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46] 60년대 초 북한우표 분석하기
[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46] 60년대 초 북한우표 분석하기
  • 송광호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고문
  • 승인 2022.04.05 09:52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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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어떻게 바뀌어왔으며, 또 어떻게 변화해 갈 것인가? 1989년 이래 북한을 8차례나 방문해 취재한 송광호 토론토 주재 언론인이 방북 때마다 보고 느낀 점들을 시리즈로 정리했다. ‘바뀌어온 북한’에 초점을 맞춘 이 글은 현재와 같은 남북경색국면에서 긴 눈으로 북한의 새로운 변화를 조망하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편집자주>

지난달 해방 후 발행된 태극기 관련 우표를 찾다가 다른 한 북한우표를 발견했다. 70년대 토론토로 가족이민 후 나는 국가별 세계우표를 수집하고 있었다. 그간 모은 우표가 1천 장을 훌쩍 넘은 뒤부터 더 숫자를 세지 않았다. 다만 북한우표만은 1946년부터 연도별로 모았다. 시대(연대)별 우표들은 북한역사공부에도 좋은 참고가 됐다.

오랜 세월 수집한 세계 우표들은 2014년 강원도 양구 소재 근현대사 박물관에 전부 기증했다. 주로 러시아와 일본, 쿠바에서도 북한우표가 발견됐다. 수집한 우표 중에는 세계 최초우표(영국)와 미국, 캐나다 등 희귀한 우표들도 포함됐다.

우연히 눈에 띈 그 북한우표는 일반우표와 형태가 좀 달랐다. 어느 기념적인 내용이나 사물형태를 나타낸 게 아니다. 일반 노동자 옆에 글씨조항만이 적혔기 때문이다. 우표제목이 ‘20개 조 정강’이다. 지난 1961년 발행된 10전짜리 우표(첨부)다. 북한 초기(1946년-1961년) 국가 20개 정강 중 1-2조 일부가 겉면에 담겼다.

북한 ‘20개 조 정강’ 자료를 뒤졌더니, 평소 모르던 흥미로운 내용이 보였다. 북한규정이라고 단정하기엔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러한 우표도 일종의 북한역사로 볼 수 있다. 61년 당시 우표에까지 공개한 20개 정강조항이 마치 한국정부 규정처럼 겹쳐 보였다. 대표적 조항 몇 개를 소개한다.

먼저 1961년 북한우표에 나타난 1, 2 조항부터 살펴보자. 1-2 조항은 북한의 기본적 문구지만, 3 조항부터는 남북차이가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북한 <20개 조 정강> 일부 우표조항(1-2부).
1. 조선의 정치, 경제생활에서 과거 일본통수 일정 잔여를 철저히 숙청할 것.
2. 국내에 있는 반동분자와 반 민주주의적 분자들과의 무자비한 투쟁을 전개하며, 파쇼 및 반 민주주의적 정당, 단체, 개인들의 활동을 절대 금지할 것.
3개 조 정강부터는 현재의 북한 사회내용과는 다르다. 특히 ‘3개-6개 조, 10개 조 정강’ 등 최소 5개 정강은 마치 남한법령을 옮겨놓은 듯 닮았다. 북한은 진작부터 언론, 출판, 집회자유가 허용 안 되는 사회 아닌가. 아래 조항(3조-6조)들을 살핀다.
3. 전체 인민에게 언론, 출판, 집회 및 신앙의 자유를 보장시킬 것. 민주주의적 정당, 노동조합, 농민조합 및 기타 제 민주주의적 사회단체가 자유롭게 활동할 조건을 보장할 것.
4. 전 조선인민은 일반적으로 직접 또는 평등적으로 무기명투표에 의한 선거로서 지방의 일체 행정기관인 인민위원회를 결성할 의무와 권리를 가질 것.
5. 전체 공민들에게 성별, 신앙 및 자산의 다소를 불구하고 정치, 경제, 생활 제 조건에서의 동등한 권리를 보장할 것.
6. 인격, 주택의 신성불가침을 주장하며 공민들의 재산과 개인의 소유물을 법적으로 보장할 것.
10. 개인의 수공업과 상업의 자유를 허락하며 장려할 것.
20개 정강 중 14 조항에는 이런 내용도 있다. 14. 노동자와 사무원은 8시간 노동제를 실시하며 최저임금을 규정할 것. 13세 이하 소년의 노동을 금지하며, 13세부터 16세까지 소년들에게 6시간 노동제를 실시할 것이다.

