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로㉜] 로컬 리더십으로 아프리카 미래를 열다 – 윤성혁 前 삼성전자 아프리카 총괄
[아프로㉜] 로컬 리더십으로 아프리카 미래를 열다 – 윤성혁 前 삼성전자 아프리카 총괄
  • 윤성혁 前 삼성전자 아프리카 총괄
  • 승인 2022.06.09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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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PRO’는 국내 아프리카 전문가들의 모임이다. 외교부 한·아프리카재단에서는 이들의 활동을 소개한 책을 두 권 펴냈다. ‘Af-PRO, 한국과 아프리카를 잇다’는 제목의 단행본들이다. 한·아프리카재단의 허락을 받아, 이 책의 내용을 연재한다.[편집자주]

삼성전자의 미국 주재원으로 16년간 근무한 윤성혁 전무는 미국에서 돌아오자마자 아프리카 시장을 맡으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미국과 아프리카 시장 사이에 공통점이 없었던 만큼 윤 전무 처지에서는 당황스러웠을 법도 하다. 하지만 정작 그는 이런 뜻밖의 발령을 새로운 도전으로 여기고 흔쾌히 받아들였다. 미국에서 그랬듯 아프리카대륙에서도 현지 직원 중심의 로컬 리더십을 강조했다. 거래선들을 직접 만나 협업하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판매전략을 논의하는 윤 전무의 방식에 사업 파트너들도 적극적으로 호응해 주었다. 친근하면서도 적극적인 자세에 아프리카대륙의 거래선들도 마음의 문을 열고 삼성전자를 진정한 파트너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시장조사와 거래선의 요청을 바탕으로 끈질기게 본사를 설득하여 아프리카 시장에 적합한 중저가 스마트폰과 TV 제품들을 출시하여 대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2017년 아프리카 총괄로 임명되어 2020년까지 남아프리카공화국(이하 ‘남아공’)에 주재하며 삼성전자 주요 제품들의 시장점유율을 압도적인 1위로 성장시켰다. 그가 주재한 기간 사내 분위기도 크게 쇄신됐다. 인종을 향한 편견 없이 인재를 채용하여 흑인과 백인 사이의 불균형을 해소한 결과 삼성은 남아공에서 중요한 흑인경제육성법 B-BBEE(Broad-Based Black Economic Empowerment) 1등급을 확보하여 현지 파트너들이 함께 일하고 싶은 기업으로 탈바꿈했다. 그 결과, 삼성전자는 아프리카대륙에서 가장 사랑받는 로컬 브랜드로 거듭났다. 주어진 환경에 따라 철저히 현지 맞춤형 전략을 펼쳐야 한다는 윤 총괄의 경영철학이 아프리카 시장에서도 빛을 발했다. 성공적인 로컬 리더십을 통해 아프리카 시장을 개척한 윤성혁 총괄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자.

미국의 경험을 토대로 아프리카 시장을 맡다

2017년 아프리카 총괄로 발령을 받았을 때 경영진은 이런 당부를 했다. 미국 시장에서 우리의 위상은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으니 그 경험을 바탕으로 미래의 잠재적인 시장인 아프리카대륙에서 기반을 구축해주면 좋겠다는 당부였다. 앞으로 10년, 20년 후 성장이 예상되는 아프리카 시장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삼성도 지금 기초를 다져놓는 투자를 해 두어야 미래에 후배들이 삼성 아프리카(Samsung Africa)를 잘 이끌고 갈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항상 새로운 일에 도전한다는 것에 큰 흥미와 호기심을 느꼈다. 그리고 후배들과 삼성 아프리카의 미래를 위한 기반을 닦는 미션은 무척 뜻깊은 의미로 다가왔다.

