지르는 오류처럼 아프리카하면 막연하게 부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렸다. 당시 나에게 아프리카에 대한 이미지는 가난, 테러, 질병, 부패 등의 인상이 지배적이었다. 첫 출근하던 날, 잠비아 출신의 매니저 안소니는 내게 “진짜 아프리카(Authentic Africa)에 온 것을 환영한다”고 인사말을 건넸다. 그 표현이 흥미로워 아프리카에 진짜와 가짜가 있느냐고 되묻자, 그는 “가짜는 없지만 진짜는 있다”고 명쾌하게 답했다. 많은 사람들이 아프리카 하면 가난해도 세렝게티 국립공원, 킬리만자로, 케이프타운처럼 그림 같은 자연 풍경을 떠올리는데, 그것은 아프리카 대륙의 한쪽 측면만 보여주는 것이며, 흑인 노예를 실어 나르던 기니만(Gulf of Guinea)의 축축한 땅, 말라리아와 에볼라 등의 질병으로 고통 받는 서부 아프리카와 중부 아프리카 일부 지역이 어쩌면 진짜 아프리카일지 모른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아프리카의 다른 국가에서 파견 온 직원들조차 가족들은 고향에 두고 혼자 와서 근무하는 경우가 많았다. 매니저는 내게 용감하다고 했다. 아프리카 대륙을 경험한 적 없는 내가 덜컥 아비장에 아내와 어린 세 아이를 데리고 왔으니. 나는 한참 후에야 그가 내게 왜 용감하다고 했는지를 뼈저리게 깨닫는 순간을 경험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멋몰라서인지 아니면 그의 말마따나 용감해서인지 ‘진짜 아프리카’라는 말에 큰 끌림을 느꼈다. 아이들에게 ‘진짜 아프리카’를 경험하게 하는 일이야말로 아빠로서 안겨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라고 굳게 믿었다.

실제로 아비장에서의 삶은 내가 아프리카에 대해 막연하게 품어온 이미지처럼 부정적이지만은 않았다. 나는 코트디부아르를 비롯해 다른 아프리카 국가에서 오래 거주한 외국인들이 부정적인 시각에만 더욱 집중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들은 이방인으로서 낯선 곳이 불편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때 그 낯선 곳이 아프리카일 경우 유독 사람들은 그 원인을 일방적으로 아프리카에서 찾으며 업신여기는 경향을 보이곤 했다. 나는 그들을 반면교사 삼아 같은 오류를 범하는 일만은 피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코트디부아르 사람들 특히, 서민층에 속하는 사람들의 생활상, 사고방식 등을 이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일련의 노력은 소위 서아프리카식 불어를 익히며 비로소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나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만나고 현지인이 쓴 소설을 읽고 현지 드라마를 시청하며 코트디부아르, 더 나아가 서부 아프리카의 정서를 보다 더 입체적으로 이해해 나갔다.

AfDB의 본부가 위치한 아비장은 코트디부아르에서 가장 큰 도시로 사실상 수도 역할을 한다. 야무수크로(Yamoussoukro)라는 행정수도가 따로 존재하지만, 대부분의 행정부처가 아비장에 위치하며 ‘아비장의 경제가 코트디부아르의 경제’라고 할 정도로 경제의 중추 역할을 한다. 아비장은 1960~80년대까지만 해도 ‘서부 아프리카의 파리’라고 부를 만큼 큰 발전을 이뤘으나, 1990년대 들어 내전을 세 차례 겪으며 쇠퇴기를 맞이했다. 결과적으로 시내 중심에 위치한 고층 건물들 대부분이 1960년대 지어진 것으로 지금 봐도 형태나 구조가 범상치 않다. 당시 폐허나 마찬가지였던 서울과 비교하면 동시대 아비장이 이룬 놀라운 발전상이 더 실감난다.

