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만주⑰] 용정 3.13반일의사릉: 만주에서 울린 그 날의 함성을 기억하다
[아! 만주⑰] 용정 3.13반일의사릉: 만주에서 울린 그 날의 함성을 기억하다
  • 안상경(한중문화콘텐츠연구소장)
  • 승인 2022.03.11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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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삼성으로 불리는 중국 만주에는 우리 독립운동 사적지가 곳곳에 있다. 의병운동, 민족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등 독립지사들의 고민과 피가 어린 곳들이 도처에 있다. 이들 사적지를 시리즈로 소개한다.(편집자주)

3.13만세운동(1919년 3월13일, 용정 서전대야)[사진=규암 김약연 기념사업회]
3.13만세운동(1919년 3월13일, 용정 서전대야)[사진=규암 김약연 기념사업회]

1919년 3월1일,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그러고는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외쳤다. 함성 속에는 자유에 대한 갈망이 녹아 있었다. 그래서인지 독립의 함성이 두만강을 건너 만주지역에도 전해졌다. 북간도에서도, 서간도에서도, 그리고 더 멀리 연해주에서도 태극기가 휘날리며 만세의 함성이 퍼져 나갔다.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외침밖에 없었지만, 그렇게라도 식민지의 백성에서 민주공화국의 국민으로 스스로를 일으켜 세웠다. 결과 1919년 4월11일,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할 수 있었으며, 나아가 중국의 5.4운동, 인도의 반영운동, 베트남·필리핀·이집트의 독립운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3.1운동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가장 대표적인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매년 3월1일을 기해 국가 차원에서 기념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그런데 북간도의 용정에서도 매년 3월13일을 기해 조선족 차원에서 기념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2020년 3월 어느 날, 서간도에서 활동했던 항일투사의 후손들과 함께 용정을 찾았다. “이맘때 바람에는 소 대가리도 깨진다”라는 속담이 전해지고 있을 만큼 봄바람이 강했지만, 3.13반일의사릉에서 우리들만의 추모의식을 조촐하게 치렀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3.13기념사업회 리광평 회장이 그간의 선양사업에 대해 포문을 열었다. 대동단결과 통합, 그리고 자유를 갈망했던 그 날의 정신이 북간도에서도 오래도록 계승될 것 같다.

제103주년 3.1절 기념행사(2022년 3월1일, 서울 서대문구 국립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관)
제103주년 3.1절 기념행사(2022년 3월1일, 서울 서대문구 국립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관)

“1989년에 노인들의 증언을 통해 이곳을 확인했습니다. 처음에는 14기가 있었는데 현재는 13기가 남았습니다. 봉분들은 모두 1990년에 복원한 것입니다. 그리고 해마다 3월13일에 이곳에서 대중들 수백 명이 참여하여 추모제를 진행합니다. 이제 30년이 넘어 갑니다. 그다음 날인 14일에는 시민 군중을 조직하여 3.13반일운동 유적지를 답사합니다. 제일 처음에는 집회장 자리, 다음은 시위대가 걷던 길을 따라 걷고, 유혈사건이 발생했던 장소에서 당시를 회고하고, 그 다음에는 간도일본총영사관, 그리고 이곳으로 옵니다. 또 언제라도 자발적으로 와서 경배를 올리고 묵념도 하고 추모활동도 합니다. 3.1운동이나 3.13운동이나 목적이 같기 때문에 한국분들도 용정에 오면 다들 여기를 찾아옵니다.”

국내는 물론 연해주와 북간도에서 만세운동을 동시에 전개할 계획

국사편찬위원회가 공개한 〈3.1운동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1919년 3월부터 4월까지 1,600여 회에 달하는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참여한 인원은 백만 명이었다. 이 중 1,000여 명이 희생되었고, 5만 여 명이 투옥되었다. 이 엄청난 희생, 그 자체가 3.1운동이 추구한 자유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3.1운동은 국내에서만 준비한 것이 아니었다. 거족운동(擧族運動)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만주지역의 한인 사회에서도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만주지역의 지도층 인사들은 블라디보스토크, 상해, 동경, 그리고 국내로부터 세계대전의 종식과 국제질서의 개편 소식을 접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국내외 한인사회와 만세운동의 공동 실현을 조율하고 있었다.

요녕성 선양시 항일투사의 후손들(의병장 이진룡 장군의 처손자 우승희, 조선혁명군 총사령 양세봉의 외손녀 김춘련, 조선혁명군 지하통신원 김도선의 손자 김용걸, 국민부 재정국 관원 박석구의 아들 박창원, 광주 황포군관학교 제6기 졸업생 전병균의 아들 전정혁 등)
요녕성 선양시 항일투사의 후손들(의병장 이진룡 장군의 처손자 우승희, 조선혁명군 총사령 양세봉의 외손녀 김춘련, 조선혁명군 지하통신원 김도선의 손자 김용걸, 국민부 재정국 관원 박석구의 아들 박창원, 광주 황포군관학교 제6기 졸업생 전병균의 아들 전정혁 등)

그중에서도, 북간도가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지로 한 연해주와 연계하는 데 주력했다. 예컨대 1919년 1월 초, 연길현에서 북간도의 독립운동가들이 기독교 대전도회를 명분으로 모여 만세운동을 계획했다. 핵심은 국내외에서 만세운동을 동시에 전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연해주에 김약연(金躍淵)을 파견했고, 국내에 강봉우(姜鳳羽)를 파견했다. 김약연은 연해주에 모인 국내외 인사들과 독립선언서의 내용 및 선포 방법을 협의하는 한편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할 대표단을 인선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강봉우는 함경남도 함흥에서 영생학교(永生學校)를 중심으로 한 만세운동의 추진과 후속 활동을 협의하고 돌아왔다.