세 번에 걸친 미국 주재 기간 삼성은 2006년 미국의 TV 시장에서 일본 소니와 같은 선두주자를 꺾고 일등의 반열에 올랐다. 또 2013년에는 삼성의 스마트폰 갤럭시가 아이폰의 인기를 뛰어넘어 일등에 등극했다. 이 과정에 참여하여 일조할 수 있었던 것은 내게 큰 행운이었다. 오랜 기간 미국에서 영업 전문가로 주재하며 큰 시장에 익숙해져 있었던 내게 사실 아프리카대륙은 완전히 새로운 시장이자 도전이었다. 그런데 직접 아프리카대륙의 거래선들을 만나고 시장을 접해보니 아프리카 시장이 미국 시장보다 매출의 비중만 작을 뿐 사업을 펼쳐 나가는 방식은 똑같았다. 다만 아프리카대륙에서 주요 경쟁사들이 중국업체라는 점이 크게 달랐다. 미국에서 경쟁사는 아이폰이나 소니 등 일류의 글로벌 기업들로 프리미엄 제품력과 브랜드 마케팅이 주요 전략이었지만 아프리카대륙에서는 저가로 승부하는 중국 회사들을 상대하여야 했다.

나는 먼저 현지 거래선들을 직접 만나 그들의 주요 관심과 요청 사항을 경청했고 그들에게 필요한 부분을 우선 지원해 주어야 새로운 전략적 파트너십이 구축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아프리카대륙의 거의 모든 거래선들이 한결같이 요청한 사항은 삼성의 브랜드로 아프리카 시장에 필요한 경쟁력 있는 엔트리급 모델을 출시해 달라는 것이었다. 시장에서 판매되는 제품의 80~90%가 저가 모델인 상황에서 우리는 당연히 대응방안을 찾아야 했다. 나는 거래선들에게 신모델을 개발하자면 다소 시간이 걸리겠지만, 삼성이 적극적으로 준비할 것을 약속했다. 곧바로 본사에 이러한 가격 경쟁력을 갖춘 신제품 개발을 요청했고, 1년 후 신제품을 출시할 수 있었다.

이렇게 나는 거래선을 직접 만나 그들의 목소리를 겸허하게 듣고 우리 제품도 소개하며 판매와 마케팅 전략을 함께 협의했다. 삼성 아프리카의 현지인 담당자들은 내가 거래선과 접근하는 방식이 새롭다며 무척 만족해했다. 아프리카 통신 사업자들은 규모는 작아도 그 지역에서는 최고라는 자부심이 있어 제아무리 삼성전자라도 현지 직원들이 통신 사업자 경영진들과 미팅을 하기는 쉽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총괄이 직접 만나자고 하니 통신 사업자의 CEO들도 미팅에 응해주었던 것이다. 나는 미국에서 세계 최대 통신 사업자를 직접 만나 발로 뛰었던 경험을 살려 아프리카 현지인들과 함께 통신 사업자의 경영진은 물론 실무진도 만나면서 파트너십을 좀더 전략적으로 바꾸어 나갔다.

특히 내가 출시 예정인 신제품의 장점을 직접 시연까지 하며 마케팅 전략을 설명하고 ‘함께 잘 판매해보자’고 이야기했을 때 그들의 눈빛이 조금씩 바뀌며 관심을 두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제는 통신 사업자의 경영진들이 더 적극적으로 자기들과 신제품을 공동 출시하는 전략과 지원 사항을 요청해오기 시작했다. 나는 이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적절히 지원해 주었으며 추가로 미국에서 크게 효과를 보았던 마케팅 협력 사례들도 공유해주었다. 거래선 CEO급들은 더 많은 관심을 가지며 앞으로 자신들과 정기적으로 미팅을 하자는 제안을 했고, 거의 한 달에 한 번씩 주요 통신 사업자의 경영진들과 미팅을 할 수 있게 됐다. 이런 변화의 과정을 보며 나는 본사 경영진이 나를 아프리카대륙으로 보낸 배경이 이해가 됐다. 이처럼 거래선들을 직접 만나 그들의 의견을 경청하며 판매전략을 함께 수립하니 관계가 금세 좋아졌다.

