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만주⑭] 간도일본총영사관: 한반도를 넘어 중국 침략의 교두보를 설치하다
[아! 만주⑭] 간도일본총영사관: 한반도를 넘어 중국 침략의 교두보를 설치하다
  • 안상경(한중문화콘텐츠연구소장)
  • 승인 2022.02.07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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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삼성으로 불리는 중국 만주에는 우리 독립운동 사적지가 곳곳에 있다. 의병운동, 민족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등 독립지사들의 고민과 피가 어린 곳들이 도처에 있다. 이들 사적지를 시리즈로 소개한다.(편집자주)

길림성 훈춘시 대황구 13열사 묘역(2017년 홍색관광풍경구 선정)
길림성 훈춘시 대황구 13열사 묘역(2017년 홍색관광풍경구 선정)

중국에는 홍색교육(紅色敎育), 홍색관광(紅色觀光)이라는 개념이 있다. 홍색은 단심(丹心)으로 애국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홍색교육, 홍색관광은 교육 및 관광을 통해 애국정신을 함양하는 일종의 현장학습을 말한다. 우리나라에 빗대자면 청소년 역사탐방이나 통일캠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중국의 홍색교육, 홍색관광은 그 주제와 현장이 대부분 일제의 중국 침략과 관계하고 있다. 지난 1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일제로부터 받은 치욕을 잊지 않고, 교육 및 관광을 통해 애국정신을 함양함으로써 국가의 결속을 다지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홍색교육, 홍색관광 기지가 만주지역에 산포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연변조선족자치주 8개 시, 현이 홍색교육기지, 홍색관광풍경구로서 명성이 높다. 북간도로 불렸던 이 지역이, 일제가 중국 침략을 위해 발판으로 삼았던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용정시(龍井市)가 홍색교육기지로서 중국인에게 널리 알려져 있으며, 한국인에게도 백두산을 거쳐 한 번쯤은 꼭 가봐야 할 한인 이주사의 본향으로 알려져 있다.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이기도 하여,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장소성의 가치를 비견할 데 없다.

용정시에는 용우물, 일송정, 대성중학교, 윤동주생가, 명동촌, 3.13반일의사릉, 15만원탈취사건유허지 등 조선 농민의 이주, 정착 및 항일운동과 관련한 발자취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 첫 대상으로, 이번 연재를 통해 간도일본총영사관을 소개하려고 한다. 간도일본총영사관은 항일운동을 진압한 수뇌부였으며, 만주지역의 물질자원을 수탈한 본거지였다. 현재까지도 용정시 인민정부가 간도일본총영사관의 옛 건물을 청사로 사용하고 있을 만큼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지만, 그 원형이 간직하고 있는 아픈 역사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조선통감부간도파출소 건립 과정(일본 헌병과 경찰들)
조선통감부간도파출소 건립 과정(일본 헌병과 경찰들)

소가죽 한 장 둘레의 땅에 간도일본총영사관을 짓겠다는 일제의 술책

1909년 9월4일, 일제가 청과 간도협약을 체결했다. 간도협약 제2조와 7조에 따라 일제는 조선통감부간도파출소를 간도일본총영사관으로 개편, 확장했다. 간도 한인들을 무력으로 통치하고, 나아가 중국 전역으로 공세를 펼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일제가 간도일본총영사관의 규모를 확장할 때 벌인 술책이 지역전설로 전승되고 있다. 『연세국학총서 73』(중국조선민족문학대계 19권, 2006)에도 ‘소가죽 한 장’이라는 제목으로 채록되어 있는데, 이미 화석화된 여느 전설과 달리 연변 일대에서는 그 전승력이 막강하다. 관련한 기록(記錄)과 구비(口碑)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일제가 용정에 영사관을 건립하려 했다. 헌데 일제는 영사관의 규모를 통해 자신들의 권위를 드러내고 싶었다. 이에 일본영사가 간교한 술책을 꾸몄다. 그리고는 국자가(局子街)에서 청나라 도태부의 윤대인을 접견했다. 일본영사는 일본과 청의 관계가 지속적으로 돈독해야 함을 강조하며, 일본에서 건너오는 영사들이 머물 데가 필요하다고 윤대인에게 청했다. 이에 윤대인이 영사관의 건립 규모를 묻자, 일본영사는 “우리는 바다 한가운데 사는 소국 사람들이라 욕심부릴 줄 모릅니다. 그저 소가죽 한 장만큼의 자리를 떼어주시면 족합니다”라고 했다.

