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주열의 동북아談說-82] 실크로드 둔황(敦煌) 기행
[유주열의 동북아談說-82] 실크로드 둔황(敦煌) 기행
  • 유주열 외교칼럼니스트
  • 승인 2022.12.08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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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황 석굴 제96호굴[사진=위키피디아]
둔황 석굴 제96호굴[사진=위키피디아]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둔황 석굴을 다녀온 사람과 아직 가보지 못한 사람으로” 대학 시절 어느 선배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오래전 ‘실크로드’라는 다큐멘터리가 TV에 방영됐다. 바람에 날리는 사막과 낙타 대상을 배경으로 흐르는 주제 음악이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고 실크로드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둔황 석굴을 찾아가보는 로망을 갖게 했다.

외무부 입부 후 베이징 대사관에 근무하게 됐으나 중국의 서쪽 끝 아득히 떨어져 있는 오지 중의 오지라는 둔황 여행이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출장 등 업무차 실크로드의 시발점인 시안(西安)까지 갈 수 있었으나 그 이상은 무리였다. 둔황은 시안에서도 다시 2,000km를 더 가야 했다.

베이징 근무가 끝날 무렵 기회가 왔다. 황허의 도시 란저우(蘭州)까지 항공기를 이용하고 그곳에서 자동차로 하서회랑을 통과했다. 황허의 서쪽 하서회랑은 길이 1000km, 폭 평균 50km 이하의 좁은 평지로 고비사막과 치롄(祁連)산맥 사이의 긴 통로였다. 이곳은 해발 6500m 치롄산맥의 만년설이 녹아내려 형성된 오아시스 도시로 연결되어 있었다.

둔황의 옛 이름이 사주(沙州)라고 불리었던 것처럼 도시 전체가 사막 한가운데 푸른 숲으로 된 오아시스였다. 도심에서 동남쪽으로 25km 떨어진 거대한 모래 언덕 명사산에 있는 둔황 석굴은 막고굴로도 불린다. 사막 속 높은 곳이라는 의미로 옛날에는 이곳을 막고진(莫高鎮) 오아시스라고 했다고 한다.

서역과 중국을 왕래할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교통 요지인 둔황에 상인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여행의 안전과 사업의 번영을 기도할 사원이 필요했다. 4세기경 락준(樂俊)이라는 승려가 명사산 쪽에 황금빛 부처님이 보여 찾아갔더니 명사산 동쪽에 남북으로 높이 50m 길이 1.6km의 사암 절벽이 펼쳐져 있었다. 석굴사원으로 최적의 장소였다.

그 무렵 인도의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실크로드 주변에 석굴사원이 많았다. 불교 발상지인 인도는 날씨가 더워 시원한 석굴에 사원을 만들었다. 인도 남서부 데칸고원의 아잔타 석굴이 대표적이다. 정글 속의 땅 꺼짐에 따라 나타난 사암 절벽에 벌집처럼 굴을 파서 부처님을 모셨다. 불교를 도입한 신라는 단단한 화강암 국토라 인공으로 석굴을 만들어 부처님을 모신 곳이 경주의 석굴암이다.

승려 락준은 석굴을 파고 벽화를 그리기 위해 표면에 진흙과 풀을 섞어 반반하게 발랐다. 서양에서는 회반죽이 마르기 전에 벽화를 그리는 습식(프레스코)이지만 둔황에서는 진흙이 마른 다음 그림을 그리는 건식(세코)방식이었다. 둔황이 번영하면서 교역으로 돈 번 사람이 자신의 사원을 짓고자 했다. 불교가 승려 중심의 소승불교에서 깨닫는 사람은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만인 성불의 사상이 도입되면서 락준의 첫 석굴 이래 천년간 천 개의 석굴이 완성됐고 그 절반이 발견됐다고 한다.

석굴에는 벽화가 빽빽하게 그려져 있다. 모든 벽화를 연결하면 50km가 넘는 사막의 대화랑이 완성된다고 한다. 벽화는 부처님과 제자들의 가르침이 담긴 불경의 내용뿐만 아니라 천년에 걸친 공양자의 다양한 스토리가 그려져 있다. 조우관을 쓴 한반도 출신의 인물이 그려져 있는 벽화도 40여 점이 된다고 한다.