4차산업혁명 세미나
4차산업혁명 세미나

우리의 발전 경험이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기를

나는 AfDB 경제조사국의 거시경제팀에 속했다. 팀장인 매니저 아래 아프리카 국가 출신 직원 6명과 함께 근무했는데,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경제학 박사 학위를 소지한 경제전문가로 아프리카 최고의 엘리트 지식인이었다. 우리 팀에게 주어진 업무 중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는 아프리카경제전망(African Economic Outlook: AEO) 보고서를 매년 작성하는 일이었다. 보고서를 공식 발표하는 매 1월이면 아프리카 역내외 정부, 연구기관, 경제단체, 기업 등 전 세계 모든 아프리카 관계자들의 이목이 우리에게 집중됐다. 1990년대까지는 IMF, 세계은행과 같은 국제기구나 민간연구소 등의 외부기관이 내놓는 아프리카 경제전망에 의존해왔다.

그러나 아프리카 국가 정부들이 직접 설립한 AfDB의 연구역량이 강화되면서 자체적인 경제전망을 발표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큰 진일보라 평가되기도 한다. 아프리카 경제가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작지만, 경제의 성장 잠재력이 상당한 만큼 우리가 작성한 보고서에 전 세계가 주목했다. 올해는 2월 이후 본격 확산된 코로나19 여파로 보고서상 숫자가 현실성이 없어지는 바람에 수정전망보고서를 작성했고, 그로 인해 몇 달을 밤낮 없이 정신없게 보냈다. AEO와 같은 초대형 프로젝트는 팀원 전체가 협업해서 작업하고, 그 외에는 각자 연구주제를 정해 독립적으로 연구를 진행한다. 연구결과는 세미나를 통해 발표하고 간행물로도 발간한다.

AfDB 근무 초기에는 국제기구의 일원으로서 업무를 배우고 현장 경험을 쌓는 과정에 집중했다. 또한 아프리카라는 대륙과 처음 마주했기에 AfDB 경제전문가들과 협업하여 아프리카 경제에 대해 알아가기를 힘썼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AfDB와 아프리카 국가 정부들이 내놓는 정책들이 조금은 탁상공론처럼 느껴졌다. 빈곤을 퇴치할 만한 경제발전을 이루려면 보다 더 과감한 정책이 필요할 듯한데, 경제학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모범 답안에 집착하는 인상을 받았다. 선진국과의 격차를 좁히기 위해서는 선진국과 유사한 경제정책으로는 부족하다고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면에서 아프리카 국가 정부들이 우리나라의 발전 경험에서 아이디어를 얻을 점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아프리카 경제전문가들 대부분은 반세기 전만해도 국민소득이 백 불도 채 안되던 대한민국이 세계 10위권의 경제 강국으로 고속 성장 한 것에 대해 놀랍게 생각하지만, 한국이 어떻게 성장했는지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했다. 그나마 일부 한국에 대해 관심이 많은 경제전문가들도 새마을 운동, 중화학 공업 육성,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같은 대표적인 키워드만 알고 있을 뿐, 이런 정책을 위해 정부가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을 실행에 옮겼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눈치였다.‘한강의 기적’이라 부르는 우리의 개발 경험 사례는 전 세계에 학술상으로도 많이 소개됐으며 우리 정부와 민간기관들이 그 경험을 공유하기 위해 여러 프로그램을 운영했으나, 우리 기관들이 각각의 아프리카 국가들의 경제 상황과 실정에 맞게 정보를 재가공하기보다 우리의 사례를 일방적으로 주입하는 데 집중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들기도 했다. 아프리카 국가들의 경제 흐름과 역사 등의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거늘, 그런 노력이 부족했던 것 같다.

