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주열의 동북아談說-84] 위대한 약속 한미동맹 70주년
[유주열의 동북아談說-84] 위대한 약속 한미동맹 70주년
  • 유주열 외교칼럼니스트
  • 승인 2023.02.08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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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드와이트 아이젠하우어는 미국 대통령으로서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할 것이며 최선을 다해 헌법을 준수 보존 수호할 것을 엄숙히 선서합니다.” 1953년 1월 20일 아이젠하우어는 성경에 손을 얹고 대법원장의 선창에 따라 미국의 34대 대통령 취임 선서를 했다. 70년 전 한국전쟁(6.25)의 정전과 한미동맹을 이루어낸 아이젠하우어 대통령(1890~1969)의 임기는 이렇게 시작됐다.

철(Eisen)을 두드리는 사람(Hauer)이라는 뜻을 가진 아이젠하우어 집안은 가난한 독일계 이민 후손이었다.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해 7명의 아들이 교대로 학교를 다녀야 했다. 3번째 아들인 드와이트는 고등학교를 1년 늦게 졸업하고 학비가 들지 않는 육군사관학교(웨스트포인트)에 재수 끝에 늦깎이로 입학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제34대 대통령[사진=위키피디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제34대 대통령[사진=위키피디아]

졸업 성적도 좋지 않았고 군에서도 존재감이 없어 15년간 소령으로 지내다가 맥아더 장군의 보좌관이 되면서 중령으로 진급했다. 드와이트는 육사 12년 선배인 맥아더 장군을 “장군님”하고 존경하였고 맥아더는 “아이크 군”이라고 친애하였다. 아이젠하우어를 축약한 아이크는 그의 애칭으로 후에 대통령 출마 시 “I like Ike”라는 선거구호로 유명해졌다.

맥아더는 만년 소령 아이크의 보고서 작성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그가 육군참모총장을 그만두고 필리핀 군사 고문으로 전출되어 갈 때 아이크를 보좌관으로 발탁, 동행한 것도 필리핀군을 강화하는 데 아이크의 보고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필리핀에서 4년간 맥아더의 신임을 받고 그림자처럼 수행한 후 미국으로 귀국한 아이젠하우어는 대령으로 승진하고 2년 후 준장이 된다. 맥아더의 후광이 작용했다. 아이젠하우어는 맥아더를 멘토처럼 존경했지만 그를 반면교사로 삼았다. 맥아더의 명예욕과 과시욕, 독단적 카리스마 리더십을 피하고 소통과 유연성을 찾았다. 언젠가 발을 잘못 디뎌 넘어지는 것을 보고 주변 사람들이 웃음을 참지 못하자 “여러분들이 웃고 즐거울 수 있다면 기꺼이 한 번 더 넘어질 수 있습니다”라고 할 정도 유머도 잃지 않았다.

더글러스 맥아더
더글러스 맥아더

아이젠하우어는 너그러운 인품에다 뛰어난 행정 능력으로 죠지 마샬 장군의 인정을 받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실력을 발휘할 길이 열리게 됐다. 그가 유럽 전구 사령관일 때 역사와 전통을 내세워 우월감에 가득한 영국군이 미군을 무시하고 프랑스군을 배제하는 반목과 갈등을 중재 화해시키는 노력을 했다. 그는 평소 조직은 실 같아서 조심스럽게 끌어내야지 잘못하면 엉클어진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다.

아이젠하우어는 사병들과도 소통하고 겸손의 리더십으로 그들과 어울리면서 애로사항을 경청, 철통과 같은 팀워크를 이뤘다. 1944년 6월 역사적인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히틀러 나치 독일에 결정적 패배를 안겨 아이젠하우어는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후에 대통령 선거를 앞둔 공화 민주 양당에서 서로 후보로 원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아이젠하우어가 군에서 제대하여 뉴욕의 컬럼비아대학의 총장을 일시 역임한 적이 있었다. 당시 총장실이 본관 4층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야 갈 수 있는 권위적 위치에 있었다. 아이젠하우어는 취임하자 당장 총장실을 학생들이 찾아오기 쉬운 지상층으로 옮기도록 요청했다. 아이젠하우어의 참모습을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아이젠하우어가 생애 후반에 정치적 꽃길을 걸어 압도적 표차로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한국전쟁 때문이었다. 개전 1개월여 만에 낙동강 방어선까지 내몰린 전세를 인천상륙작전으로 역전시켜 서울이 탈환되고 유엔군이 북진하면서 한반도통일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때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황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사령관 맥아더는 전쟁에서 승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없다(In war, there’s no substitute for victory)는 신념으로 원폭 사용을 주장했다.