윤대인은 일본영사의 말을 의심했다. 하여 재차 물었지만 답은 똑같았다. 이에 윤대인은 ‘소국놈은 소국놈이구나!’라고 속으로 비웃으며 허락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일제가 으리으리한 영사관을 짓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윤대인은 노기충천하여 그곳으로 달려갔다. 과연 높다란 담장을 빙 둘렀고, 그 속에서 견고한 일본식 건물을 다듬고 있었다. 윤대인은 일본영사에게 따져 물었다. 그러자 일본영사는 “시장에서 소 한 마리를 사다가 그걸 잡아서 가죽을 벗기고, 그 가죽을 실오라기처럼 가늘게 오려내어 영사관의 둘레를 정했습니다”라고 했다.

경신참변(1920년 일본군 19사단 보병 75연대 사진첩에 수록)
경신참변(1920년 일본군 19사단 보병 75연대 사진첩에 수록)

윤대인은 일본영사에게 침을 뱉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이 허락한 것이라 말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용정에 버젓한 간도일본총영사관이 들어앉게 됐다. 그리고 근 30년간 한인은 물론 중국인에 대한 탄압의 소굴로 악명을 떨쳤다. 간도일본총영사관은 뼈대가 여전히 온전한데, 그것을 증거물로 해서 그 옛적 웃지 못할 서글픈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대륙 침략의 발판이자 항일운동 탄압의 본거지로서 극악한 살육 감행

간도일본총영사관은 중국 침략의 발판이었다. 그런데 이 무렵 한반도에서는, 일제가 헤이그밀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켰다. 그리고 을사늑약에 이어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체결하고 통감정치를 실현했다. 이 과정에서 군대도 해산시켰다. 이렇게 대한제국을 장악하고, 일제는 그 여세를 몰아 중국을 공략했다. 예컨대 1907년 1월부터 7월까지 300여 명의 인력을 상인이나 관광객으로 가장시켜 연길현의 지형을 정찰하고 지도를 제작했다. 동년 7월30일에는 러시아와 비밀조약을 체결하여 동북의 북부는 러시아 세력권으로, 남부는 일본 세력권으로 분할했다.

러시아도 일제의 역주를 견제할 수 없었다. 이러한 판도에서, 일제는 1907년 8월 용정에 조선통감부간도파출소를 설립했다. 간도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을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사이토 스에지로(齋藤季治郞)가 헌병 60여 명을 이끌고 용정에 입성했다. 중국에는 정치적인 압박을 가하는 동시에 만주지역 한인들의 항일운동을 탄압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후 간도협약을 체결하고 조선통감부간도파출소를 간도일본총영사관으로 확대, 개편했다. 이에 따라 1920년에 300여 명의 경찰들이 조선총독부를 거쳐 용정에 입성했다.

간도일본총영사관(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육도하로 869번지)
간도일본총영사관(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육도하로 869번지)

이러한 증원으로, 간도일본총영사관은 체제를 확대할 수 있었다. 경찰부를 신설하고 그 산하에 10여 개의 파출소를 운영했다. 1928년에는 100여 명의 경찰을 다시 증원했다. 1931년에는 경찰부 산하에 특별수사반을 신설하여 만주지역 공략을 더욱 공고히 했다. 나아가 1935년에는 경찰 병력을 전체 600여 명으로 늘렸고, 이를 기반으로 국자가(局子街), 두도구(頭道溝), 동불사(銅佛寺), 천보산(天寶山), 팔도하자(八道河子), 백초구(百草溝) 등 용정 인근의 18개 지역을 관할, 통치했다. 이러한즉, 만주지역에서 벌어진 사건들의 배후에 간도일본총영사관이 도사리고 있었다.

