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기고] 눈을 뜨는 계절
[해외기고] 눈을 뜨는 계절
  • 황현숙(칼럼니스트, 호주 퀸즐랜드)
  • 승인 2023.04.03 09: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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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아주 오랜 옛날, 눈먼 사람에게 기적을 일으킨 사건이 있었다. 예수님이 땅에 침을 뱉고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눈먼 사람의 눈에 바르고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 하니 태생 소경이 눈을 뜨게 되었다는 유명한 성경 구절이 있다. 눈을 떴을 때, 그 소경의 환희와 기쁨은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세상은 온통 환한 빛으로 가득 찼음을 느꼈을 것이며 모든 사물이 아름답게 보였을 것이라는 지레짐작을 할 수 있다.

그 시대의 지배층은 환자가 치유되는 현상을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바라보았기에 기적을 불신하는 교만을 부렸다. 과학이 급속도로 발달한 현대사회에서도 경이로운 기적은 우리 주변에서 계속 일어나지만, 감동이 줄어드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우리가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는 지금의 세상에서도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고 부정적인 시선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매일 매일 발생하는 사건, 사고 뉴스를 접하면서 “왜, 저럴까, 꼭 그렇게 해야만 했을까?” 하는 한탄을 내뱉게 된다. 고집과 편견, 교만으로 인해서 사물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눈이 떠진다면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가진다.

항상 넓게 생각할 수는 없지만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 소소한 일을 먼저 생각하고 바라본다면 조금은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늘 급하게 서두르며 완벽주의를 자처하는 나에게 일에 휘말리지 말라는 충고를 들은 적이 있다. 마음을 비우고 손을 놓아버리라는 그 말이 참 쉬운 것 같지만 너무 어렵다.

사순절이 시작되었다. 재의 수요일을 경건하게 맞으면서 이마에 재를 바르는 의식을 가졌다. “사람은 흙에서 태어났으니 흙으로 돌아간다”는 간단하지만 오묘한 진리를 되새김하는 의미를 떠올리게 된다. 사순절은 우리의 삶을 뿌리부터 다시 한번 훑어보며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이라고 배웠다. 매일 요구되는 많은 일의 압박 속에서 잠시 벗어나서 몸과 마음에 쌓여있는 먼지를 털어내고 내면의 청소 시간을 가져보는 시기가 되었다. 잠시 자신을 되돌아보는 일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사순절 네 번째 주일미사에서는 제대 위에 장밋빛 촛불을 켜놓고 사제도 장밋빛 제의를 입는다. 지난 3주 동안 회개하고 보속을 했으니, 다가오는 부활을 미리 기뻐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사순절이 끝나고 가려졌던 눈앞의 안개가 걷히며 제대로 앞을 보고 판단하는 사리 분별의 눈이 뜨이기를 기다린다. 갓난아기도 백일이 되면 엄마, 아빠의 얼굴을 인식할 수 있는 영안이 생긴다니 모든 것이 자연의 섭리에 따르게 되는 모양이다.

눈을 뜨고 사는 사람보다 훨씬 더 큰 삶의 감동을 전해주는 눈먼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다. KBS 방송의 ‘이것이 인생이다’라는 프로그램의 오래된 동영상에서 찾은 “가리산의 눈먼 벌치기”가 살아온 인생 이야기이다. 이 실화는 소설과 동화책으로 각색되어서 출간되기도 했다. 내용은 강원도 홍천의 깊은 산골에서 세 자녀를 키우며 벌을 치고 사는 박광호 씨의 감동적인 삶을 소개했다. 그의 두 눈은 볼 수 없지만, 정상적인 사람보다 더 밝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온 사람이다.

일반적으로, 대부분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에 대한 고마움을 알지 못하고 당연시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앞을 보지 못한다는 자책감보다는 꿀을 제공해주는 벌을 친구삼아서 벌에게 감사하며 엄마 없는 자녀들을 산속에서 건강하게 키웠다. 인생은 수레바퀴와 같다지만 그의 인생길은 주어진 시간을 잘 견뎌낸 승리자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삶이 고달파질 때면 벗어나지 못할 거라는 갈등에 빠질 때가 있다. 그래도 주어진 자신의 운명을 묵묵히 받아들이며 체념보다는 희망을 품고 살아온 그분의 의지에 마음의 큰 박수를 보낸다. 세 자녀도 이제는 성인이 되어서 눈먼 아버지의 마음을 어루만져준다고 했다. 힘든 시간을 잘 견뎌내었지만, 본인의 아픔과 고통을 희망으로 바꾸어 낸 자신의 노력과 의지라고 여겨진다.

“생활은 가진 것으로 꾸려가지만 삶은 베푸는 것으로 이루어진다”는 윈스턴 처칠의 명언이 생각난다. 사순절은 이론으로 아는 것을 실천으로 옮기며 나를 돌아보고 마음의 눈을 뜨게 만드는 시간이다.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고 나도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잘 될 거야”라는 말이 떠오른다. 한낮에도 여전히 뜨거운 햇살이 땅을 달구지만 눈을 뜨는 계절은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우리 앞으로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황현숙(칼럼니스트, 호주 퀸즐랜드)
황현숙(칼럼니스트, 호주 퀸즐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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