해리 트루먼 제33대 대통령
해리 트루먼 제33대 대통령

대통령 투루먼은 전쟁은 발생지에서 국한하고 세계대전으로 발전돼서는 안 된다면서 군인의 본분을 벗어나 정치지도자처럼 행동하는 맥아더를 해임했다. 여론은 트루먼이 재선가도에 걸림돌이 될 수 있는 라이벌 제거라고 의심하면서 한국전쟁의 확전이 아니라 종결시킬 새로운 지도자를 찾고 있었다. 트루먼도 자신이 적임자가 아님을 알고 대통령 출마를 포기하였다. 두 거인이 용호상박(龍虎相搏)처럼 싸우다가 서로 상처를 입고 사라진 것이다.

해리 투르먼(1884~1972)은 미국 역사상 보기 드문 고졸 출신 대통령이었다. 그는 집안이나 학력의 배경이 없는 평범한 상원의원 정치인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임기 중 궐위를 생각해 본 적이 없는 프랭클린 루스벨트에 의해 부통령으로 지명되어 당선됐다.

1945년 4월 얄타회담 등 과로로 루스벨트 대통령은 취임 84일 만에 급서했다. 트루먼은 엉겁결에 대통령이 됐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트루먼은 “달과 별 그리고 모든 행성이 내게 떨어진 기분이다”라고 당시 소회를 이렇게 비유했다. 4선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남겨놓은 과제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트루먼은 모든 책임을 피하지 않았다. 지난해 바이든 대통령이 윤석열 대통령에게 선물로 준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The buck stops here)”라는 나무 명패는 투르먼 대통령이 임기 내내 집무실 테이블 위에 두고 잊지 않은 좌우명이었다.

트루먼 대통령의 첫 임기 중(1945.4~1949.1)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고 트루먼 독트린으로 전후 소련의 팽창을 막으면서 마샬 플랜으로 전쟁으로 폐허가 된 유럽 경제 부흥의 실적을 거두었다. 

맥아더
맥아더

영국의 윈스턴 처칠 수상은 화려한 루스벨트를 승계한 고졸 트루먼을 얕잡아 보았으나 원폭 투하로 일본을 항복시키고 스탈린과 당당히 대결하는 트루먼을 서구 문명을 지켜낸 위대한 지도자로 격찬했다. 전후 야인이 된 처칠은 1946년 3월 트루먼의 초청으로 미국을 찾았다. 두 사람은 워싱턴에서 1,600km 떨어진 트루먼의 고향 미주리주 풀턴시로 열차 여행을 함께했다. 그곳의 웨스트민스터 대학의 명예학위 수여식 연설에서 소련 공산주의 제국의 팽창을 경고하는 유명한 철의 장막(Iron Curtain) 연설을 했다.

국내에서는 대중의 인기가 없는 트루먼은 1948년 대선 여론조사에서는 항상 공화당의 토마스 듀이 후보에게 밀려 본인도 선거에서 패배할 것으로 인식했다. 그러나 결과는 트루먼의 승리였다. 일부 유력 신문이 여론을 믿고 ‘듀이가 승리하다(Dewey defeats Trumen)’라는 미리 만들어둔 기사를 오보로 만들었다.

트루먼의 두 번째 임기 중(1949.1~1953.1) 가장 중요했던 것은 한국전쟁이었다. 트루먼이 신속하게 병력을 투입, 한반도가 적화되는 것을 막았다. 전쟁의 교착상태에서 맥아더의 핵 사용을 차단했다. 중국에 대한 핵 공격은 일본과 달리 소련을 핵전쟁에 끌어들이는 위험한 도박이라고 생각했다. 해임된 맥아더는 전쟁 영웅으로서 뉴욕에서 티커 테이프 프레이드 환영을 받고 의회연설에서 “노병은 결코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다(Old soldiers never die, they just fade away)”라는 유명한 군가의 일부를 인용하면서 52년간의 군 생활을 마감했다.

맥아더(1880~1964)는 아버지가 3성 장군을 지낸 명문 군인 집안 출신으로 트루먼, 아이젠하우어와 달리 금수저 출신이었다. 육사 수석 졸업, 최연소 육사 교장, 최연소 육군 소장, 최연소 육군참모총장 등 기록을 갱신했고 제1차 및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한국전에서 미국의 합참과 해군의 끈질긴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공률 0.02%도 안 되는 인천상륙작전(Operation Chromite)을 성공시켜 패색 짙은 전황을 일거에 뒤집은 전설의 군인이었다.