한아프리카재단경제 세미나
한아프리카재단경제 세미나

나는 그때부터 정책 세미나를 통해 우리나라의 경제정책 성공 사례를 소개하는 일에 더 큰 비중을 두었다. 당장 매주 개최되는 지식공유 세미나에 한국의 발전 경험 사례 발표를 신청했다. 첫 발표는 한국의 저축장려정책에 관한 내용이었다. 저축을 첫 발표 주제로 선정한 데에는 개인적인 이유가 얽혀 있었다. 아비장에 도착하여 가장 처음 내가 한 일은 은행에 가서 급여를 받을 입출금 계좌를 만드는 일이었다. 계좌 하나 만드는 데 필요한 복잡한 서류와 절차는 차치하더라도 매월 5천 세파프랑(약 1만원)에 달하는 계좌관리 수수료를 내야한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은행에 돈을 맡기면 이자가 붙으며 돈이 불기는커녕 비싼 수수료로 매달 원금이 줄어든다니 납득하기 힘들었다.

시중 은행들을 찾아다니며 수수료를 조사했다. 하나같이 적잖은 수수료를 징수하고 있었다. 월 1백 달러 미만의 서민 월급을 고려했을 때 감당하기 어려운 금액이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서민들이 은행에 돈을 맡길 리 만무했다. 침대 밑이나 베개 속이 은행 통장을 대신했다. 민간의 저축은 서민들의 재산 증식을 위한 중요한 금융 수단이기도 하지만, 저개발국가가 산업화를 추진할 수 있는 자금을 공급하는 길이기도 하다. 저축이 이뤄지지 않으면 금융 발전도, 산업화도 요원해진다. 정부가 왜 개입하지 않는 것일까.

나는 세미나에서 이 문제를 제기했다. 물론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정부가 직접 나서 수수료를 없애거나 개인의 저축을 강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다양한 정책을 동원하여 은행과 개인의 저축 성향에 영향을 미칠 수는 있다. 나는 문제를 제기한 후 우리 정부가 저축을 장려하기 위해 어떠한 정책을 펼쳤는지 상세하게 소개했다. 그 후로도 AfDB 뿐 아니라 한국과 아프리카 여러 국가를 오가며 다양한 컨퍼런스와 세미나에서 아프리카 국가들의 경제구조와 구체적인 정책 방향을 제시했다. 한국의 발전 경험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기존의 방식에서 탈피해 국가별, 분야별 경제 상황에 부합하는 맞춤형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나는 경제부처 공무원으로 십여 년간 경제정책을 담당하며 쌓은 경험과 노하우가 이렇게 활용되리라고 스스로도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내가 제시한 맞춤형 정책 아이디어 중 가장 좋은 반응을 이끈 것은 농업협동조합을 도입하자는 제안이었다.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는 국민의 60퍼센트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는 농업 기반 경제체제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때 농업에 특화된 금융기관이 부재해 늘 자금난에 시달린다. 아프리카 국가 정부들은 재정이 부족해 국책 농업은행을 설립해 운영하는 일은 엄두를 내지 못하는 상황이다. 나는 금융의 기능을 겸비한 농업협동조합을 도입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여러 아프리카 국가들의 경우 민족이나 촌락으로 구성된 공동체를 중심으로 농촌이 형성되어 있으며, 촌락마다 협동조합이 존재한다. 한국과 상당히 유사한 구조다.

AfDB 리서치 세미나
AfDB 리서치 세미나

그런데 우리나라 농협에 있는 금융의 기능이 아프리카 협동조합에는 없다. 협동조합에 금융의 기능을 추가하려면 정부의 정책적 개입이 필요하다. 또한 금융 건전성의 기준과 운영 매뉴얼 등을 정부가 마련하고 시행토록 강제하는 과정이 요구된다. 기존의 협동조합을 이른바 농업은행으로 리모델링하는 정책이다. 이는 정부가 직접 예산을 투입하지 않고 농가의 자조적 출연을 통해 농촌에 금융을 공급할 수 있는 바람직한 대안이다. 나는 국내의 농협이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이를 아프리카 국가들에도 적용해봄직 하다고 판단했다.

