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만주⑮] 정암촌: 연변의 어느 작은 마을에서 충청도 사람들을 만나다!(1)
[아! 만주⑮] 정암촌: 연변의 어느 작은 마을에서 충청도 사람들을 만나다!(1)
  • 안상경(한중문화콘텐츠연구소장)
  • 승인 2022.02.22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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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삼성으로 불리는 중국 만주에는 우리 독립운동 사적지가 곳곳에 있다. 의병운동, 민족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등 독립지사들의 고민과 피가 어린 곳들이 도처에 있다. 이들 사적지를 시리즈로 소개한다.(편집자주)

정암촌 위치(북한 함경북도 온성군에서 북쪽으로 약 5km 지점에 위치)
정암촌 위치(북한 함경북도 온성군에서 북쪽으로 약 5km 지점에 위치)

연변지역은 19세기 후반부터 함경도 사람들이 땅을 일궜던 곳이다.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등 이른바 남선(南鮮) 사람들은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위해 망명한 사람들이거나 1920~1930년대에 집단으로 이주해 정착한 수백만의 빈농들이다. 이들 가운데 반 이상이 해방과 더불어 귀국했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중국공산당 정권 수립과 국경 폐쇄로 귀국의 기회를 놓친 채 중화인민공화국의 공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들은 대체로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지구, 용정지구, 도문지구 등에 집거하고 있다.

1992년 한·중 국교정상화 이후 연변지역 조선족 사회가 변화하고 있다. 특히 2000년대 이후부터 중국 전역으로 대대적인 인구이동이 일어나고 있다. 조선족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대련, 천진, 연태, 위해, 청도, 상해, 심천, 광주 등 대도시에 한국기업이 진출하면서 적게는 몇 만에서 많게는 수십만에 이르는 인구의 조선족 집거지가 형성됐다. 또한 노무현 정부 이후부터 한국에서 영주하거나 한국으로 귀화하는 조선족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 조선족이 떠난 연변지역의 경작지는 한족이 소작농 혹은 계약농의 직분으로 채우고 있다.

연변지역 조선족 사회가 변화하면서 조선족의 정체성도 흔들리고 있다. 그렇지만 조선족 집거지로서 한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몇몇 전통마을이 있다.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도문시 량수진에 위치하고 있는 정암촌(亭岩村)이 그중 하나이다. 정암촌은 1938년에 충청북도 청주군, 옥천군, 보은군, 충주군, 괴산군 등지의 농가 80여 호가 집단으로 이주, 정착하면서 생겨난 마을이다. 언어 및 생활습속을 동반한 집단이주였기에 8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한민족의 문화적 정체성이나 동질성을 삶의 근간에서 유지하고 있다.

정암촌 전경(2003년 마을 개량화 사업 이전)
정암촌 전경(2003년 마을 개량화 사업 이전)

충청도 농가 80여 호가 집단으로 이주해 새로운 마을을 개척

일제는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우리 강토의 토지수탈을 강화했다. 10년 만에 전체 경지면적의 80%가 일본인의 손으로 넘어갔다. 게다가 농민들을 착취하기 위한 또 다른 술책으로 산미증산계획을 추진했다. 수많은 농민들이 품을 파는 일 따위에 전념하는 임금노동자로 전락했다. 삶의 터전과 희망을 빼앗긴 이들에게 남은 건 몸뚱이뿐이었다. 그래서 고향을 떠날 수가 있었다. 새로운 터전, 새로운 희망을 찾아 산을 넘고 강을 넘었다. 1920년대 어느 겨울,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발걸음을 재촉하는 이들의 상황을 만주 야소교(耶蘇敎) 전문학교의 쿡(W. T. Cook) 목사는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만주에 오는 조선 사람들의 고통은 심지어 그들의 불행을 실제로 목격한 사람조차 완전히 묘사할 수가 없다. 겨울날 영하 40도의 혹한 속에서 백의를 입은 말 없는 군중은 혹 10여 명, 혹 20여 명, 혹 50여 명씩 떼를 지어서 산비탈을 넘어온다. …… 많은 사람이 식량 부족으로 죽었다. 부인이나 어린아이뿐만 아니고 청년들도 동사했다. 남루한 옷을 입은 여자들은 신체의 대부분을 노출한 채 어린아이를 등에 업고 간다. 그와 같이 업음으로써 조금이라도 체온을 나누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다리는 옷 밖으로 나왔기 때문에 점점 얼어붙어서 나중에는 조그마한 발가락이 맞붙어 버린다. 늙은이들은 굽은 등과 주름살 많은 얼굴로 끝날 줄 모르는 길을 걷다가 나중에는 기진맥진해 한 발짝도 옮기지 못한다. 노소강약을 막론하고 그들이 고향을 떠나오는 것은 모두 다 이 모양이다.”

