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승의 붓을 따라] 끝없는 인연
[이영승의 붓을 따라] 끝없는 인연
  • 이영승 한국 수필문학가협회 이사
  • 승인 2023.04.20 08: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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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들면 추억을 먹고 산다 했던가? 칠순 고개를 넘으니 나이 탓인지 지난날 함께 했던 사람들이 자꾸 그리워진다. 긴 세월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수 없는 사람들과 인연을 맺게 되지만 퇴직 후에도 계속되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나는 퇴직 후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수시로 소통하며 지내는 두 후배가 있다. 생각할수록 소중한 사람들이니 이보다 깊은 인연이 또 있으랴.

A는 2004년 내가 지방 순환 근무로 대구에 발령받았을 때 함께 근무했다. 우리 부서 4명 차장 중 선임이었는데 업무 능력이 뛰어나 부서 내 어려운 일을 도맡아 처리했으며, 친화력을 겸비해 타 부서와 업무협조도 막힘이 없었다. 훗날 한 인물 하리라 예상했는데 역시 본부장까지 올랐다. 당시 나는 고참 부장으로 승격이 발등의 불이었는데 다행히 그해 말 승진했다. 당시는 협력업체의 민노총 파업이 심각하고, 우리 부서와 관련된 사옥 화재로 어려움이 많았는데도 이를 잘 감당해 준 그의 공로가 실로 크다.

B는 2011년 마지막 보직인 성남 지사장으로 부임했을 때 총무차장이었다. 이천지점에 초임 부장으로 갔을 때 신입사원으로 함께 근무했는데 15년 만에 다시 만났으니 이 또한 흔치 않은 인연이다. 총무차장은 내가 매사 도움을 받아야 하는 측근인데 성품이 진중하고 마음씨가 착해 늘 고맙고 미안했다. 연말이 되어 퇴직이 가까워지자 헤어지기 전에 기억에 남을 이벤트를 하나 만들고 싶었다. 고심을 거듭하다 그의 부부를 서울로 초청해 아내와 같이 워커힐 쇼를 보면서 식사했다. 별것 아닌데도 흔히 있는 일이 아니라 감동했는지 퇴직 후에도 한결같이 연락했다. 세월이 흘러 그는 지금 고참 차장으로 본사에 근무하고 있다.

세상은 참으로 좁아 수년 전 A와 B가 본사 같은 처의 처장과 차장으로 만났다. 그들이 대화하는 과정에 내 얘기를 했으며, 자연스럽게 셋이 소통하게 되었다. 요즘은 세 명이 카톡방을 만들어 친구같이 못할 얘기가 없다. 그런데 B의 부장 승격이 당면 과제인데 A가 관심을 기울이고, 내가 기도를 하는데도 요즘 회사의 인사 적체가 심해 아직도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A는 그사이 본부장으로 승진해 멀리 지방으로 전출했으나 우리의 카톡방 열기는 식을 줄 모른다.

얼마 전 B가 “골프를 배우고 있는데 셋이 필드로 한번 나가고 싶다”라고 전화했다. 요즘 실력이 향상되어 도전하고 싶다는 말로 들렸다. 그 사실을 바로 카톡방에 올렸더니 A가 세 사람의 생활 중간지점인 대구에서 라운딩을 추진하겠다고 했다. 내가 장거리 운전이 엄두가 나지 않는다며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자 B가 KTX를 타고 오면 자기가 올라오는 길에 동대구역에서 만나 함께 가겠다고 했다. 골프 역사 30년에 기차 타고 라운딩 가기는 처음이다. 그동안 A가 여러 차례 자기 근무지로 놀러 한번 오라고 초청했으나 너무 멀어서 가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셋이 함께하는 이벤트라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따라 팔공산 중턱의 하늘은 미세먼지도 없이 청명했으며, 기온 차이로 이제 막 피기 시작한 벚꽃이 가슴을 설레게 했다. 지난날의 추억을 되살려 이야기꽃을 피우며 마음껏 떠들고 공을 날렸다. 18홀이 언제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아쉬운 라운딩을 마쳤다. 석별의 인사를 나누고 팔공산 경사 도로를 내려오는데 19년 전 악몽이 되살아났다. 너무도 크고 어이없는 사고라 의도적으로 잊고 지냈는데 오늘 또 그 길을 내려오게 된 것이다.