2월 중순에는 연길현 하장리 박동원(朴東轅)의 집에서 북간도의 독립운동가들이 비밀리에 다시 모였다. 이 자리에서 북간도의 모든 단체가 협력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 용정에서 독립선언서를 선포하고 만세운동을 개시할 것을 결의했다. 여기서 모든 단체라 함은 기독교, 천주교, 대종교, 공교회 등으로 그 지도층과 협력하여 신도들은 물론 친지들까지 참여를 독려하자는 것이었다. 또 독립선언서의 선포라 함은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를 기반으로 조선의 독립을 공표하고, 그 당위성을 만세로써 절규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곳이 용정인 까닭은 한반도를 넘어 전 중국 침략을 위한 본거지로서 간도일본총영사관이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3.13반일의사릉 제1단계 복원(1990년)
3.13반일의사릉 제1단계 복원(1990년)

각 학교의 학생들도 만세운동에 참여할 준비를 갖추어 나갔다. 심지어 보조적인 참여자가 아니라 주도적인 참여자로 나서고자 했다. 먼저 명동학교의 유익하(劉益賀), 국가자 도립중학교의 최웅열(崔雄烈), 김필수(金弼守), 광성학교의 김호(金豪), 정동중학교의 송창문(宋昌文) 등 5명이 북간도의 학생대표로서 만세운동의 참여 방안을 논의했다. 그리고 각 학교마다 조선 독립의 정당성에 대한 연설회를 개최하여 학생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했다.

그런데 3월7일, 국내에서 만세운동이 발발했다는 소식과 함께 독립선언서가 전해졌다. 국내외에서 동시에 전개하기로 한 계획은 어긋났지만, 이를 계기로 자체적인 만세운동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이에 3월13일, 용정촌의 서전대야(瑞甸大野)에서 조선독립축하회(朝鮮獨立祝賀會)를 겸하여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은진중학교 지하실에서 독립선언서 및 조선독립축하회 개최 통지서를 복사하고 북간도 전역의 한인 사회에 전달했다. 무엇보다 이 날의 기치를 위해, 그 누구라도 태극기를 지참하도록 당부했다. 대엿새 만에 이루어진 기적이었다.

3.13반일의사릉 제2단계 복원(2000년 이후)
3.13반일의사릉 제2단계 복원(2000년 이후)

1919년 3월13일 정오, 서전대야에 울려 퍼진 조선독립만세의 함성

1919년 3월13일, 드디어 날이 밝았다. 벌판에서 불어대는 모래바람은 거셌다. 그럼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태극기를 손에 쥐고 모여들었다. 혹자는 2백리가 넘는 벽촌에서 하루 전에 출발했다. 80리나 떨어진 정동학교 학생들도 하루 전에 출발했다. 30리 밖의 명동학교 학생들은 이른 아침부터 악대를 앞세워 출발했다. 용정의 은진중학교를 비롯하여 동흥중학교, 대성중학교 학생들도 서전대야로 향했다. 이날 모인 군중이 얼마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다만 국학자 계봉우(桂奉瑀)가 〈간도 그 과거와 현재〉에서 3만 명으로 회고하고 있으며, 만세운동을 제지한 길림성장 곽종희(郭宗熙)의 〈밀자(密咨)〉에서는 2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12시에 교회당에서 종이 울렸다. 조선독립축하회의 개최를 알리는 신호였다. 중앙 무대에는 ‘대한독립(大韓獨立)’과 ‘정의인도(正義人道)’라고 새긴 두 기의 커다란 깃발이 나부꼈다. 배형식(裵亨湜) 목사의 개회 선언에 이어 대회장 김영학(金永學)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그리고 애국지사 유례균(劉禮均), 배형식(裴亨植), 황지영(黃志英)이 일제의 만행을 성토하는 연설을 차례로 했다. 본행사가 끝나자 조선독립만세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당시 상황을 김정규(金鼎奎)의 일기(1919년 음력 2월13일)에서 확인할 수 있다.

3.13반일의사릉 표지석(용정시 중점문화재보호단위, 1994년 5월4일 용정시 인민정부 공포)
3.13반일의사릉 표지석(용정시 중점문화재보호단위, 1994년 5월4일 용정시 인민정부 공포)

“갑자일이다. 간도의 한민족이 용정에 모여 독립을 부르는 날이다. 우리 마을에서도 참여하는 사람이 10여 명이나 되었다. 나는 부친 상중이라 감히 갈 수 없어 아들에게 태극기 하나를 들려 보냈다. 이날 이날 이날, 과연 광복이 되는 날인가? 사람마다 어찌 이렇게도 화색이 짙은가? 저녁 때 들으니 사방에서 인사들이 소식을 듣고 모여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정오 종소리에 맞춰 용정 부근 서전대야에 큰 조선독립 깃발을 세우고 사람마다 태극기를 들고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며 독립을 선언했다. 깃발은 해를 가리고 함성은 우레와 같았다. 이를 본 왜인의 얼굴색이 잿빛으로 변했다.”