투명한 정보 공유와 소통을 통해 성장한 로컬 리더십

내가 아프리카에 부임했을 당시 현지 직원들의 사기는 그다지 높은 편이 아니었다. 현지 직원들은 회사로부터 좀 더 많은 정보를 공유받고 내부 경영진들과 원활한 소통을 원하고 있었다. 나는 즉시 현지 사무실에서도 타운 홀 미팅(Town Hall Meeting)을 하도록 했다. 전체 직원과 소통하는 이런 방식의 미팅은 삼성 아프리카에서는 최초로 실시된 것이었다. 타운 홀 미팅을 통해 매월 경영실적, 신제품 출시 등 회사의 중요한 사항들을 투명하게 공유했다. 특히 직원들은 그들이 안고 있던 불만과 요청 사항들을 허심탄회하게 듣고 직접 답변을 해주는 질의응답 시간에 큰 호응을 보였다. 경영진이 일반 직원들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이를 반영하고 개선해줄 의지를 실시간으로 보여주고 동시에 실제로 사업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현지 직원들의 마음이 조금씩 열렸고 조직 내 분위기에도 긍정적인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첫 번째 타운 홀 미팅을 하던 날, 직원들이 앞으로 타운 홀 미팅을 매달 해달라는 요청을 했다. 나는 이를 받아들여 4년간 매달 타운 홀 미팅을 진행했다. 매달 투명한 소통의 장을 통해 모든 직원이 회사와 한 방향으로 나아간 결과 로컬 리더십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초기에 만난 거래선들은 삼성은 아프리카 시장을 제대로 지원하지 않으며 선진국 중심이라는 다소 부정적인 인식을 가진 듯 보였다. 그동안 아프리카 현지 직원들이 제공하는 정보가 제한적이다 보니 거래선으로서는 크게 도움을 받는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먼저 이런 부정적인 인식부터 바꿔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며 나는 직원들에게 ‘로컬 리더십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지 직원들이 로컬 리더십을 가지려면 가장 먼저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어야 한다. 회사 정책이나 제품 기능을 몰라서야 거래선을 만나도 일을 진전시켜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가진 모든 정보와 지식을 현지 직원들과 공유했다. 가끔 지나치게 보안을 문제로 삼아 현지 직원들에게 주요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정말 민감한 부분이 아니라면 최대한 많은 정보가 공유되어야 직원들이 업무 이해력이 높아지고 성과도 낼 수 있다. 나는 본사와 협의하여 현지 직원들과 주요 정보를 함께 공유해 나가면서 새로운 업무 체계를 구축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현지 직원들이 회사를 생각하는 충성도와 자부심이 크게 높아졌다. 신제품을 출시할 때에도 직원들은 충분한 정보를 가지고 거래선을 만나 자신 있게 설명할 수 있게 됐다. 나아가 출시 마케팅을 협의하며 거래선들의 협력을 이끌어내는 등 로컬 리더십을 통해 직원들의 업무역량을 끌어 올리는 동시에 거래선과의 관계도 더욱 돈독히 쌓아갈 수 있었다. 이렇게 성장을 거듭한 결과 공급망 관리(SCM, Supply Chain Management)가 낙후됐다는 평가를 받던 삼성 아프리카가 삼성 본사로부터 글로벌 베스트 프랙티스(Global Best Practice) 상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나는 현지 직원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아프리카대륙의 잠재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공정한 고용과 현지 투자로 B-BBEE(흑인경제보호법) 1등급을 받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모든 아프리카 국가에서 흑인 인구는 90% 이상을 차지한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이하 ‘남아공’)은 전체 인구 중 백인의 비율이 9%도 되지 않지만, 남아공에 소재한 글로벌 회사 대부분이 백인 직원의 비율이 높은 편이다. 특히 남아공은 1990년대 초까지 악명 높은 인종 분리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를 실시하며 흑인에 대한 참혹한 비인간적 차별이 사회에 만연했다. 아파르트헤이트는 철폐됐으나 여전히 흑인과 여성들에게는 교육과 고용의 기회가 제한되어 빈곤이 대물림되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 인종 갈등은 여전히 사회적으로 아주 민감한 문제로 남아 있다.