오래전 필자가 뉴욕에서 유학생활을 할 때 맨해튼 서쪽 허드슨강을 따라 북상 미국의 육사가 있는 웨스트포인트를 찾았다. 당시 안내해준 지인이 육사 출신으로 한국의 운명을 결정지은 인물로 맥아더와 아이젠하우어를 언급했다. 기억나는 것은 맥아더 어머니의 이야기였다. 맥아더의 아버지는 남북전쟁 당시 17세의 나이로 북군의 지원병으로 뛰어들어 전공을 세운 소년 영웅이었으며 어머니는 남부의 버지니아주 명문 집안 규수였다. 전쟁이 끝났지만 북군에 대한 앙금이 남아 있어 결혼식에 어머니의 남형제들은 모두 불참하는 소동이 있었다고 한다.

인천상륙작전
인천상륙작전

맥아더의 어머니는 아들 셋 중 막내인 더글러스를 익애하며 아들이 육사에 입학하자 웨스트포인트의 육사 근처 호텔의 방을 얻어 4년간 아들을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했다고 한다. 그 후 아버지의 급서로 혼자된 어머니는 사랑했던 아들의 임지(필리핀)에서 사망했다. 

맥아더는 필리핀 등 극동아시아와 인연이 깊다. 그의 아버지가 식민지 필리핀의 군정 총독일 때 부관으로 근무했고 러일전쟁 당시 아버지가 일본 도쿄의 미국대사관 무관일 때 무관 보좌관으로 아버지를 도왔다. 러일전쟁 후 극동을 순방하는 아버지를 수행, 대한제국을 방문 고종황제를 알현하고 향로를 선물로 받았다고 한다. 맥아더가 그때 받은 향료를 항상 임지에 가지고 다녔는데 언젠가 분실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승만 대통령이 똑같은 국보급 향료를 주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맥아더가 태평양전쟁 직전 필리핀에서 극동 사령관으로 재임 시 일본의 침략 의도를 과소평가하였다.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습 직후 일본령 타이완에서 발진한 일본 항공대의 기습공격으로 필리핀의 항공력이 대부분 상실됐다. 맥아더는 루손섬에 상륙한 일본군에게 마닐라를 넘겨주고 바탄반도의 산악과 울창한 정글을 발판으로 방어작전을 폈다.

전세가 불리함에도 맥아더가 버티자 루스벨트 대통령은 맥아더를 호주의 서남태평양 사령관으로 전보 미국의 전쟁 영웅이 일본 포로가 되는 것을 막아야 했다. 맥아더는 웨인라이트 장군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탈출한 후 “나는 돌아올 것이다(I Shall return)”라는 명언을 남겼다. 웨인라이트는 일본군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항복했다. 수많은 미국과 필리핀군은 포로가 되어 ‘죽음의 바탄 행진’이란 치욕을 맛봐야 했다. 사령관 웨인라이트도 전쟁포로로 만주 등을 전전하면서 전쟁이 끝나고서야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풀려날 수 있었다. 맥아더는 웨인라이트와 함께 1945년 9월 2일 도쿄만에 정박한 전함 미주리호 선상에서 일본의 항복을 받았다.

금년은 한미동맹 70주년을 맞는 역사적인 해다. 70년 전 정전협정이 체결된 지 2개월여 후 1953년 10월 1일 “같이 갑시다(We go together)”라는 모토로 한미상호방위조약(한미동맹)이 체결됐다. 그해 11월 아이젠하우어 대통령을 대리하여 한국을 찾은 40세의 닉슨 부대통령에게 고령의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위해 도움을 청할 나라는 미국밖에 없고 도움을 줄 수 있는 나라도 미국 밖에 또 있겠소”라고 하면서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강조했다고 한다.

한미동맹은 지난 70년간 한반도와 주변 지역의 평화와 번영의 핵심축이 되어 한국은 세계 10위 경제 규모, 세계 6위권의 국력을 가진 선진국으로 성장했다. 첨단산업의 꽃인 반도체산업은 세계 정상에 와 있다.

한미 양국은 한미동맹 70주년을 기념 올해 미국 워싱턴에서 한미정상회담 개최와 함께 ‘미래를 위한 동맹(Alliance for the future)’을 제시하고 있다. 양국은 동맹의 범위를 기존의 정치 군사 경제 분야뿐만 아니라 과학기술 및 문화 차원까지 확장하고 우주 안보 및 우주경제까지 연결되는 ‘우주동맹’으로 확대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유주열 외교칼럼니스트
유주열 외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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