군중은 시위에 돌입했다. 명동학교와 정동학교 학생들로 구성한 300여 명의 충열대(忠烈隊)가 선두에 섰다. 그러나 일제가 도외시할 리 없었다. 일제는 중국에 압박을 가하여 맹부덕(孟富德)이 이끄는 50명의 정규군을 연길에서 용정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간도일본총영사관에 이르러 가두시위가 격화되자 선두의 깃발을 빼앗고, 군중을 향해 무차별로 발포했다. 순식간에 13명이 즉사했고, 30여 명이 중상을 입었다. 급히 영국더기(영국의 조계지, 용정 안의 작은 영국 땅)의 제창병원으로 부상자를 옮겼지만, 치명상을 입은 4명이 숨을 거두었다. 닷새 후 3월17일, 5천 여 명의 애도 속에서 이들의 유해를 합성리(合成里) 언덕에 안장했다.

3.13 만세운동 추모제(1990년 이후 매년 3월13일을 기해 추모제 거행)
3.13 만세운동 추모제(1990년 이후 매년 3월13일을 기해 추모제 거행)

그날의 함성과 비보가 만주 전역으로 퍼졌다. 북간도에서만 5월 중순까지 54회에 달하는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참여한 인원은 75,500여 명이었다. 당시 북간도에 거주하고 있던 한인의 인구가 25만 명이었음을 감안할 때 36%에 해당하는 수치이다. 그런데 그 날의 참상은 만주지역 항일운동의 성격을 바꾸어 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한인들은 비무장 상태에서 무참히 스러졌다. 무장투쟁만이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그리고 이는 곧 독립전쟁으로 이어졌다. 이듬해 1월 새벽, 용정 인근에서 발생한 15만원 탈취도 무장의 필요성에 대한 자각에서 출발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용정 3.13반일의사릉에 와 닿는 한·중 추모객들의 발걸음

용정시에서 동남쪽 방향 약 10여 리에 3.13반일의사릉이 위치하고 있다. 용정시 인민정부에서 중점문화재보호단위로 지정했으며, 연변지구의 홍색교육 기지로도 각광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묘역이 처음부터 조성된 것은 아니었다. 3.13반일의사릉 터는 원래 용정 기독교인의 공동묘지였다. 1919년 3월17일, 순국한 지 닷새 만에 희생자들을 급히 안장하느라 이곳으로 모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후 간도일본총영사관이 특무를 잠복시켜 누가 와서 참배를 하는지 감시케 했다. 하여 후손조차 감히 찾아들지 못했다. 그렇게 만세운동의 희생자들이 기억에서 잊혔고, 묘소는 묵묘가 되었다.

용정 3.13기념사업회 리광평 회장
용정 3.13기념사업회 리광평 회장

1989년 10월, 7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용정시 대외경제문화교류협회 고(故) 최근갑 회장이 합동조사반을 꾸렸다. 조사반은 3.13 만세운동의 현장을 기억하는 최원악(崔元岳), 방창화(方昌化), 박응삼(朴應參) 등 고노들로부터 3.13 만세운동에서 희생당한 의사들을 합성리 공동묘지에 안장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1990년 4월에 용정 3.13기념사업회를 발족하여 복원사업을 추진했다. 먼저 봉분을 정비하고 “3·13반일의사릉”이라 새긴 목조 비석을 세워 추모제를 지냈다. 1993년 4월에는 목조 비석을 화강암 비석으로 대체했다. 이듬해에는 용정시 인민정부도 공조하여 3·13반일의사릉을 용정시의 중점문화재보호단위로 지정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제2단계 성역화 사업을 추진했다. 1,300㎡의 토지를 매입하고, 구역 안에 있는 남모를 이들의 묵묘를 이장했다. 그리고 주변에 100여 그루의 소나무를 심고 바닥에는 잔디를 깔았다. 공간이 넓어진 만큼 200여 명이 동시에 참여할 수 있는 참배공간도 마련했다. 현재 용정 3.13기념사업회는 용정시 문화관장을 역임한 리광평 회장이 이끌고 있다. 팔순이 다 되어 가지만 복원사업만큼은 그 어떤 청년 못지않게 열정적이다. 3.13반일의사릉의 선양은 물론 서전서숙(瑞甸書塾), 명동학교(明東學校), 은진중학(恩眞中學), 15만원탈취사건(15萬元奪取事件), 장암동참안사건(獐岩洞慘案事件), 5.30폭동지휘부(5.30暴動指揮部) 등 한민족의 지난했던 발자취를 좇아 복원하는 데 여념이 없다. 왠지 가슴 한켠이 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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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경 한중문화콘텐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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