삼성도 남아공에서 이러한 불균형은 시급히 개선되어야 한다는 점에 공감하며, 즉시 인구의 인종간 비율에 비례한 균형 잡힌 고용 정책을 추진했다. 삼성 아프리카의 미래를 위해서도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젊고 패기 넘치고 열정을 가진 인재들을 확보하여 삼성의 축적된 글로벌 교육과 경험을 쌓도록 하여 10년 후 미래를 준비할 시점이었다. 하지만 막상 면접에 참여해보니 피부색의 구분 없이 인재를 채용하는 일은 예상보다 어려웠다. 왜냐하면, 오랜 인종 차별 정책으로 고등 교육을 받고 사무직 경력을 쌓은 인력 대부분이 백인이었기 때문이다.

과감히 경력을 일정 부분 포기하고 면접자의 태도나 자세 그리고 미래 잠재력에 더 집중하기로 했다. 나는 모든 신입사원과 경력사원들의 최종 채용 면접에 직접 참여했다. 그리고 아프리카 현지 부서장들도 원한다면 채용 면접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회사 업무가 유기적으로 돌아가는 만큼 다른 부서의 직원을 채용하는 면접에도 관련된 부서장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삼성 아프리카 채용 패널들의 면접 기술도 점점 향상됐다. 그동안 일부 현지 부서장들이 면접과 채용 과정에서 가졌던 불공정한 태도나 바쁘다는 핑계로 면접에 참석하지 않는 등 무관심했던 태도가 완전히 개선됐다. 남아공 업계에서도 삼성이 편견 없이 공정하게 인재를 뽑는다는 입소문이 펴지면서 기업 이미지도 더욱 좋아졌고 훌륭한 인재들이 더 많이 입사 지원을 했다. 그 결과, 정말 젊고 유능한 인재들의 입사가 줄을 이었다.

나는 이러한 선순환 속에서 사무실에서 일하는 분위기가 점점 더 활기차고 에너지가 넘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현지 직원들이 스스로 책임감을 갖고 조금씩 주도적으로 바뀌어 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정말 큰 기쁨이었다. 삼성 창업주 故 이병철 회장께서도 항상 모든 신입사원 면접을 직접 보셨다고 한다. 나도 아프리카대륙에 있는 동안에는 매주 최종 채용 면접을 직접 참석하며 ‘인재제일(人材第一)’이라는 그의 속 깊은 경영철학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흑인 직원의 비중이 안정적인 균형을 갖추어 가는 것은 사업을 확대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됐다. 남아공에는 흑인경제육성법(Broad-Based Black Economic Empowerment: B-BBEE)이라는 흑인의 경제력 향상을 위한 제도가 있다. 이는 과거 인종 차별주의 아래 불이익을 받아온 흑인 계층의 경제활동을 장려하기 위한 제도로, B-BBEE 등급이 높으면 공공기관 조달 및 입찰에 유리한 가산점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즉, 남아공에서 B-BBEE 등급이 높은 회사로부터 제품이나 서비스를 구매하면 구매의 주체가 되는 기업의 등급도 덩달아 올라간다. 내가 아프리카대륙에서 거래선과 처음 인사를 하고 다닐 때 현지 CEO들은 삼성전자의 B-BBEE 등급을 올려줘야 우리가 삼성 제품을 더 많이 구매할 수 있다고 요청했다. 당시 우리는 7등급으로 떨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즉시 1등급을 받기 위해 태스크포스 팀을 만들고 실행에 들어갔다.

편견 없이 직원을 뽑아 사내의 갈등과 차별 문제를 좁혀 나가고자 했던 내 계획도 B-BBEE와 관련이 있었다. 1년 후 우리는 B-BBEE 최고 등급인 1등급을 받기에 이르렀다. 아무도 가능하리라 믿지 않았던 1등급의 달성은 로컬 리더십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공평하게 직원들을 채용하고 현지 투자를 늘리는 등 모두가 최선의 노력을 다한 결과였다. 물론 그 과정에서 현지 직원들 스스로 ‘삼성인’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된 점이 가장 고무적인 변화였다.