이 북한에서 선언한 초창기 <20개 조 정강>이 그때 북한사회에 그대로 실시됐는지는 모르겠다. 나중 결과를 보면 부정적인 판단이 앞선다.

1961년 북한우표를 살피다 옆 1963년 “우리는 행복해요”라는 내용의 우표가 눈에 띄었다. 나는 ‘아하, 북한은 이즈음부터 북한 전역에 <우리는 행복해요>, <세상에 부럼 없어라>라는 등 구호를 본격화 선전했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 선전구호 간판은 근 30년 후까지도 평양 곳곳 건물과 사무실 내부 간판(첨부)등에 걸려 있었다.

북한은 지난 1950-60년대까지 남한과 경쟁적인 사회건설과 경제복구 경쟁에서 앞섰다는 말이 있다. 당시 남한 형편은 무척 고된 삶의 시대 상황이었다. 아마 70년대 초반까지 남북한 국가재정이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는지 모르겠다. 북한은 50년대부터 일본 조총련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해 조선학교 초교부터 대학교까지 만들었다. 북한에서 먼저 컬러TV가 대중에 나왔고, 70년대 지하철 개통도 남쪽보다 1년 앞섰다.

예전 북한은 늘 케케묵은 선전구호가 있었다. 남한과 달리 깡패나 창녀 등이 존재치 않는 사회, 김일성 수령복을 맘껏 누리는 행복한 나라라고 자랑했다. 89년 첫 방북 시 평양거리 간판에도 보였다. 북한이 국가재정이 급속도로 기울기 시작한 건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일명 평양축전) 이후부터이다. 이때부터 북한경제는 내리막길로 치닫기 시작했다.

김일성 주석 사망 전후 해인 1990년대 말, 20세기가 저물 때까지 북한은 위기에 봉착한다. 옛 ‘고난의 행군’ 시기를 다시 극복해야만 했다. 마침 당시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이 도움이 됐고, 다시 김정일 정권은 기사회생의 길에 들어선다.

이미 한번 언급한 내용이나 다시 그 80년대 말 시절을 돌아본다. 김일성 주석은 89년 여름 평양축전참가를 위해 몰려온 수백 명의 해외교포들을 통 크게 맞았다. 김 주석은 “외국에 나가 고생들 하는 우리 조선동포들, 모처럼 이번에 조국을 방문했으니 편히 쉬다 가라”고 무료체류기회를 공개화했다.

임수경 취재

홀로 기자호텔(평양호텔)에 체류한 나는 다른 서산호텔에 단체로 묵은 미주교포들 소식을 몰랐다. 그러나 본래 체류 일정을 변경, 연장한 교포는 없었던 것으로 안다. 나는 속으로 ‘언제 평양에 또 오겠나. 무료라니 이 기회에 며칠 더 머물자’고 안내원에 전했다. 북경-평양 간 왕복 항공기는 1주일에 두 번 운항한다. 나는 다음 1주일 뒤로 기일을 연기했다.

내가 평양에 더 머물면 안내원, 그 위 책임지도원, 운전기사까지 3명이 함께 움직여야 한다. 나로 인해 그들 가족생활 등에 폐를 끼친 셈이다. 그런데도 당시 나는 상대방 형편을 이해 못 하고, 내 생각대로만 했다. 어쨌든 체류기일이 며칠 연장되면서 시간 여유가 생겼다.