내가 제시한 정책 대안들을 놓고 동료 경제전문가나 아프리카 정부 관료 대부분이 혁신적이고 창의적이라며 반색했지만, 애석하게도 당장 실행에 옮길 의지를 보이지는 않았다. 한국의 경제발전이 ‘기적’이라고 부를 만큼 예외적인 것이어서 아프리카에도 적용 가능할지 반신반의하는 분위기였다. 나는 이러한 소극적인 태도가 늘 아쉬웠다. “그것은 한국이니까 가능한 이야기고, 여기는 아프리카인데 가능하겠어요?”라는 반문을 들을 때마다 나는 스스로를 불신하는 태도야말로 가장 경계해야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이방인의 옷을 벗고 현지인의 경계 속으로

아비장에 온 지 1년 만에 다섯 식구가 한꺼번에 말라리아에 걸려 입원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말라리아는 바이러스 같은 전염병이 아니다. 모기에 기생하는 말라리아 원충이 체내에 들어가는 경로로 감염되는 기생충 중독 증상이다. 설령 같은 날 같은 모기에 물려도 발병 시기는 사람마다 다르다. 그런데 하필이면 우리 다섯 사람에게 한 번에 발병한 것. 확률상 불가능에 가까웠던 일인 만큼 지역 사람들은 우리의 사례를 ‘사건’이라고 표현했고, 나아가 주한코트디부아르대사관에 보고되고 아비장 교민 사회에 알려지면서 우리 가족은 꽤나 유명세를 탔다. 아비장의 가장 큰 종합병원 담당의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 가족의 말라리아 동시 발병 사건은 말라리아 최다 발병국 중 하나인 코트디부아르에서도 최초 사례라고 한다.

그 이후로도 말라리아는 우리를 종종 찾아왔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전처럼 한꺼번에 오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병원에 입원해 누워 있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나는 무슨 생각으로 여기까지 가족들을 끌고 왔을까 후회스럽기도 했다. 우리는 모기에 물릴 때마다 늘 긴장의 끈을 놓지 못했다. 식솔들을 거느리고 코트디부아르에 산다는 것은 여러 면에서 쉽지만은 않았지만, 그중 가장 힘든 점을 손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말라리아 모기와의 전쟁을 뽑을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사건을 계기로 줄곧 이방인으로 살다가 비로소 현지인의 경계 속으로 들어온듯 한 안도감이 들기도 했다. 나는 그때부터 의료봉사 활동에서 고열을 앓는 환자들의 말라리아 감염 여부를 검사할 때면 연민이 아닌 강한 연대감을 느낀다.

AfDB 본부 13층 도서관에서
AfDB 본부 13층 도서관에서

나는 지난 3년간 공무원으로 국가가 허락한 귀중한 경험을 개인의 추억으로 묻어둘 수 없어 AfDB에서 일한 경험을 토대로 ‘아프리카, 미필적 고의에 의한 가난’이라는 제목의 책을 썼다. 처음에는 논문처럼 딱딱한 글로 시작했다가 아이들도 읽었으면 하는 마음에 읽기 쉬운 에세이 형식으로 방향을 변경했다. 아프리카 국가들이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한 원인을 19개의 정책실패 사례에서 찾고자 한 이 책은 2020년 가을, 세상 밖으로 나왔다. 나는 여전히 아프리카 대륙이 궁금하다. 다시 기획재정부로 돌아온 지금도 아프리카 그리고 AfDB와 지속적으로 교류하며 아프리카 대륙에 대해 알아가고 싶다.

한편, 아이들에게 아프리카는 제2의 고향이나 마찬가지다. 국제학교에서 3년을 보내며 한국에서는 들어보지 못한 여러 아프리카 국가 출신의 아이들과 허물없이 어울려 지냈다. 막내는 나도 다 모르는 아프리카 모든 국가의 수도명을 다 외우고 있을 정도이다. 지구본을 볼 때면 아이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아프리카 대륙에 멈춘다. 우리 가족에게 아프리카는 더 이상 낯선 대륙이 아니다. 우리 가족은 이곳을 떠나 슬퍼한다든지, 후련하다든지 하는 극단적 감정이 아니라 잠깐 자리를 비운다는 정도의 덤덤한 태도로 한국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다.