아프리카 현지 사정에 맞는 로컬 마케팅을 펼치다

아프리카 시장은 구매력이 높지 않다 보니 품질이 다소 떨어지더라도 중국업체의 휴대전화나 TV 등이 훨씬 저렴했기에 높은 판매율을 나타내고 있었다. 소비자 대다수가 30미국달러 이하의 피처폰과 100미국달러 이하의 아날로그 TV를 사용하는 실정이었다. 기존에 피처폰을 쓰던 사람들이 스마트폰으로 바꾸더라도 하루아침에 최신 고가 모델을 구매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프리카대륙에서는 서구 선진 시장에서 통하던 프리미엄급 스마트폰과 TV만으로 시장을 압도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현지 거래선들도 삼성 브랜드로 중저가의 스마트폰과 TV를 출시해줄 것을 간절히 원했다. 현지 사정에 맞는 로컬 마케팅을 펼치는 데 있어 시장에 맞는 제품을 갖추는 것이 가장 우선시되어야 했다. 나는 본사에서 관계자가 출장 올 때마다 시장조사 결과를 보여주며 중저가 제품들을 개발해야 하는 필요성과 당위성을 피력했다. 끈질기게 설득한 결과, 본사에서 아프리카 시장에 적합한 중저가폰과 TV를 개발하여 출시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었다. 삼성의 중저가 보급형 모델은 스마트폰 혹은 디지털 LCD TV를 처음 구매하는 아프리카 소비자들에게 무척 새롭고 혁신적인 제품에 해당했다. 비록 중국 제품보다 여전히 가격이 높았지만 그럼에도 소비자들은 웃돈을 내더라도 삼성 제품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마케팅 역시 현지 사정에 맞추어 추진했다. 예를 들어 본사에서 보내주는 광고물에는 흑인 배우가 등장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우리는 스마트폰 광고 모델로 남아공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래퍼 ‘캐스퍼(Cassper Nyovest)’를 발탁했다. 캐스퍼는 인스타그램 팔로워가 460만 명에 이를 정도로 아프리카대륙에서 영향력이 매우 큰 인플루언서다. 본사와 협의하여 아프리카대 시장에 맞는 독자적인 마케팅을 진행할 수 있도록 승인을 받았다. 핸드폰 이름도 파격적으로 ‘캐스퍼 폰’으로 이름을 붙여 출시했다. 로컬 마케팅 전략은 적중했다. 캐스퍼 폰은 출시되자마자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캐스퍼 폰이 화제를 모으자 TV 방송 프로그램에서 출연해달라는 요청이 쇄도했다. 나와 마케팅 직원들이 직접 출연해 시청자들에게 신제품을 소개해 주었다. 특정 프로그램에 출연하자 다른 방송국의 경쟁 프로그램에서도 출연 요청이 이어졌다. 한번은 현지 직원과 함께 아침 7시에 생방송 토크쇼에 출연한 후 돌아와 쇼핑몰에서 매장을 둘러보는데 어떤 중년 여성이 우리를 알아보고 말을 걸기도 했다. 점점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그만큼 삼성의 브랜드 인지도도 높아졌다.

나는 가는 곳마다 삼성이 로컬 지향적인 브랜드임을 강조했고 광고를 통해서도 같은 메시지를 전달했다. ‘로컬 지향적 브랜드’라는 문구에 책임지고 현지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한 노력도 부단히 했다. 단순히 물자만 전달하는 기부 활동보다는 직원들과 함께 봉사하며 직접 현지 실정을 살피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공감하려 노력했다. 또한 환경 보전을 위한 전자 폐기물의 재활용 사업을 남아공 정부와 같이 진행하며 삼성이 얼마나 남아공과 아프리카대륙을 소중히 여기고 있는지 전했다.

