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왜 하멜 일행을 강진 병영에 보냈을까?
조선은 왜 하멜 일행을 강진 병영에 보냈을까?
  • 이종환 기자
  • 승인 2010.07.02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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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밤 홀연히 봄바람 불었는가. 천그루 만그루 배꽃이 다 피었네”(忽如一夜春風來, 千樹萬樹梨花開)
당나라 유명시인의 한 시구절이다.

버스가 나주로 들어섰을 때 차창의 풍경이 바뀌었다. 호남고속도로를 벗어나 영암의 국도변을 달릴 때만 해도 벗꽃이 활짝 피었는가 싶었다. 그런데 나주로 들어서니 달랐다. 예부터 배로 유명한 고을이라는 게 실감났다.

목표인 강진으로 접어들자 느낌이 또 달랐다. 나주보다 조금 남쪽일 뿐인데, 봄빛의 길이가 달라 보였다.
“흐드러진 꽃이 눈길을 잡고, 갓 자란 풀은 말발굽을 덮는구나”(亂花漸欲迷人眼, 淺草才能沒馬蹄)
백거이의 이 같은 싯구처럼 봄이 한 뼘 더 나아가 있었다.

차창가로는 보리밭이 펼쳐졌다. 다른 시골에서는 보리밭이 사라졌는데, 오랜만에 보는 모습이었다.

“많이 자랐군”

버스 안에서 누군가 감탄을 했다.
강진에 닿아 처음 간 곳은 병영에 있는 하멜기념관이었다. 병영은 조선시대 호남을 지키던 지상군사령부가 있던 곳이었다.

해군사령부이던 통영처럼 지금도 병영이라는 지역이름으로 남아있는 게 신기했다.
하멜기념관 앞의 넓은 공터에서는 마침 병영 면민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대부분 노인들이었다.

하멜기념관을 둘러본 감상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뭘까. 나는 ‘의(疑)’자라는 생각을 했다. 송나라 정이 선생은 “배움이란 의심할 줄 아는 것”이라고 했다.
전에 하멜표류기를 읽은 적이 있다. 하멜 일행은 자카르타를 거쳐 나가사키로 가는 길에 조선에 표류해 갖은 고초를 겪고 탈출했다는 게 그 책의 주된 내용이다.

하멜 표류기에 그려진 조선은 폐쇄적이고 억압적인 사회였다. 하지만 병영의 하멜기념관에서 나는 생각을 바꿨다. 표류기에도 ‘행간’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하멜기념관을 안내한 강진군청 관광해설사는 이렇게 말했다.

“20년전까지만 해도 하멜 일행 후손들이 이곳에 살았습니다.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이었지요”

그랬다. 조선은 당시 나름의 고뇌가 있었을 것이다. 조선은 하멜 일행이 표류해오자 그들이 갖고 있는 첨단 과학지식을 탐냈던 듯하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들을 한양의 훈련도감으로 배치했다.
하지만 이들이 청나라 사신을 찾아가 본국 송환을 요구하는 등 외교적인 두통꺼리가 되자 이들을 먼 남쪽의 강진으로 보냈다.

강진은 청나라와는 먼 곳으로, 호남의 육군사령부가 있던 곳이다.
이곳으로 하멜 일행을 보낸 조선 조정의 뜻은 뭘까? 유배일까? 그게 아닐 것이라는 게 내가 느낀 ‘의(疑)’자의 실체다.

하멜 일행을 억류해놓고 서방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려는 조선 조정의 뜻과 하루라도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하멜 일행의 뜻이 교차한 곳이 바로 이곳 병영이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이어 방문한 곳이 다산초당. 강진에서 18년의 유배생활을 한 다산 정약용선생이 제자를 기르고, <목민심서> 와 같은 책을 저술한 곳이다. 초당은 기대보다는 산을 제법 걸어올라간 자리에 있었다.

다산초당에서 나는 다산의 서한을 떠올렸다.

“초당 지붕은 이었느냐”

“예”

“초당 연못 가운데의 돌탑은 무너지지 않았느냐”

“예”

“연못 속 잉어 두마리는 잘 자라느냐”

“예”

이 같은 문답으로 된 다산의 서간 사본이 산아래 다산기념관에 소장돼 있었다. 다산초당에서 이 서한을 생각하며 나는 글쓰기의 ‘이(理)’를 곱씹어봤다. 서한의 글은 너무 쉽고, 구체적이었다. 너절한 말이 필요 없었다. 글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느낌이었다.

이날 우리는 초당 아래 있는 다산수련관에서 여장을 풀었다. 이튿날 행선지는 해남이었다. 수련관을 떠날 때 뜰 앞에 새겨진 다산어록 한 줄이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시골에 살면서 채소밭이나 과수원을 가꾸지 않는 사람은 쓸모 없는 자(者)다”

땅끝마을 해남에서는 두륜산 자락에 에워싸인 대흥사를 먼저 들르고, 이어 <어부사시사>로 유명한 고산 윤선도 선생의 녹우당을 찾았다. 녹우당에는 고산선생의 14대손이 고택을 지키고 있었다.
마침 동행한 전 경기대 이원재 교수(사회학) 덕택에 사랑채는 물론, 안채까지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안채 정원에는 나리와 초롱꽃, 할미꽃이 피어 있었다.
녹우당 위로는 비자나무 숲이 우거져 있다고 했다. 가보지 못한 게 안타까웠다.

이번 역사기행은 북악포럼(회장 김극기)이 주최한 것이었다. 참석자는 모두 26명. 서울에서뿐 아니라, 제주와 호남지역에서도 기행에 참석하러 왔다. 모두 포럼 멤버들이었다.
봄빛을 즐기면서 배운 것도 많고, 느낀 것도 많은 나들이였다.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녹우당 사랑채에 걸린 족자의 글귀를 떠올렸다.

“차(茶)는 반(半)만 채우고, 반은 그대의 정(情)으로 채우게”

이 말처럼 이번 역사기행은 배움도 채우고 정도 채운 나들이였다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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