동북지역은 잡초 우거진 황무지였다. 이주민들은 얼음 덮인 강을 깨고 들어가 봇둑을 막고 물도랑을 파며 황무지를 개척했다. 맨손으로 씨를 심으며 억척같이 낱알을 일궜다. 그래도 배고픔은 여전했다. 현지 관헌의 착취뿐 아니라 이따금 비적(匪賊)이 습격해 모든 것을 앗아갔다. 보장받을 수 없는 기막힌 삶은 낯선 땅에서도 변하지 않았다. 그래도 한민족 특유의 성실함으로 거친 황야는 밭으로 변해 갔다. 이주민들은 잊었던 꿈을 꿀 수 있었다. 그러나 백일몽에 지나지 않았다. 일제는 1931년에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동북지역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고향 떠나 일군 땅에 일제의 마수가 다시 드리운 것이었다. 심지어 동북지역을 중국 침략의 후방과 식량기지로 만들기 위해 강제이주정책을 수립했다.

정자바위(이 바위에서 조선의 개국공신 퉁두란[이지란;李之蘭]이 도술을 닦았다는 전설이 전승)
정자바위(이 바위에서 조선의 개국공신 퉁두란[이지란;李之蘭]이 도술을 닦았다는 전설이 전승)

정암촌은 이 무렵에 충북 사람들이 집단으로 이주해 개척한 마을이다. 이주민 대부분은 가난이 숙명이었던 사람들이었다. “만주에 가면 땅에는 쌀이 많고, 물에는 물고기가 씨끌씨끌하다. 조 이삭은 허리띠만큼 길고, 감자는 물동이만큼 크고, 콩알은 열 콩 알만큼 크고, 옥수수 이삭은 팔뚝 사리만 하고, 호박은 쪽지게에 질만큼 크고, 콩대는 지팡이를 만들어 짚고 다닐 정도이다. 3년간 농사지어 먹고 3년 후부터 공출하는데, 그 3년이면 회사 빚 갚고도 땅 사고 지주가 된다. 여기는 땅이 적으니 땅 많은 만주에 가서 네 농사지어 네 먹어라”라는 유혹은 잊힌 희망이었다.

희망을 좇아 청주군, 옥천군, 보은군, 충주군, 괴산군 등지의 농가 180호가 조치원역에 집결해 기차에 올랐다. 사흘 만에 함경북도 온성역에 닿았고, 그곳에서 두만강을 건넜다. 80호는 왕청현 춘방촌 서백림툰에, 100호는 왕청현 하마탕향에 정착했다. 왕청현 춘방촌 서백림툰은 1947년에 훈춘현 량수향에 귀속됐다. 1949년 충주군 출신의 서홍범 씨가 마을 서북쪽에 있는 정자바위의 이름을 따서 마을의 명칭을 정암촌으로 정했다. 해방 이후에 서백림툰 및 하마탕향에 정착했던 과반수의 이주민들이 귀국했다. 귀국의 기회를 놓친 서백림툰 이주 1세대 20여 명을 포함한 2∼3세대 및 정암촌으로 재이주한 하마탕향 이주민들의 후예가 오늘날까지 정암촌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다.

정암촌 사람들은 이국의 낯선 풍토 속에서도 한족문화에 동화되지 않았다. 정월 초에는 마을 전체가 마을신을 기렸고, 풍물패는 각 가정을 돌며 지신을 밟았다. 먹을거리를 나누어 먹고, 패를 나누어 집단놀이를 하는 등 고향에서 영위했던 삶의 방식을 고수했다. 농사가 한창일 때에는 두레가 마을을 한데 묶어 주었다. 농악무를 추고 고향의 노래를 부르면서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다짐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1966∼1976년)의 회오리를 피할 수 없었다. 전통을 버려야 했다. 그래도 ‘충청도양반’다운 꼿꼿한 기질로 모든 것을 버리지 않았다. 그래서 8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원주지의 문화적 정체성이나 동질성을 삶의 근간에서 유지하고 있다.