위기를 기회로 삼다

2020년 3월 27일 남아공은 코로나19로 인해 나라 전체가 봉쇄됐다. 한 달 반 이상 통행이 금지되며 모든 회의를 화상 통화로 대체해야 했다. 우리나라만큼 무선 인터넷이 활성화되지 않았으며, 정전도 잦아 걱정이 앞섰다. 나 역시도 처음 겪는 일이라 재택근무가 과연 효과적일지 의구심이 들었다. 나라 전체가 봉쇄되는 모습을 보며 미국에서 배운 위기관리 경영기법 ‘컨틴전시플랜(Contingency Plan, 긴급사태 대책)’이 번뜩 떠올랐다. 나는 처음 미국에 주재했을 때 IBM으로부터 컨틴전시플랜을 제출해 줄 것을 요청받았다. 예를 들어 타이완에서 홍수가 났을 때 혹시라도 이로 인해 부품 공급에 차질이 있을지 여부와 이에 대한 대응책을 제시하여야 했다.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부서들과 협의하여 구체적인 대책을 수립했다. 얼마 후 일본에 지진이 발생하자 새로운 컨틴전시플랜을 준비하는 등 우발사태 발생 시 대응방안을 마련하는 훈련을 많이 받았다.

아프리카 시장이 코로나19로 인해 봉쇄되는 상황을 맞자 우리는 삼성 아프리카 자체적으로 제품별 컨틴전시플랜을 준비했다. 우선 공급선을 점검했다. 코로나19가 막 발생하여 전 세계로 확산하던 시기였던 만큼 중국으로부터의 공급 사정이 가장 심각한 문제였다. 공급지를 중국에서 다른 나라로 이전할 수 있는지를 본사와 협의하여 즉시 변경하도록 했다. 동시에 다른 경쟁사들도 공급이 어려워질 것으로 예상하여 우리는 거래선별로 적정 재고를 유지할 수 있게 준비했다.

많은 사람이 팬데믹으로 인해 경제가 무너질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일각에서는 불확실한 앞날에 대한 불안감으로 걱정이 가중된 시기에 총괄인 내가 상황 판단을 잘못하는 것이 아닌지 불안해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많은 사람이 예상했듯이 재고가 쌓여갔다. 하지만 5월이 되어 봉쇄가 풀리고 휴대폰과 가전제품 매장들이 문을 다시 열자 일명 ‘보복 판매’가 일어나며 삼성 제품의 판매율이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기세로 수직 상승했다. 현지 유통업체들은 그동안 영업을 하지 못해 발생한 적자를 만회하고자 재고가 있는 삼성 제품을 더욱 적극적으로 판매해 주었다. 미국에 주재할 때에도 서브프라임 모기지로 시장의 불확실성이 큰 시기에는 가격이 조금 더 비싸더라도 품질이 보장되는 브랜드가 훨씬 더 많이 팔리는 경험을 했다. 삼성 아프리카는 위기상황에 대응하여 적절한 컨틴전시플랜을 시행한 결과 팬데믹 이후 판매 점유율이 70%를 넘게 됐다.

그 이후에도 코로나 상황이 계속 이어져 봉쇄 조치가 풀렸다가 강화되기를 반복했다. 그 결과 아프리카 시장의 거의 모든 유통사는 매출 부족으로 심각한 경영 위기를 겪고 있었다. 이런 위기 시에 전략적 파트너로서 삼성은 이들을 도와줄 수 있는 마케팅 이벤트를 기획했다. 우리는 3주 동안 삼성전자 주요 제품을 할인 판매하는 ‘블루태그 세일(Blue Tag Sale)’을 실시했다. 삼성이 아프리카대륙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판매 행사는 이번이 최초였다. 그리고 모든 유통들이 자발적으로 삼성 브랜드만의 할인 행사에 참석해주어 예상치 못한 대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삼성은 TV 광고물을 제작하여 각 국가별로 조금씩 수정할 수 있도록 했다. 현지에서 제작된 TV 광고물을 주요 시간에 광고하며 대대적인 홍보를 한 결과 삼성 브랜드의 인지도와 시장 점유율이 급속히 높아졌다. 우리와 거래선 모두 만족할 만한 성과를 냈고 이후 ‘블루태그세일’은 하나의 고유한 행사로서 정기적으로 진행되며 지금까지도 좋은 실적을 내고 있다.

