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 콜로라도 덴버에 있는 박희병 독립지사 묘소
[탐방] 콜로라도 덴버에 있는 박희병 독립지사 묘소
  • 덴버=이종환 기자
  • 승인 2022.04.20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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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인 애국동지자대회’ 앞두고 의문사… 소년병학교 창설한 박용만 선생의 삼촌

(덴버=월드코리안신문) 이종환 기자= 덴버에 있는 독립지사 박희병 선생의 묘소를 찾아간 것은 미주한인회총연합회 통합총회가 열리던 날 오전이었다. 오후 개회식 전에 후딱 다녀오자는 생각으로 국승구 총회장께 부탁해 차편을 마련했다.

마침 조석산 전 콜로라도 덴버한인회장이 차편과 함께 안내를 맡았다. 그는 총회 참석자 공항영접과 호텔 이동 작업에 투입돼 있다가 “덴버에 묻힌 독립지사를 언론에 소개하자”는 명분(?)에 차출됐다.

“박희병 선생은 한인소년병학교를 만든 박용만 선생의 삼촌입니다. 전에 묘소에 가본 적이 있는데 함께 갈께요.”

덴버 총회에 참석하러 왔던 박상원 샌버나디노한인회장도 이렇게 말하며, 동행을 자청했다. 박상원 회장은 미국에서 설립한 박용만기념재단의 회장직도 맡고 있다고 했다.

덴버 시가지로 접어들자, 널찍한 계단이 마련된 건물 한켠에 피켓을 든 시위대가 보였다. 콜로라도 주청사 건물 앞이었다. 우크라이나전쟁을 반대하는 시민 30여명이 이곳에 모여서 아직 일어나지 않은 전쟁을 반대하고 있었다.

덴버 시내 관광명소로 주청사 외에도 연방조폐국이 있다. 멀리서도 지붕이 보인다. 덴버 인근 광산에서 금과 구리가 많이 생산된 덕분에, 미국 동전의 75%가 이곳에서 만들어진다고 한다.

박희병 지사의 묘소가 있는 리버사이드 공동묘지. 표지판에 덴버역사구역이라고 쓴 글도 보인다.

이런 얘기를 나누며, 먼저 박희병 박용만 선생이 덴버에서 직업소개소와 여관을 경영하던 곳을 찾았다.

“건물 앞에 홈리스들이 있네요. 전에 왔을 때는 없었는데요.”

조석산 회장이 건물 앞에서 차를 세우자 박상원 회장이 이렇게 말을 꺼냈다. 박희병 박용만 숙질이 미국으로 건너온 것은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된 1905년이다.

미국에 온 박희병과 박용만은 대륙횡단열차가 통과하는 덴버의 유니언 역사 앞에 직업소개소와 여관을 차렸다. 한인노무자를 철도와 광산회사에 소개하고, 이들 한인을 규합해 자금을 모으며 독립운동을 진행할 계획이었다.

박용만과 박희병의 직업소개소가 나중에 노무자들의 치안까지 책임지는 소위 자치경찰 임무까지 맡게 된 것으로 보면, 이들의 활동에 대해 덴버시 당국의 신뢰도 상당했던 듯하다.

박용만은 1908년 이곳 덴버의 감리교회에서 ‘해외애국동지대표자회의’도 개최해, 한인군사학교 설립안도 통과시켰다. 이듬해 네브래스카에서 만들어진 한인소년병학교는 이렇게 해서 세워진 것이다. 1908년 열린 해외애국동지대표자회의에는 만주에서 활동하던 이상설,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 등도 참여했다.

박희병 선생 묘비. 2007년 덴버한인회가 세웠다.

“박희병 선생의 묘비가 저기 보이지요?”

덴버 외곽에 있는 리버사이드 공동묘지에서 조석산 회장이 박희병 선생의 묘비가 있는 곳으로 일행을 안내했다. ‘리버사이드 공동묘지’라고 쓴 입구 간판에는 ‘덴버역사지구’라는 글귀도 덧붙여져 있었다.

2007년 10월 덴버광역한인회가 세운 이 묘비에는 ‘대한독립’이라는 글귀와 함께 태극기도 새겨져 있었다. ‘덴버 이민시조, 박희병 지사지묘’라고 쓴 묘지 뒤에는 박희병 선생의 묘지명을 다음과 같이 새기고 있었다.

“여기 잠든 애국지사 박희병님은 1871년 철원에서 출생, 관립 영어학교를 졸업한 뒤, 게이오 대학에서 유학, 1886년 의친왕과 함께 도미, 버지니아 로아노크 대학서 2년간 인문학을 수학했다. 님은 1899년 조정의 부름으로 귀국, 평안도 문산 금광에서 통역 겸 외교부 관료로 근무하면서 평북 선천에 신성학교를 설립, 조카 박용만을 교사로 임용, 개화독립정신과 계몽사상을 고취시켰으며 많은 청년에게 광산기술을 습득시켜 덴버 인근 광산으로 출국시키는 한편, 선천지역 유지 자녀들을 박용만의 인솔로 덴버로 유학시켜 장차 조국의 동량으로 양성했다. 조정은 멕시코 이민자들의 노예생활 소식을 접하고 님을 멕시코 특사로 파견하였으나 을사늑약의 파란으로 님은 1906년 덴버로 들어와 이름을 박장현으로 개칭하고 박용만과 합류하여 다운타운에 숙박업을 운영하며 동포들의 직업알선과 유학생들을 연계, 덴버에 6백여명의 동포사회를 형성하고 자체 경찰국을 설립, 동포들의 지도자로 활약했다. 님은 ‘대한인애국동지자대회’ 덴버 유치를 준비하던 중, 1907년 6월 13일 아까운 37세 나이로 의문을 남기며 여기에 안장되었다.”

우리 일행은 조국독립의 꿈을 불태우다 비명에 가신 박희병 선생의 묘소 앞에서 긴 묵념을 올렸다. 미주총연 총회가 열린 덴버가 유서 깊은 이민역사의 현장임을 확인하는 탐방이었다.

박희병 박용만 숙질이 직업소개소와 여관을 운영했던 건물 앞 거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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