둔황 석굴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96호 굴이다. 밖에서 보면 9층 높이의 누각인데 내부에는 높이 34m 크기의 거대한 미륵불이 모셔져 있다. 당나라의 측천무후가 모델이라고 한다. 많은 관광객이 누각을 배경으로 증명사진을 찍기 위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진을 속성 인화하여 투명한 플라스틱 원통에 넣어준다.

다음은 제323호 굴이다. 그곳에는 당나라 때 그려졌다는 ‘장건출사서역도’가 있다. 장건(張騫)이 서역으로 떠나기 전 한무제의 전송을 받고 있는 모습이다. 말과 수레에는 외교예물이 잔뜩 실려져 있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했지만, 북쪽의 유목민이 세운 흉노제국을 머리에 이고 살아야 했다. 진시황은 만리장성을 쌓아 흉노의 남침을 막았으나 그가 죽고 난 후 나라는 분열되어 초한전에 휩싸였다. 그 틈을 노려 흉노는 만리장성을 넘어 영토를 넓혀나갔다. 초한전에서 역발산기개세의 항우를 물리치고 천하를 다시 통일한 한고조 유방은 북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흉노를 정벌코자 했다.

한고조가 군사를 이끌고 직접 나섰으나 흉노의 속임수로 지금의 산시성 다퉁 부근의 백등산 전투에서 패배, 포로가 됐다가 간신히 탈출하는 굴욕을 맛봤다. 한고조는 흉노왕(선우)에게 공주를 바치며 형제의 맹약을 맺고 흉노에게 조공을 바쳐야 했다.

7대 황제 무제에 이르러서 국력이 신장되어 한고조가 이루지 못한 흉노 정벌의 기회가 도래했다. 그러나 단독으로 전쟁을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마침 투항해 온 포로를 통해 흉노왕이 서쪽의 월지국과 싸워 왕을 살해하고 그 두개골로 술을 마셔 월지국의 원한이 크다는 정보를 얻었다.

한무제는 월지국과 동맹을 맺어 흉노를 협공한다면 승산이 있을 것으로 판단해 월지국에 사신을 보낼 것을 생각했다. 당시 적지인 서역을 여행하는 것이 죽음과 바꾸는 일이라 선뜻 나서는 신하가 없었으나 섬서성 출신의 하급관리 장건이 지원했다.

장건의 서역원정[사진=위키피디아]
장건의 서역원정[사진=위키피디아]

기원전 139년 장건 일행이 흉노 땅인 하서회랑에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흉노에게 붙잡히고 만다. 흉노는 장건을 처형하지 않고 결혼 시켜 자녀를 두게 하는 등 회유코자 했다. 그럭저럭 흉노 땅에 10년을 산 장건이지만 한나라 사절로서의 사명감을 잊지 않았다. 월지국에 가서 동맹의 협상을 해야 했다. 장건은 감시가 느슨한 틈을 타서 처자식을 남겨 두고 탈출에 성공했다. 그는 흉노에게 패배한 월지국을 찾아 천산 산맥의 남쪽 기슭을 따라 서쪽으로 갔다. 장건이 도착한 곳이 대원국으로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동부지역이다. 대원국에는 한무제가 가지고 싶어 하는 한혈마(천리마)가 많았다.

대원국의 안내로 월지국 왕을 만났다. 대원국 서쪽의 푸른 초원으로 이주한 월지국 왕은 장건을 만나자 흉노와의 원한은 과거의 일로 지금은 풍요로운 땅에 잘 살고 있어 다시 흉노와 싸울 이유가 없다면서 동맹을 거절했다. 크게 실망한 장건은 할 수 없이 귀국길에 오른다. 이번에는 흉노에 잡히지 않기 위해 곤륜산맥의 북쪽 기슭을 따라 동쪽으로 갔다. 하서회랑에 가까워지면서 장건은 다시 흉노에 잡히는 몸이 된다. 처자식과 재회한 장건은 다시 1년 정도 포로 생활을 한 후 가족과 함께 탈출 귀국했다.