정암산성(정자바위에서 북쪽으로 400m 지점에 위치. 고구려 때 축조, 발해 때까지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 길이 2,800m의 장벽이 남아 있으며, 병영 유적, 통로, 요망대, 공동우물 등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음.)
정암산성(정자바위에서 북쪽으로 400m 지점에 위치. 고구려 때 축조, 발해 때까지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 길이 2,800m의 장벽이 남아 있으며, 병영 유적, 통로, 요망대, 공동우물 등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음.)

팔로군에서 인민군으로 전전해야 했던 어느 소작농의 아들

이용안(1928~2010)은 충청북도 청원군 강외면 동평리에서 태어나, 1938년에 부모를 따라 정암촌으로 이주했다. 이용안의 부친 이순화는 소작농이었다. 한때 거간꾼으로 일하기도 했지만 여의치 않아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소작농의 삶이야 다 그렇지만, 딸아이를 부잣집 첩으로 팔아버릴 만큼 생활고에 시달렸다. 게다가 지주 박가(朴家)의 착취가 심해 생산량의 70%를 소작료로 지불해야 했다. 또 그의 생일이나 명절이면 으레 돼지나 닭을 바쳐야 했다.

이순화는 호구지책으로 지주의 땅 아래쪽에 있던 습지에 쪽지게로 흙을 날라 두마지기의 논을 풀었다. 얼마 동안은 춘궁기에도 끼니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지주 박가는 경관과 밀담해 새로운 땅문서를 작성하고 두마지기의 땅이 자신의 소유라고 주장했다. 이제껏 경작한 3년여 연한까지 소급한 소작료도 요구했다. 지체 높은 지주였지만 이순화는 격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흥분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지주에게 항변을 하다가 지주를 따르는 머슴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1주일을 꼼짝없이 앓고 난 후, 이순화는 다시 지주를 찾았다. 때마침 농사일로 아무도 없던 터라, 지주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사당에 모셔져 있던 조상의 위패를 똥수깐에 던져 버렸다.

지주를 때려눕히고 조상마저 욕보였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다. 이순화는 피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만주에 가면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곧바로 ‘이민청구서’에 도장을 찍었다. 이순화는 처 성옥림과 차남 이용안을 데리고 만주로 향했다. 당시 슬하에 4남매를 두었는데 두 딸은 이미 시집을 간 터였고, 열세 살이던 장남 이용준은 큰댁에 맡겨졌다. ‘집안의 맏자식은 아버지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고향에서 글을 깨치고 고향을 지켜야 한다’는 믿음이었다.

정암촌의 풍물패(1994년 대보름 지신밟기)
정암촌의 풍물패(1994년 대보름 지신밟기)

이민 당시 이용안은 열 살이었다. “아버지는 저만치 앞서가고, 그 뒤를 어머니는 가며 먹을 떡 조금 하고 구차한 옷 꾸러미를 머리에 이고 나는 조그만 고추장 단지 요만한 것을 들고 따라 갔어요. 대단히 추워서 2월달에 들어갔는데 대단히 추웠어요.” 도주하다시피 떠난 이민이었기에 세간을 살필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조치원에서 온성으로, 다시 양수진으로 이어진 이들의 이주는 더 없이 춥고 배고팠다.

낯선 땅에 도착해 코야(일종의 움집)를 지었다. 그리고 너비4m×높이8m 가량의 토성을 쌓았고, 성 앞에는 1m 80㎝ 가량의 홀을 판 후 나무를 쌓아 올렸다. 토비들을 저지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그리고 처음 접하는 가대기(일종의 쟁기)로 땅을 일궈 감자, 콩, 옥수수, 조, 수수 등을 수확했다. 그럭저럭 집을 갖추고 밭을 경작한 지 8년이 흘렀다. 이용안은 어엿한 청년으로 성장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살기 위해 몸부림쳤던 소모적인 자신을 발견했다. “이주 전에는 서당에서 ‘하늘 천 따 지’ 그거 천자문을 배웠던 내가 아닌가! 그래 여기서 이렇게 아버지처럼 일만 할 수는 없다! 그래 학문하러 가자!”

이용안은 불쑥 향학열에 휩싸였다. 그래서 무작정 도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기차를 타고 목당강에서 내렸다. 얼마간 걸었을 즈음 우연히 ‘포병학교’라는 간판이 눈에 띄었다. ‘학교이니 공부하는 곳이겠다’는 단순한 생각에 입학을 요구했다. 그런데 그 요구가 순순히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포병학교는 팔로군(八路軍) 양성소였다. 팔로군은 원래 화베이[華北] 지방을 거점으로 일본군과 대항하던 중국공산당의 주력 부대였으나, 일본이 패망한 이후에는 토비들을 소탕하는 데 주력했으며, 한때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과 맞서기도 했다.

