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농암 종택에서 새운 밤
[여행기] 농암 종택에서 새운 밤
  • 이종환 기자
  • 승인 2011.10.03 17: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묵향(墨香) 속의 안동 봉화 영주 여행-

도산서원 앞의 버드나무. 자유스럽기 그지 없다.
청량산에서 안동호로 흘러드는 부내(汾江) 가에 강각(江閣)이라는 누각이 있다. 농암종택을 이루는 건물로, 종택 안채에서는 100여m 떨어진 곳에 고즈넉이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 닿은 것은 해가 뉘엿할 때였다.

“밤에 물소리를 듣더라도 경치를 떠올릴 수 있도록 하자고 서두른 거지요”

해 떨어지기 전에 닿도록 길을 재촉한 김도 선생의 설명이다. 산세가 병풍처럼 둘러싸서 마치 사방이 꽉 막힌 오지 같았다. 하지만 다음날 보니 큰 내가 뚫려 있었다. 내를 따라 난 ‘올레길’을 쫓아가면 도산서원에 닿는다고 한다. 농암종택도 그 인근에 있다가 안동호로 수몰되면서 이곳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이쪽으로 집을 옮긴다고 선친께서 고생하신 얘기를 들었습니다”

농암종택 안채에서 김도선생이 이성원 종손한테 말을 건넨다. 아침밥을 내오는 종부는 경주 양동마을 출신으로, 마음씨 좋아보이는 얼굴이었다. 벽에는 색바랜 매화도가 걸려있었다. 종손이 나서서 그림 속의 글귀를 설명한다.

“매화를 보는 법을 아는가. 내가 모른다고 하자 말을 잇는다.봄빛이 완연할 때 향기 그윽하게 하는 것은 인(仁)이요, 엄동설한에도 꿋꿋한 것은 의(義)요….”

종손의 조부가 성산에서 매화도를 구해 걸어놓고 즐기다가 지나가던 손님과 관매지술(觀梅之術)을 논하고는 그림에 옮겨 적었다는 것이다. 매화를 보는데도 오상(五常)이 있어서 인의예지신을 느낄 수 있다는 얘기다.

“종택체험을 하도록 개방하는 게 옳으냐는 얘기도 있어요. 유교는 이(利)나 상(商)을 중요하게 여기지 안잖아요”

이렇게 소개하는 종손은 “(종택을 개방해도) 떼돈 번다는 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해야겠지요” 라고 덧붙인다.

큰 종택을 종손부부 둘만 덩그마니 쓰기에는 아깝다. 일반 사람들이 종택 체험으로 우리 문화의 깊이를 이해하는 것은 권장할 일이다.

우리 일행도 그 덕분에 농암종택에서 하룻밤을 머물 수 있었다. 종택측에서는 '긍구당'에서 머물기를 권했다. 영천이씨 예안파 시조인 이헌 선생이 창건하고 농암 이현보 선생이 중수해서 손님맞이용 별당으로 사용한 곳이다.

하지만 우리 일행은 강각이 있는 애일당(愛日堂) 별채에 머물자는 뜻을 알려서 허락을 받았다.날을 아껴서 부모를 섬기자는 뜻을 담은 당호라고 한다.

부용대에서 바라본 하회마을
강각에서 듣는 물소리는 시시각각 바뀌었다. 해가 떨어지고 어둠이 깃들면서 물소리는 우레처럼 컸다가도 낙숫물처럼 가늘기도 했다. ‘용등호효(龍騰虎哮)’라는 중국 배갈 술병이 줄어들 때마다 물소리는 피아노 독주곡도 됐다가 큰 북이 동원된 난타 공연으로 바뀌기를 반복했다. 열하일기를 쓴 박지원 선생이 이날 함께 했다면, 강각에서 듣는 물소리 만으로도 족히 장편의 글을 지었으리라.

2박3일의 일정. 첫 행선지는 하회마을이었다. 겸암정사와 부용대에서 마을을 내려보고, 병산서원에서는 징비록을 떠올렸다.

도산서원으로 가는 길에 임청각을 들렀다. 만주 항일무장투쟁의 길을 열었던 석주 이상룡선생의 생가였다. 나라를 찾자고 전 재산을 처분해 만주로 간 기개에 자못 숙연함을 느꼈다.

도산서원에서는 앞 뜰 굽은 모양의 수백살된 버드나무를 보면서 이퇴계의 학문도 이같은 자유로움에서 나온 게 아닐까 생각했다.

온계종택도 거친 끝에 분강서원 옆의 농암종택에서 첫날을 유숙했다. 다음날 아침에는 분강 가를 산책한 뒤 청량산에 올랐다. 이름만큼이나 오르는 길도 맑고 고즈녁했다. 청량사 앞의 우람한 소나무가 인상적이었다.

임청각에서.
이어 찾은 봉화 닭실마을의 청암정은 누각을 에두른 연못이 눈길을 끌었다. 봉화에서 점심을 하고는 석천정사를 찾아서는 오수도 잠시 즐겼다. 청암정에서 미처 누려보지 못한 호사였다. 이날은 축서사에서 절방을 빌어 유숙했다. 나무관세음보살!

이튿날 아침 절 뒤의 문수산을 올랐다. 툭 트인 조망과 더불어 산파(山波)가 장관이었다. 뒤로 태백산이 버티고 있고, 옆으로 소백산맥이 달렸다. 그 사이 사이로 산줄기들이 첩첩이 이어져서 동서로 달리고 있다. 대지의 캔버스에 그린 동양화였다.

“태극의 중심이 문수산”이라고 김정남 선생이 산 정상에서 말을 꺼냈다. 이 산에 오른 것이 이번 여행의 화룡점정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예정에 없던 산행이었다.문수산의 흡인력 때문이었으리라.

산행을 마치고는 부석사로 향했다. 영주에 있는 천년 고찰. 축서사에서 보는 산파와는 다른 형태였다. 모양으로는 축서사에서 보는 것보다 부석사에서 보는 게 더 낫다는 게 김정남 선생의 말이었다.

무량수전을 받치고 있는 기둥을 카메라로 담았다. 천년의 무게를 굳건히 받치고 있는 나무. 금강송일까. 아니면 어떤 나무일까?

이번 여행의 화두는 애초 유교문화였다. 안동 봉화 영주의 종가와 서원을 돌면서 조선왕조 500년을 떠받쳐온 선비 문화를 흠뻑 느껴보자고 했다. 소수서원을 마지막 행선지로 한 것까지 그랬다.

하지만 청량사와 축서사, 그리고 결정적으로 부석사 덕분에 키워드가 ‘천년 문화의 뿌리’로 바뀌어 버렸다. 불교와 유교는 한반도 천년 문화를 이뤄낸 중요한 축이었다. 해외의 동포들과 2, 3세들도 이 여행을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의 친구인 변재수군이 내내 차를 몰고, 시중도 드느라 수고했다. 묵향(墨香) 어린 2박3일의 ‘청유(淸遊)’였다.
 

소수서원에서.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송파구 올림픽로35가길 11(한신잠실코아오피스텔) 1214호
  • 대표전화 : 070-7803-5353 / 02-6160-5353
  • 팩스 : 070-4009-2903
  • 명칭 : 월드코리안신문(주)
  • 제호 : 월드코리안뉴스
  • 등록번호 : 서울특별시 다 10036
  • 등록일 : 2010-06-30
  • 발행일 : 2010-06-30
  • 발행·편집인 : 이종환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석호
  • 파인데일리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월드코리안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k@worldkorean.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