아프리카대륙이 나를 변화시킨 것들

아프리카대륙에 발령받았을 당시만 하더라도 나는 미국 경험을 전수하고 미래 기반을 구축하고자 했다. 하지만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면 내가 아프리카에서 배우고 느낀 것들이 더 많은 듯싶다. 그리고 그것들은 나의 앞으로의 삶에 지침이 될 만큼 중요한 요소들이었다. 특히 ‘만델라 정신’은 되새길수록 마음속에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남아공에 있으며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 前 대통령이 수감 생활을 했던 로벤섬(Robben Island)을 방문했다. 그리고 2018년 만델라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에 참여하면서 책과 글로만 접해온 만델라를 더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만델라가 투옥되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체포됐던 리보니아 강가에서 노숙 체험을 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해 추위에 떨며 하룻밤을 보내는 등 그의 행적을 따라서 해 보기도 했다. 갖은 고초를 겪고도 마지막까지 투쟁한 끝에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에 오른 그는 ‘잊지는 않지만 용서한다(forgive without forgetting)’는 원칙을 가지고 흑인들에게 백인들과 함께하자고 제안했다.

나는 그를 보며 조건 없는, 진정한 화해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처럼 갈등과 대립이 심한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전 세계에 인종 간, 국가 간, 성별 간, 세대 간 긴장감이 흐른다. 나는 이럴 때일수록 만델라 전 대통령이 보여준 화해와 용서의 리더십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느낀다. 그리고 이러한 만델라 정신을 우리나라에서도 더 많은 사람과 공유하는 방법을 한·아프리카재단 등의 관련 단체들과 협의하고 있다.

만델라 재단과 함께 참석한 ‘CEO 트렉포만델라(CEO Trek-4-Mandela)’는 CEO급의 유명 인사들이 아프리카 최고봉인 킬리만자로를 등반하며 기부하는 행사였다. 눈으로 뒤덮인 5895m의 킬리만자로 최정상에 올랐다가 내려오면서 인생의 중요한 진리도 배울 수 있었다. 위대함을 이루기 위해서는 여러 사람과 함께 가야 한다는 이치다. 아프리카대륙에는 ‘빨리 가려면 혼자 가라, 멀리 가려면 여럿이 함께 가라’는 속담이 있다. 고산병을 극복하며 한 걸음씩 내딛을 수 있도록 서로 격려하며 끌어주는 동료와 훌륭한 가이드가 있었기에 나는 킬리만자로의 정상에 무사히 오를 수 있었다.

아프리카대륙의 푸른 하늘과 맑은 공기는 내가 매일 새벽 조깅을 하기에 더없이 좋은 환경을 제공했다. 아프리카대륙의 자연을 벗 삼아 조깅과 등산 등의 운동을 많이 한 덕분에 체력이 많이 좋아졌다는 사실을 체감한다. 남아공의 유명 래퍼 캐스퍼는 삼성의 로컬 마케팅의 대명사처럼 됐다. 내가 남아공에 체류하던 2020년, 캐스퍼는 셀레브리티 스포츠 행사의 일환으로 그의 라이벌과 복싱 시합을 할 계획을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혹시 나더러 행사를 빛내 줄 사전 행사로 은퇴한 남아공의 챔피언과 링에 올라 간단한 경기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재미있겠다고 생각하여 수락했지만, 코로나19로 그 행사는 무기한 연기됐다. 얼마 전 케스퍼는 복싱 이벤트가 2022년 2월로 연기됐다며 여전히 내가 사전 게임으로 링에 오를 수 있는지 물었다. 나는 참석하겠다고 약속했다. 실제로 치고받는 정식 복싱 경기는 아니지만, 나는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복싱을 열심히 배우고 있다.

나는 미국에서 더 오랜 시간을 머물고 일했지만, 아프리카대륙에서 더 많은 사람과 인연을 남기고 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어쩌면 나 스스로 가장 빛나던 시절도 그곳에 남겨두고 왔을지 모른다. 너르고 아름다운 땅, 기회와 행운이 넘치는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앞으로 내가 어떤 그림을 그릴 수 있을지 상상하면 벌써 가슴이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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