코트디부아르를 떠난다기보다 오히려 한국에 잠시 출장 갔다가 금방 돌아올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벌써부터 아이들 방학에 맞추어 휴가를 내 이곳을 다시 찾을 계획을 짜고 있다. 코트디부아르에서 ‘사페 데주흐(ça fait deux jours)’라는 인사말은 ‘오래간만이야’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런데 이 문장은 직역하면 ‘이틀 만에 만났다’는 의미다. 이틀만 보지 못해도 오래 못 본 걸로 여기는 코트디부아르 사람들의 심리를 반대로 해석하면 몇 년을 떨어져 있어도 이틀 전에 본 사람처럼 친근하게 여긴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나는 그들과 10년 후쯤에 다시 만나도 ‘사페 데주흐’라고 인사할 수 있을 것 같은 정서적 연대감을 느낀다.

AfDB는 한국인을 기다리고 있다

아프리카 대륙이 한국의 중요한 전략적 파트너로 떠오르고 있지만 아프리카 54개국을 일일이 상대하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 우리 정부가 긴밀한 경제협력 채널을 가동하고 있는 아프리카 국가는 열 개국 내외에 불과하다. 늘 교류하던 국가들만 상대하다 보면 다른 지역에서 새로운 협력 기회를 발굴하는 것은 어려워지기 마련이다. 급변하는 아프리카 경제에 대한 업데이트는 필요하지만 이 또한 만만치 않은 과제이다. 나는 이러한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열쇠가 AfDB에 있다고 생각한다. AfDB에는 54개 국적의 아프리카인들이 근무하고 있다. 다른 국제기구와 달리 직원의 70% 이상이 아프리카 국적을 갖고 있다. 하나같이 자국을 대표할 만한 엘리트층이다. 이들과 교류하며 아프리카 국가 하나하나에 대해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아프리카경제전망(AEO) 발표행사
아프리카경제전망(AEO) 발표행사

AfDB 직원뿐 아니라 54개국 정부 관계자들과도 활발하게 교류할 수 있다. 아프리카 역내 회원국 정부는 AfDB 금융지원을 받기 위해 열과 성을 다하는데, AfDB에 근무하다보면 해당 국가를 방문하지 않아도 이러한 정부 관계자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이들과의 관계를 증진시켜 나가며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다는 것이 AfDB에서의 근무의 큰 장점이다. 물론 아프리카 경제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거시적, 장기적 안목에서 조망할 수 있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AfDB의 중장기 전략이나 중점 지원 분야 등을 따라가다 보면 아프리카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가 보이기 때문이다.

AfDB는 이러한 일들을 함께할 한국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AfDB에는 80여개 회원국 출신의 직원 2천여명이 근무하고 있다. 이중 한국인 정직원은 단 세 명뿐이다. 국제연합(UN), 세계은행, 아시아개발은행(Asian Development Bank) 등 다른 국제기구와 비교하면 약소한 진출 실적이다. 매 2년마다 이삼십 명 규모의 신입직원(Young Professional) 선발절차가 있지만 한국인들의 지원은 미흡하다. 경력직 선발기회도 많다. 직원의 국적 비율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국제기구 인사정책상 이미 한국인들이 많이 진출해 있는 기구들보다 상대적으로 진입장벽이 낮다는 점도 고려할 만한 점이다. AfDB는 외부의 필요나 압력에 의해 지어진 기구가 아닌 독립적이고 주체적으로 설립한 개발기구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특별한 주인의식을 갖고 보람을 느끼며 이 일을 해나갈 수 있다. 한국 청년들이 더 많이 도전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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