그 평양체류연장 때 나는 예상치도 못한 외조모 가족을 만나게 된 것이다. R책임지도원은 내게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기자선생은 조국에 가족이 전혀 없소?” “아버지 쪽은 강원도 ‘회양’ 대지주로, 전부 남으로 내려왔고, 어머니 쪽은 강원도 ‘이천’으로, ‘거기엔 조모친척이 살고 있을 겁니다. 한국에는 경기도 이천은 알아도, 강원도 이천은 몰라요.” 나는 필요 없는 말까지 덧붙였다.

“아, 그렇소? 강원도 ‘이천’이라고? 좀 더 자세히 말해보오.” “어머니는 형제 없는 외동딸로 서울에서 살았어요. 내가 해방 다음 해 서울에서 태어나자 외조모는 나를 돌본다고 이천에서 38선을 넘어 딸(어머니)네 집에 왔지요, 외조모는 고향에 오빠가 2명 있었다 해요. 내가 70년대 캐나다로 이민하기 전까지 외조모와 둘이 서울에서 살았지요. 늘 고향친척 얘길 들었어요. 지금은 조카만 남았을 겁니다. 조카 이름이 장 모라던데. 이천 산골짜기 동네인데 ‘가래을 마을’이라 부른대요.”

“장 모? 조카 나이는 아시오?” “몰라요. 아마 60여 세쯤 됐겠지요.” R책임지도원은 “이천은 말이요. 내 친한 동무가 그곳 책임자요. 예전 나도 한번 가본 적이 있소”라고 말을 끝냈다. 대화는 그것뿐이다. 나는 그에게 외조모 조카노인을 찾아 달라 부탁하지도 않았다. 친척 족보상 가깝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해외이산가족 신청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틀 후 아침이다. R 책임지도원은 내게 전화로 호텔로비로 내려오라 했다. R은 나를 흘끗 보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돌렸다. “아, 알겠소. 그런데 그 동무는 당원이요?”하고 묻는 소리를 들었다.

직감적으로 이천군과 통화 중임을 알았다. 조카노인을 찾았다는 느낌이 금세 왔다. 세상에… R은 곧 내게 사실대로 알려줬다. 조카노인을 찾았으니, 만나겠냐는 것이다. 물론이다. 그때 딱히 다른 계획도 없었고, 당연히 만나겠다고 했다.

당시 친척을 찾아줘 고맙다는 인사조차 한마디도 못 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후회막심하다. 그의 성이 R이라는 것과 44년생 개성 고아 출신이란 것만 기억된다. 생각지 못한 친척상봉으로 무척 당황은 했지만, 그의 무슨 방법이든 감사를 표시해야 했다. 그러지를 못했다. 사실 첫 방북 길에 오를 때다. 갑자기 외조모 생각이 나서 혼자 눈물을 펑펑 쏟던 기억이 난다. 아, 외조모가 그리 가고파 하던 북한 땅을 드디어 내가 밟는구나 하는 감격에..

R지도원은 “좋아요. 이미 만남약속을 조직해 놓았소. 시간상 강원도 이천까지는 못 가오, 내일모레 낮에 사리원(황해북도)에서 만나기로 했소. 아침 일찍 차로 떠납시다.” 이렇게 해서 사리원 한 호텔에서 외할머니(조모) 조카노인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는 두 아들과 함께 나타나 마침내 깜짝 상봉의 기회를 가졌다.

이후 나는 방북취재기회마다 조카노인과 그 친척들을 만났다. 평양에서, 원산에서, 사리원 등지에서 만났다, 만날 때도 별 도움을 주지 못했다. 1인당 3백 달러도 당시 내겐 거금이었다. 처음 만날 때만 노인가족이 3명이었지, 그 후엔 6-7명으로 점점 늘고 있었다,

그때 어쨌든 캐나다은행에서 돈을 빌려서라도, 북한친척 후원금을 마련했어야 했다. 가까운 친척이든, 먼 친척이든 아무렴 어떠랴. 일단 혈육인연을 맺은 그들은 내게 무척 기대가 컸다. 경제적으로 너무 못살기 때문이리라. 친척에 도움을 못 준 과거 일이 정말 후회스럽다. 그동안 남을 배려 못 하고 세상을 살아온 탓이 크겠다.