예컨대 1919년 3.1운동의 영향으로 용정에서 반일만세운동이 번졌을 때, 간도일본총영사관은 만주 군벌과 결탁하여 시위대를 진압했다. 이때 명동학교, 정동학교 학생들을 포함한 19명이 현장에서 즉사했고, 수십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1920년 10월에는 자작으로 훈춘사건(琿春事件)을 벌이고, 그것을 구실로 5천여 병력의 정규군을 동원하여 3천여 명의 한인을 학살했다. 1931년 9월에는 만주사변(滿洲事變)에 항거하는 한인 수십여 명을 불태워 죽였고, 1932년 4월에는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19사단을 끌어들여 “천 명을 오살할지언정 항일투사 한 명도 놓치지 마라!”라고 외치며 민간인 4천여 명을 학살했다.

간도일본총영사관은 은진중학, 대성중학의 학생운동과 천주교, 기독교 단체의 반일운동도 탄압했다. 이 과정에서 수백여 명의 학생과 종교지도자가 지하감옥에서 고문을 당했다. 간도일본총영사관은 항일 근거지 소탕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1932년 8월에 연길시 의란진 왕우구에서 보름 동안 벌인 소탕작전을 꼽을 수 있다. 이때 일본군 19사단의 비행기와 대포를 동원하여 700여 채의 가옥을 불태웠다. 양민 학살은 말할 것도 없었거니, 그 희생자의 수는 셀 수조차 없었다.

간도일본총영사관 전시관(지하감옥 입구)
간도일본총영사관 전시관(지하감옥 입구)

길림성 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어 항일의식 고양의 관광지로 각광

간도일본총영사관은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육도하로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용정시 인민정부가 간도일본총영사관의 옛 건물을 청사로 사용하고 있으며, 길림성은 이를 문물보호단위로 지정하여 유형의 건축물로 보호하고 있다. 이렇게 용정시의 랜드마크가 됐지만, 당시 시커먼 철문 안으로 끌려갔던 항일투사에게는 그야말로 공포의 공간이었을 것이다.

외벽 네 귀퉁이에는 두터운 콘크리트로 설계한 토치카가 연쇄적으로 설치되어 있다. 항일투사의 기습에 대비해 방어 진지를 구축한 것이다. 담장의 높이는 2미터를 훌쩍 넘기는데, 벽돌 담장에 옹위되어 있는 미색의 건축물이 바로 간도일본총영사관 유적이다. 1922년 11월 항일투사들에 의해 불태워진 이래, 1924년에 다시 착공하여 1926년에 준공됐다. 건축 면적은 2,503㎡이며, 관사 및 정원을 포함하여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는 전체 부지는 42,944㎡이다. 건물은 지하 1층을 더해 3층으로 구성되어 있고, 중간 부분은 5층으로 돌출되어 있다. 정면 중앙에는 세 개의 아치형 출입구로 꾸민 현관이 있다.

지하실은 북쪽 문을 통해 들어설 수 있는데, 이곳에서 항일투사들을 취조하고 고문했다. 1909년부터 1937년까지 약 2만여 명의 항일투사들이 취조를 당했으며, 이 중 4,000여 명이 고문을 당했고, 1,000여 명이 서울 서대문감옥으로 압송됐다. 간도일본총영사관은 만주사변 이후 경찰부 산하에 특별수사반을 신설하고 다양한 첩보활동을 통해 항일투쟁을 차단해 나갔다. 그리고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간도특별공작반으로 역량을 강화했다. 예컨대 1934년 한 해에만 3,635명이 간도특별공작반에서 취조를 당했는데, 당시 연변지구의 한인수가 426,000여 명이었으니 인구 비례로 따지면 170명당 1명인 셈이다.

간도일본총영사관 지하감옥
간도일본총영사관 지하감옥

지금은 코로나 팬데믹으로 주춤하지만, 한·중 수교 이후 간도일본총영사관은 한국인이 즐겨 찾는 관광명소로 각광을 받고 있다. 그런데 “관광(觀光)”을 어의 그대로 풀어보면 빛을 본다는 의미이며, 그 빛이란 『주역』에서 말하는 천문(天文)과 지문(地文)과 인문(人文)이라고 할 수 있다. 간도일본총영사관을 두고, ‘어찌 이렇게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을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왜 하필 이곳에서 어찌 이렇게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을까’에 미쳐야 하는 것이 진짜 관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진짜 관광이 활성화될 때, 그 유적지가 보다 오래도록 보존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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