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기고] 경계선 없는 다민족 사회
[해외기고] 경계선 없는 다민족 사회
  • 황현숙(칼럼니스트, 호주 퀸즐랜드)
  • 승인 2022.11.09 09: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몇 년 전에 주 정부 후원으로 3주 과정의 Tourism and Hospitality 프로그램을 전문대학교에서 공부한 적이 있다. 40대 이상의 중 장년층을 대상으로 한 이 과정은 관광 이론과 실전을 짧은 시간 내에 이해할 수 있도록 특별히 디자인된 프로그램이었다. 15명의 수강생은 연륜에 걸맞은 다양한 경력을 쌓은 사람들이었으며 가장 연장자인 Anna는 비행기 조종사 출신이었다.

각자 소개를 하다 보니 호주국가 구성의 특성인 다민족 문화를 한 교실 안에서 자연스럽게 체험하고 엿보는 기회가 되었다. 그런 간접적인 문화 체험을 통해서 느낀 점은 역시 우리는 동일성을 지닌 지구촌의 한 가족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인식했다는 점이다. 사우스 아프리카, 인도, 유럽, 호주, 한국 등 우리는 강의실에서 지도를 찾아보며 어느새 새로운 문화권의 세상으로 빠져들었다.

책상 위에는 매일 수많은 정보 책자와 브로셔가 쌓여 나갔다. 국제회의를 개최한다는 가상 하에 팀을 짜서 각 분과 위원회를 만들고 예산을 짜는 법에서부터 회의가 끝난 후에 필수적인 사교 파티를 개최하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강의가 중반쯤에 접어들었을 때는 브리즈번 강에서 유람선을 타고 뷔페 점심을 먹으면서 배의 선장과 대화하는 시간도 가졌다. 강을 중심으로 주변에 도시가 형성된 브리즈번은 자연이 주는 멋을 여유롭게 풍겨주는 이미지 덕에 관광사업이 잘 형성될 수 있는 도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의 마지막 시간에 강사는 우리에게 관광학 이론과 상관이 없는 주제 하나를 선정해서 토론을 시켰다. 자유토론의 주제는 “본인들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일” 한가지씩을 발표하는 것이었다. 수강생들은 자신의 지난 삶에서 깊이 있게 얻었던 교훈이나 잊을 수 없는 일을 솔직하게 말하는 진솔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수강생이 발표한 내용 중에서 인종차별에 관련된 문제와 호주 아줌마의 평범함을 뛰어넘는 사랑 이야기가 기억에 오래 남아있다.

1980년대 후반경 South Africa에서 호주에 이민을 온 인도계의 한 여성은 자신이 이민 초기에 어느 낯선 백인 여성에게 받았던 모멸감 때문에 지금도 남의 어린애는 절대 만지지 않는다고 했다. 이민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였으며 친구도 없었고 영어도 부족한 상황이었다고 한다. 집 부근의 공원에서 자기 딸과 같이 놀고 있었는데 한 백인 어린이가 자기 딸에게 다가오기에 귀여워서 볼을 만졌다. 떨어져서 지켜보던 백인 아이의 엄마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아이의 볼에 더러운 것이라도 묻은 것처럼 수건으로 닦으면서 자신의 검은 피부를 멸시하는 눈초리로 쳐다보았다고 했다.

마치 자신의 검은 피부에서 검정 물이 스며든 것처럼 닦아내던 그 여자의 행동과 눈빛 때문에 마음에 큰 상처를 받았다. 그런 일이 있었던 이후로는 어떤 아이도 만지지 않는 습관을 지니게 되었다면서 격앙된 목소리로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었다. 독일에서 어린 시절에 부모와 함께 이민을 왔다는 루비는 결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백인 여성이 결코 겪을 수 없는 일이기에 그 아픔을 얼마나 이해하고 보듬어 안아 줄 수 있을까. 그 인도 여성은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가슴에 담고 살아갈 것만 같아서 연민이 느껴졌다. 그렇게 버티면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씩씩하게 살아온 그녀에게 우리는 큰 박수를 보냈다.

에스텔은(42세, 호주 여성) 자신에게 생긴 운명적인 사랑이야말로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사건이라고 했다. 작년에 22세의 건장하고 매력적인 남자와 사랑에 빠져서 약혼을 했단다. 그런 일은 자기의 전생에 그 남자와 인연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거라면서 불교의 전생설까지 언급했다. 그녀가 들려준 운명적인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은 매튜라는 이름을 가진 22세의 전직 권투선수 출신의 남자다.

부모가 약물중독으로 정신질환을 일으켜서 아이를 양육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러서 병원에서 생후 18개월 때에 에스텔의 친구인 양부모에게 입양이 되었다고 했다. 에스텔은 매튜가 성장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았으며 자신은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난 두 아이를 키우고 있었다. 매튜는 말이 적은 남자이며 성격도 조용한 편이라고 했다. 매튜가 20살 생일을 맞은 얼마 후에 자기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긴 시간의 고민 끝에 결국에는 약혼을 하게 되었으며 지금은 그녀의 아이들과 함께 한집에서 사이좋게 살아간다고 했다.

매튜가 걸어 준 하트모양의 자수정 목걸이를 매만지면서 행복한 표정을 짓던 그녀의 모습이 스무 살의 수줍은 처녀처럼 보였다. 그녀가 경계선 없는 사랑에 빠졌음을 보았다. 에스텔이 모성애로 아들 같은 연인을 감싸준다면 특별한 그들의 사랑도 따스한 빛살 속에 잠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서로에게 눈부신 꽃이 될 수 있으니까.

그런 막연함 속에서 나름대로 만족한 삶과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행복이라고 믿고 싶다. 인도 여성과 백인 엄마 그리고 에스텔과 매튜 그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감정의 경계선이 쌓여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울타리를 허물고 경계선 없는 사랑을 서로 나눌 수 있다면 우리는 훨씬 더 살기 좋은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며 살 수 있을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사랑을 무조건 기다리면서 살아간다는 일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황현숙(칼럼니스트, 호주 퀸즐랜드)
황현숙(칼럼니스트, 호주 퀸즐랜드)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송파구 올림픽로35가길 11(한신잠실코아오피스텔) 1214호
  • 대표전화 : 070-7803-5353 / 02-6160-5353
  • 팩스 : 070-4009-2903
  • 명칭 : 월드코리안신문(주)
  • 제호 : 월드코리안뉴스
  • 등록번호 : 서울특별시 다 10036
  • 등록일 : 2010-06-30
  • 발행일 : 2010-06-30
  • 발행·편집인 : 이종환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석호
  • 파인데일리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월드코리안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k@worldkorean.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