2004년 승격해 상주 지사장으로 발령받자 A가 ‘이별의 이벤트’라며 후임 부장과 함께 이곳 팔공 CC에 골프 예약을 했다. 라운딩을 마치고 나니 전날 가슴이 설레 밤잠을 설친 때문인지 피로가 엄습했다. 피로를 풀려고 목욕탕 더운물에 한동안 땀을 빼고, 식사 중 맥주도 두어 잔 마셨다. 출발한 지 10분도 되지 않아 쾅! 소리에 눈을 번쩍 뜨니 내 차가 신호대기 앞차를 들이받았다. 정신 차려 밖으로 나가니 내 차 보닛이 반으로 접혀 앞을 가리고, 앞차 뒷부분이 크게 파손됐으며, 그 앞차도 뒤범퍼가 손상되었다.

음주에 졸음운전까지 했으니 시비가 붙으면 큰일 날 일이다. 재빨리 두 앞차를 옆으로 빼라 해 “잠시 다른 생각에 빠져 브레이크를 늦게 밟았다”라고 해명하고,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확약 후 명함을 주고 헤어졌다. 나중에 안 상식이지만 잠을 설치고, 더운물에 땀 빼고, 술을 마시는 행위는 모두 수면제를 먹는 것과 같은데 나는 그날 세 가지를 다 범했으니 졸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집에 도착하기 바쁘게 두 번째 앞차 운전자 남편의 전화가 왔다. 현장에서 부인은 보험회사 직원이라며 “다치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는데, 남편은 아내가 입원했다고 하였다. 자기는 개인택시 운전사라며 사고처리에 전문가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말라는 말은 위협으로 들렸으며, 부부가 다 사고처리 전문가이니 어찌해야 할지 앞이 캄캄했다. 음료수를 사 들고 병원으로 달려가니 밤 10시도 되기 전인데 베개만 달랑 있고 환자는 귀가하고 없었다. 거짓 환자가 분명했지만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사고 수습과정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명함을 준 것도 경험이 부족한 내 잘못이었다. 공직자 신분임을 안 상대는 이를 약점으로 합의에 순순히 응하지 않았으며, 어렵게 승격했는데 시끄러우면 ‘사업소장이 골프 치러 갔다가 사고를 냈다’라는 구설수를 면할 수 없기에 상대 요구대로 들어줬다. 차 한 대는 자차 보험이 되지 않아 내 부담으로 수리해줘서 피해액 합이 천 수백만 원에 달했다. 골프 한번 친 값으로는 기네스북에 오를지도 모르는 거액이다. 하지만 쌍방이 모두 다치지 않았으니 그만한 게 다행이다. 그 후 운전을 조심해 큰 사고가 없었으니 이 또한 더 큰 사고를 사전에 방지한 것인지도 모른다.

만남은 인연이지만 관계는 노력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속적인 만남은 자기에게 이로울 때만 가능한 게 인지상정이다. 내 나이 A보다 15년, B보다 20년 많으니 그들이 나를 만나 봤자 이로울 게 없다. 그런데도 함께 놀아주니 얼마나 감지덕지인가? 불가에서는 지나다 옷깃 한 번 스치는 것도 5백 겁 인연이며, 부부는 7천 겁 인연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인연은 몇천 겁이나 될까? 오늘도 우리의 인연은 자꾸 깊어지며 그칠 줄 모른다.

필자소개
월간 수필문학으로 등단(2014)
한국 수필문학가협회 이사
수필문학 추천작가회 부회장
전 한국전력공사 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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