장건은 한무제에게 동맹교섭 결렬의 경위와 13년간 보고 들은 서역 정세를 보고하자 한무제는 크게 기뻐하여 높은 벼슬을 내렸다. 한무제는 장건의 서역에 대한 정보를 이용하여 위청, 곽거병 등 장수를 파견 흉노를 공격하고 하서회랑에 하서4군을 설치했다. 한무제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한4군을 설치한 때와 비슷한 시기였다. 둔황은 하서4군 중 가장 서쪽의 변방이었다. 지금 둔황에서 석굴을 볼 수 있는 것도 실크로드의 길을 닦은 장건의 서역 탐사 덕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둔황 석굴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곳은 17호 굴이다. 이른바 둔황문서가 발견된 곳으로 16호 굴 내 숨어 있던 작은 방이었다. 둔황석굴은 매년 4월부터 10월까지 전 세계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관광객으로 붐비지만 1900년 때까지는 사막의 모래 속에 파묻혀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실크로드가 교역으로 번창한 것은 12세기까지였다. 실크로드가 이슬람세력에 의해 지배되면서 동서무역이 차단되고 서양은 지리상 발견을 통해 바닷길을 개척하자 서역을 통한 실크로드는 잃어버린 로스트 로드가 됐다. 번화롭던 둔황도 천년간 사막의 모래바람에 묻혀 고스트 타운(유령촌)으로 변했다.

그 무렵 후베이성 출신의 왕원록(1851-1931)이라는 도사는 16호 굴 근처에 모래를 치우고 도관을 지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1900년 6월 어느 날 청소하다 우연히 석굴 내 또 하나의 밀봉된 석굴을 발견했다. 3평에 가까운 작은 방에는 3만여 점의 고문서와 유물이 보관되어 있었다. 고문서에는 불경뿐만 아니라 당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기록들도 다수 포함돼 있었다.

사람들은 17호 굴이 감쪽같이 감추어진 경위가 궁금했다. 다수 학자들은 11세기 서역을 두고 서하와 위구르제국 간 전쟁으로 서하군대가 위구르 땅인 둔황으로 침공하자 둔황에 있던 주요 문서 및 보물을 급히 석굴로 옮겨 밀봉했다는 주장을 했다. 일본 작가 이노우에(井上靖)는 ‘돈황’이란 소설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추적해 인기를 끌었고 영화화되기도 했다.

둔황에 고문서가 보관된 석굴이 발견됐다는 소문은 서역에서 고고학 발굴을 하고 있던 서양 탐험가들에게 널리 회자됐다. 당시 중앙아시아와 신장 위구르 지역은 ‘그레이트 게임’으로 알려진 러시아 남하 정책과 이를 막아 인도를 지키려는 영국과의 그림자 전쟁터였다. 러시아와 영국은 지도에 없는 땅 서역의 패권을 둘러싸고 고고학 발굴 및 조사를 내세워 탐험가 와 학자들을 대거 파견해 첩보 전쟁을 하고 있었다.

제일 먼저 찾아온 사람은 러시아의 지질학자 블라디미르 오브루체프(1863-1956)였다. 그는 중앙아시아 탐험 중 1905년 왕 도사를 찾아와 둔황문서를 확인하고 등잔용 기름, 러시아제 촛대 등을 주고 고문서 2상자를 받아갔다.

두 번째로 찾아온 사람은 영국의 탐험가 아우렐 스타인(1862-1943)이었다. 그는 중앙아시아의 고대국가를 조사하면서 당나라 시대 고구려 유민의 후예 고선지 장군이 천산 산맥과 파미르 고원을 넘나들면서 정복 전쟁을 한 것을 알프스 산을 넘나든 한니발과 나폴레옹에 비교했고, 고선지 장군의 탈라스 전투를 발굴 서양에 알린 인물로 유명하다. 1907년 둔황을 찾은 스타인은 왕도사에게 약간의 기부금을 주고 17호 굴의 3만 점 고문서 중 1만 점을 수레에 싣고 영국으로 돌아왔다.

