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기고] “조지아에선 우크라이나 난민에 식비와 택시비 받지 않아”
[해외기고] “조지아에선 우크라이나 난민에 식비와 택시비 받지 않아”
  • 이광복 조지아한국언어문화재단 이사장
  • 승인 2022.03.01 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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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러시아가 조지아도 침공… 그 후 10년 간 경제 성장 정체

“며칠 전 러시아 푸틴은 몇 개월 전부터 국경 부근에 집결시킨 군대를 이끌고 소비에트연방 당시 두 명의 서기장을 배출한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현재 푸틴의 몸은 크렘린에 있겠지만 검게 안달 난 그 마음은 키예프에 있으리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보며 2008년 조지아를 떠올렸다. 당시 러시아는 조지아를 침공했다.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

러시아의 조지아와 우크라이나 침공은 크게 세 가지 공통점이 있다. 두 나라 모두 과거 구소련 국가였고 소연방 독립 후 장미와 오렌지 혁명을 거쳐 친서방 EU 가입을 국가 목표로 삼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중국에서 열린 올림픽 기간 중에 러시아 침공이 이뤄졌다는 점도 우연히도 같다.

2008년 8월 8일 러시아와 조지아 간 전쟁이 일어났을 때도 중국 북경에서 하계올림픽이 막 개막했을 때였다.

필자는 이 소식을 조지아에 있는 회사의 창고사무실에서 들었다. 북경올림픽 개막 방송을 보며 직원들과 웃고 떠들던 중에 개전 소식이 방송됐다. 조지아의 미하일 사캬슈빌리 대통령이 TV에 나와 러시아와의 개전을 선포했던 것이다. 느닷없는 소식에 올림픽 기간인데 이건 뭐지 했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당시 러시아는 남오세티야에 평화유지 목적으로 주둔한 자국 군대를 조지아 군대가 먼저 공격했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그럴듯한 명분을 전 세계에 공표하며 조지아를 침공했던 것이다.

그때 러시아와의 국가 이익이 연결되어 있는 나라들은 대부분 러시아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 같은 모습에 세계는 힘과 비이성에 끌려다닌다는 생각을 조지아에 머물면서 떠올렸던 기억이 있다.

전쟁은 내게도 남 일이 아니었다. 이틀 뒤 새벽 4시경 집과 제법 떨어진 뒷산 레이다 기지에 폭탄이 떨어졌던 것이다. 섬광이 용수철처럼 일어나 퍼지는 바람에 앞마당으로 뛰쳐나와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했다. 대폭발은 섬광-폭발음-대지의 흔들림으로 이어지는 것도 이때 경험했다. 그 일 이후 수개월 간 집 앞 도로를 지나는 트럭 소리에도 가슴을 벌렁거린 기억도 있다.

이런 걸 외상증후군이나 트라우마라고 한다. 후방에서도 그런데 실제 전장을 경험한 사람들의 상처가 얼마나 클지 이해가 됐다. 6.25를 경험한 우리 할아버지 부모님 세대의 트라우마도 컸을 것이다. 이것을 이기고 오늘의 대한민국을 이룬데 무한한 존경심을 느낀다.

조지아의 자연경관

폭탄이 떨어진 날 오후 러시아 육군이 트빌리시 북쪽의 남오세티야 쪽으로 밀고 내려왔다. 조지아 영토를 침범하여 수도인 트빌리시 외곽 30-40km 지점까지 밀고 들어왔다. 공군은 필수 시설들을 폭격했다. 이로 인해 군인들과 민간인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다.

기대한 서방세계의 도움은 없었다. 조지아는 군사력에 압도되어 개전 5일 만에 러시아에 항복했다.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의 중재에 따라서였다. 조지아가 2003년 ‘장미혁명’이래 친서방 노선을 택하며 서방의 지원으로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야를 회복하려던 계획은 이로 인해 물거품이 됐다. 러시아군에 의해 보유한 모든 무기는 못쓰게 됐고, 영토의 20%를 상실했다.

조지아는 항복한 이후 러시아의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유럽연합(EU) 가입을 생각했다. 주권, 국민, 영토 수호를 위한 것이었다.

당시 조지아가 잃은 건 영토만이 아니었다. 조지아 같은 나라들에는 외국인의 투자가 절대적으로 중요한데, 전쟁 이후 투자 계획들이 대부분 취소되거나 무기한 연기되었다. 뒤이어 러시아에 우호적인 세력이 집권했다. 러시아의 침공이 만든 결과였다.

그 여파로 조지아는 긴 정체의 길에 접어들었다. 경제 성장과 국민소득에서 지난 십여 년 발전이 거의 없었다. 2003년 11월 구소련 독립국 중 장미혁명(Rose Revolution)이란 최초의 무혈혁명을 성공시키고, 뿌리 깊은 부정부패를 극약처방으로 척결하며 외국인 투자의 전면 개방과 안정적인 경제 성장을 구가하던 행보가 일시에 좌초하고 만 것이다.

약소국에게 전쟁의 대가는 영토만 잃는 게 아니다. 당시 조지아의 혁명 성공은 세계의 모범으로 역사에 남을 유산이지만, 소비에트와의 질긴 악연으로 지금까지 방해 받고 있는 것이다.

조지아 교민의 한 사람으로서 러시아의 이번 우크라이나 침공도 남 일 같지 않은 게 사실이다. 미국을 위시한 친서방 진영의 대러시아 제재가 본격화되면 당장 조지아 우리 교민들의 삶에도 엄청난 불편과 피해가 오게 될 것이다.

대부분의 동유럽과 구소련 나라들에 진출한 러시아 은행들에 은행 계좌를 갖고 있는 한국인과 기업들은 은행을 바꿔야 할 것이다. 돈을 받고 내보내는 은행 송금이 거부될 확률이 크기 때문이다. 요즘 세상에 돈줄이 막히는 것보다 더한 불편이 있을까? 아무쪼록 정교한 핀셋 제재로 주변 애꿎은 나라들에 영향이 최소화되길 바랄 따름이다.

세계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노골적인 주권 침범을 막지 못한다면, 조지아가 다음 타겟이 될 공산이 크다. 육로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흑해 항구들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지아에는 작년 말부터 미리 전쟁을 우려해 우크라이나를 떠나 조지아로 잠시 거처를 옮긴 우크라이나인들이 있다. 지금 조지아 사람들은 그들한테 택시비, 호텔비, 식당비를 받지 않고 있다. 조지아 시민들의 자발적인 연대의 표현인 셈이다.

조지아 거리의 건물과 전광판에는 두 나라의 국기가 나란히 걸려 있고 ‘디데바 우크라이나’(우크라이나에 영광을)라고 적혀 있다.

힘에 의존하는 국가 관계가 이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바뀌었으면 한다. 세계 윤리와 도덕에 기준이 잡히길 바란다. 러시아 국민들에게는 전쟁 반대를 촉구하며, 약소국 국민들의 생명 건강 인권도 보호받아야 한다는 가치에 대한 전 세계적 선언이 이루어지길 바래본다.

필자소개
현 조지아한국언어문화재단 이사장
조지아한인회장, 월드옥타 트빌리시 지회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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