내가 새삼 이산가족 사연을 밝히는 이유가 있다. 지난해 11월 방한 중 잠깐 만났던 탈북자 김련희씨 경우 때문이다. 김 씨는 10여 년 전 한국에 잘못 입국해, 오늘까지 잠 못 이루는 세월을 보냈다. 남쪽 땅에서 기약 없는 북한송환의 꿈을 그리며, 늘 출국금지 상태로 고향 평양하늘을 그린다.

나는 토론토 귀환 후 국내외 지인들을 통해 ‘김련희 고향송환’에 나름대로 신경을 썼다. 그때 지식층인 지인들은 이구동성 이런 말을 했다. “그래요, 인권국인 한국정부에서 김련희를 안 놓아주는 건 정말 잘못이네. 그러나 지금 정부가 어떤 정권인가. 진보 좌파정권 아닌가. 그런데도 끝내 그 여자를 붙잡고 있지 않나. 차라리 주사파 정권실력자들을 통하는 게 빠를 것이네.”

한 가지 더 한국정부에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 아직 대한민국에 남아있는 11명의 비전향장기수들도 속히 북한으로 송환했으면 하는 소망이다. 남한에서 수십 년 감옥살이를 통해 그들 나이가 대부분 90세를 넘었다. 예전 과거처럼 고령의 장기수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개인의견이지만 이 문제는 박근혜, 이명박 대통령사면 건보다 진작 먼저 다루어졌으면 했다.

지난 1993년 김영삼 정부 때 장기수의 첫 북한고향 송환 작업이 비롯됐다. 그때 리인모 비전향장기수 1명 송환을 시작으로, 2000년 김대중 정부시기엔 무려 63명의 비전향장기수들을 판문점을 통해 돌려보냈다. 북에서는 국군포로들과 KAL 납북자 등을 수십 년간 그대로 억류시키며 모른 채 해 왔지만, 대한민국은 통 크게 진정한 동포애를 발휘했다.

그게 남과 북이 구별되는 점이다. 평화소통이란 게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우선 이념보다 혈육문제부터 풀어나가야 한다. 북에선 관심 없어 해도, 남에서 백번 양보해 북한동포송환부터 시행했으면 한다. 아마 대한민국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비전향장기수일 것이다.

북한과 이념문제를 두고 보더라도, 대한민국은 정녕 북한과는 다른 자유인권 국이요, 세계선진 민주국가 아닌가. 북한에 어떤 물질적 후원보다도, 김련희 탈북자와 90세 노인네 장기수 11명의 인도적 고향송환부터 단행되기를 기대한다. 그것이 얼어붙은 남북평화소통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필자소개
강원도민일보 북미특파원,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전 대표
대한민국 인권상 수상, 관훈클럽 국제보도상 수상, 한국신문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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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연 2022-04-05 23:02:51
김련희님을 억류시킨 우리나라 정부도 김련희님을 북으로 보내고 북에 있는 국군포로 가족들과 납북자 가족들도 피지못할사정이면 그 납북자분이나 국군포로의 유골이라도 가져와서 이곳 우리 대한민국땅에 묻기를 기원하는바입니다~!!!!!

박혜연 2022-04-05 23:01:05
평양시민 김련희님의 가족들에게 정말 죄송하고 미안하다고 생각합니다~!!!! 곧 있으면 윤석열정부가 출범디는데 문재인정부와는 180도 다른 대북강경성향이고 검찰총장출신인거 아시죠?

박혜연 2022-04-05 22:59:58
김련희님과 비전향장기수 어르신들의 고향이 북녘이니 빨리 송환되어서 가족들과 상봉하기를 기원하는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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