다음으로 찾아온 사람은 프랑스의 동양학자 폴 펠리오(1878-1945)였다. 그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하노이에 설립된 프랑스 극동학원 소속 학자로서 중국뿐만 아니라 서역 여러 민족의 언어를 구사하면서 유적지를 탐사하고 장서를 수집했다. 1900년 의화단에 의해 포위된 베이징 사관구 체류 중 용감하게 탈출하는 등 그의 경험이 1960년대 미국 영화 ‘북경의 55일’의 내용에 수록돼 있다.

펠리오는 1908년 왕도사를 만나 17호 굴에 3주가량 체류하면서 고문서를 하나하나 섭렵하여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7,000점을 선별, 석굴 보전에 필요한 소액 기부금을 지불한 후 수레에 싣고 돌아왔다. 그는 고문서 중에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을 발견했다.

신라 승 혜초(704-787)는 어린 시절 한반도 서해안에서 뱃길로 당나라 광저우로 가서 인도승 금강지에게 사사했다. 그는 19세 때인 723년 스승의 권유로 뱃길로 인도의 동쪽에 상륙 비하르주를 시작으로 인도 5개국을 여행하고 북상하였다. 그리고 파미르 고원을 넘어 실크로드를 따라 둔황을 거쳐 727년 수도 장안에 도착했다. 그의 4년에 걸친 인도여행 기록은 삼장법사 현장의 <대당서역기>보다 50여 년 후의 인도 사정을 알게 했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은 일실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펠리오를 통해 세상에 나타난 것이다.

서방 세계에서 둔황 문서가 화제가 되자 그 문서의 중요성을 깨달은 중국 정부가 1910년 남은 문서 1만 점을 베이징으로 이송을 시켜 17호 굴의 문서는 거의 바닥이 났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일본의 고고학자이면서 승려인 오타니 고즈이(1876-1948)는 1912년 탐험대를 파견 이삭 줍듯이 겨우 남아 있는 고문서를 싹쓸이해 가져갔다.

둔황 명사산과 월아천
둔황 명사산과 월아천

둔황 석굴에 다시 한번 위기가 찾아왔다. 1917년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으로 일어난 적백내전에 패배한 러시아 백군 900여 명이 1920년 둔황 석굴에 주둔했다. 그들은 벽화에 칠해진 순금을 긁어낸다든지 낙서를 하고 불을 피워 벽화를 크게 훼손시켰다.

1924년에는 미국 하버드대학의 랭던 워너(1881-1955) 교수가 뒤늦게 찾아와 떼 낼 수 없는 벽화에 화학약품을 이용 그림을 채취해 가는 등 벽화를 훼손시키고 석굴의 공양보살상을 반출해 하버드대학 박물관에 전시해 놓고 있다.

중앙아시아를 탐험한 워너 교수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모험영화 시리즈의 주인공 인디아나 존스의 모델이다. 인디아나 존스 교수의 상징인 중절모와 채찍은 워너 교수가 탐험 시 즐겨 사용했던 물건이라고 한다. 태평양 전쟁 시 미군의 일본 주요 도시 공습에 교토가 피해를 입지 않은 것은 동양미술가로 일본 미술에 조예가 깊은 워너 교수의 요청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일본에서는 워너 교수를 교토를 구한 은인으로 칭송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둔황의 문서나 유물(문화재)을 가져간 서양 및 일본인을 도보자(盜寶者)라고 한다. 둔황에는 도보자가 있는 반면, 수보자(守寶者)도 있었다. 50년간 둔황석굴을 발굴 보수하고 지켜낸 둔황연구소 창수홍(常書鴻, 1904-1994) 소장이다.

창수홍은 절강성 항저우의 청조 귀족(팔기군) 출신이다. 그림에 재능을 보여 동향인 조각가 천지수(陳芝秀)와 결혼 1927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그들이 먼저 정착한 곳은 파리 남동쪽 리옹이었다. 리옹은 스위스에서 흘러오는 론강과 프랑스 동북부 보주 산맥에서 발원된 손강이 합류하는 곳이다. 젊은 부부는 임신한 아이가 남아이면 남성형 론강(Le Rhône)을, 여아이면 여성형 손강(La Saône)을 따라 이름을 짓기로 약속했다. 1931년 첫딸을 낳자 ‘사나(沙娜)’로 지었다.