정암촌의 풍물패(1994년 대보름 달집태우기)
정암촌의 풍물패(1994년 대보름 달집태우기)

그토록 그리워했던 학교였건만, 이곳에서 마음껏 공부를 할 줄 알았건만, 느닷없이 군사훈련을 받고 팔로군이 됐다. 7년여 동안 무려 4~5천리나 되는 북길림, 사평, 료양, 안산, 무순, 상해관, 장춘, 심양, 천진, 북경, 항구, 남창, 광동 등지를 행군하며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런데 사선을 넘나들면서도, 이용안은 늘 글을 접했다. 하루에 한 자씩 익혀 제법 한족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됐고, 우리글도 쓸 수 있게 됐다.

하루는 남창에서 전투를 치르고 광동에 집결했을 때였다. “조선 사람들이 중국을 해방시키는 데 많은 노력을 했다. 이제 조선이 미제 때문에 더한 곤경에 빠졌다. 그러니 조선 사람은 조선으로 돌아가 전투에 임하라!”는 명령이 내렸다. 군의 명령 앞에서 이용안은 북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한국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을 때였고, 그의 나이 스물넷이었다. 이용안은 이제 고향에 총부리를 겨누어야 했다. 강원도의 깊은 골짜기를 구비구비 넘었으며, 충북 제천에 이르러 치른 전투에서는 동료들의 숱한 죽음을 지켜봐야 했다. 이렇게 남하, 남하, 남하해 경북 영주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이곳에서 날아드는 포탄에 맞아 쓰러지고 말았다.

며칠 동안 사경을 헤매다 깨어나 보니 병원이었다. 왼손 무명지 마디가 절단됐으며, 파편 무더기가 왼쪽 옆구리를 뚫고 척추에 박혀버렸다. 겨우 목숨은 건질 수 있었으나, 최전선의 전투에 임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래서 후방으로 이송되어 함흥 방어전에 투입됐다.

정암촌 이주 1.5세대(2006년, 이용안, 이종승 등)
정암촌 이주 1.5세대(2006년, 이용안, 이종승 등)

휴전 상태에 돌입한 후, 이용안은 1958년에 정암촌으로 돌아왔다. 기나긴 여정이었고, 그의 나이 서른이었다. 젊음을 통째로 바쳤건만 남은 것은 고단한 육체와 얼룩진 기억뿐이었다. 더구나 그에게 내려진 무공훈장은 고향에 총부리를 겨눈 대가의 포상이었기에 평생 동안 버거운 짐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잊고 정암촌 생활에 적응하려 했다. 신명옥(1937년생, 옥천군 안남면 현 수몰지구에서 이주)과 결혼한 이후에는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어린 아내였지만 사랑과 배려가 지극했다. 슬하에는 4남매를 두었다.

이용안은 한때 심리평 금창에 벌려진 ‘산판’에 뛰어들기도 했다. 그러나 척추에 박힌 파편 때문에 산 생활을 해야 하는 노동은 무리였다. ‘참패금(부상용사 보조금)’ 덕에 그럭저럭 삶을 영위할 수 있었지만 생활은 언제나 남루했다. 그렇지만 남다른 총기와 지도력으로 정암촌 사람들의 버팀목이 됐다. 특히 정암촌의 치보사업과 민정사업이 한창일 때 생산위원의 직분으로 정암촌의 발전을 앞장서 이끌었다.

이용안의 삶은 파란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고인(故人)이 됐다. 그가 여든을 바라보고 있던 때, 나는 그를 정암촌에서 만났다. 몸은 보잘 것 없이 스러져가고 있었지만 눈빛은 빛났다. “우리 고향 청원군 동평리에 아직 할아버지 산소가 있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늘상 나에게 ‘날 좀 한 번 데리고 가라’고 하셨어요. 설이나 추석, 청명 때면 아버지 살아생전에 소원을 들어주지 못한 게 더 한이 됩니다. 구차한 삶이 속상하기만 했지 뭐 딴 방법이 있었겠습니까? …….” 이용안의 가슴에는 ‘아버지의 향수, 그 고향의 향수’가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필자소개
안상경 한중문화콘텐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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