창수홍은 얼마 후 파리 국립 미술학교로 진학 파리 생활이 시작됐다. 1935년 연말 우연히 세느 강변 고서점에서 펠리오 탐험대가 찍어온 둔황 석굴의 도록을 발견하고 둔황벽화에 크게 감동했다. 서양 예술에 취해 중국문화의 위대함을 모르고 있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1936년 창수홍은 둔황을 지켜야겠다는 일념으로 파리 생활을 접고 귀국했다. 한편 유학생활을 즐기고 있던 천지수에게는 청천벽력이었지만 마지 못해 딸과 함께 다음해 귀국선에 오른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창수홍은 베이징을 떠나 충칭에서 가족과 합류했다. 1944년 창수홍은 드디어 둔황으로 떠났다. 둔황에는 당대 최고 화가 장대천(張大千)이 있었다. 장대천은 둔황을 지키기 위해 돌아온 창수홍을 격려하면서 무기징역을 산다는 각오로 임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그 사이 둘째 아들을 낳은 천지수가 둔황에 들어왔다.

둔황연구소가 정식으로 설립되고 창수홍은 둔황의 벽화를 발굴 보존하는 작업과 함께 모사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천주교 신자인 천지수는 불교 유적인 둔황 석굴을 좋아하지 않았고 파리 패션에 익숙하여 문명의 혜택이 전혀 없는 둔황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어느 해 둔황연구소에 신규 직원이 부임했다. 천지수는 새로 부임한 젊은 직원과 어울리는 시간이 많더니 가출해 버렸다. 이어서 직원도 사라졌다. 어린 남매를 두고 떠난 부인을 용서할 수 없었으나 창수홍은 그녀를 설득코자 찾아 헤맸다. 그러던 어느날 현지 신문의 광고가 눈에 띄었다. “나 천지수는 창수홍과의 모든 관계를 단절한다.”

창수홍은 인근 도시에 나가 공부하고 있는 사나를 불렀다. 사나는 학업을 중도 포기하고 엄마가 없는 어린 동생을 돌보면서 집안을 챙겨야 했다. 창수홍은 딸에게 둔황 석굴 벽화 모사를 시키면서 훌륭한 둔황전문가로 키워냈다. 지금의 둔황 석굴은 반세기 동안 둔황의 수호신이었던 창수홍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다. 둔황의 딸이 된 사나도 아버지의 뒤를 이었다.

둔황 석굴을 둘러보면서 지인이 한 말이 기억났다. “둔황은 중국에 있지만, 둔황학은 외국에 있다.” 둔황의 문헌이 발견된 지 120여 년이 됐다. 그동안 인류문화 유산인 둔황의 고문서가 국외로 반출돼 세계 유명박물관을 채우고 연구도 그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중국 정부는 전문가를 양성하고 디지털 복원사업을 통해 둔황의 벽화 등 유물을 발굴 보전하여 새로운 둔황학을 일으키고 있다.

왕 도사가 발견한 17호 굴을 외국에서는 도서관 굴(Library Cave)이라고 부르고 있다. 외국의 탐험가들이 둔황유물을 약탈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대출된 도서를 반환하듯 둔황의 도서관으로 돌려주면 어떨까. 인류가 공동으로 연구해 온 둔황학이 이름 그대로 불꽃처럼 일어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둔황 석굴에서 나와 명사산 정상에 오르면 저 아래 그림 같은 장면이 나타난다. 수천년 동안 마르지 않는 초승달 모습의 샘물 호수 월아천(月牙泉)과 월천각(月泉閣)으로 이루어진 오아시스다. “명사산(鳴沙山)은 헛되게 울지 않는다(鳴不虛伝)”라는 현판이 있다. 명사산 모래는 우는 것 같지만 그곳에 모래알 같은 수많은 이야기가 흐르면서 속삭이는 소리인지 모르겠다.

유주열 외교칼럼니스트
유주열 외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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