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주의 ‘박정희·김대중’⑤] 부정선거와 4.19혁명
[강성주의 ‘박정희·김대중’⑤] 부정선거와 4.19혁명
  • 강성주 전 MBC 보도국장
  • 승인 2023.09.30 05:4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정희와 김대중은 한국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과연 후세는 이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강성주 전 MBC 보도국장이 박정희과 김대중을 재조명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가 심혈을 기울인 부분들을 연재로 소개한다.<편집자주>

1960년은 제4대 대통령선거가 열리는 중요한 해였다. 3월 15일에 실시되는 이 선거는 제4대 대통령과 제5대 부통령을 뽑기 위한 선거로 대통령보다는 부통령에 관심이 쏠린 선거였다.

우리나라에서 부통령(부대통령)제도는 1948년부터 1960년 제2공화국 수립 전까지 12년 동안만(제1공화국) 존속했다. 대통령 유고 시,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한다고 했지만, 국무회의 참석 권한, 의무도 없는 등 실제로 갖는 권한이 거의 없는 특이한 경우였다. 대통령-부통령-국무총리의 위계질서 속에서 실권 없는 부통령은 정치적 상징이 큰 자리였는데, 제1공화국 이승만 대통령이 고령(1875년생)인 관계로 주목을 받는 위치였다. 대통령과 부통령은 각각의 선거에 따라 선출되어서 대통령에 대해서 완전히 독립적이었다.

제1공화국에서 부통령은 이시영(1948~1951, 국회 간선), 김성수(1951~1952, 국회 간선), 함태영(1952~1956, 직선), 장면(1956~1960, 직선) 등 4명이 재임했다. 국회에서 간접선거로 초대 부통령을 선출할 때의 후보는 이시영(대한독립촉성국민회), 김구(한국 독립당), 조만식(무소속), 오세창(무소속), 장택상(무소속), 서상일(한국민주당) 등 6명이었다. 2대 부통령선거 때는 김성수(민주국민당), 이갑성(무소속), 함태영(무소속), 장택상(무소속), 지청천(민주국민당), 김창숙(무소속) 등이었다.

국민 직접투표로 실시된 제3대 부통령선거에는 이윤영(조선민주당), 함태영(무소속), 이갑성(자유당), 조병옥(민주국민당), 임영신(대한여자국민당), 백성욱(무소속), 정기원(무소속), 전진한(대한노동총연맹), 이범석(자유당) 등 9명의 후보가 나섰다. 제4대 부통령선거에는 장면(민주당), 이기붕(자유당), 윤치영(대한국민당), 이윤영(조선민주당), 백성욱(무소속), 이범석(무소속) 등 6명이었다.

1960년 3.15 선거 포스터. 여당은 “트집마라 건설이다” 야당은 “협잡 선거 물리치자”를 구호로 정했다. 야당 후보 조병옥 후보가 선거 한 달 전에 사망하는 바람에 사진이 게재되지 않았다.

미리 이야기하자면, 3.15 부정선거에 분노한 학생과 시민들의 항거가 이어지면서 4.19혁명이 일어났고, 그 분노 속에서 제1공화국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그래서 3.15 부정선거의 결과는 무효가 되고, 제4대 대통령선거는 4월 혁명 이후 개정된 헌법에 따라 60년 8월 12일 국회에서 다시 실시된다. 대통령의 장기 집권에 놀라고 실망한 국민들은 의원내각제로 헌법을 바꾸고, 대통령은 국민 직선제가 아니라 국회에서 간선(間選)으로 뽑도록 했다. 이 선거에서 윤보선(尹潽善, 재임 1960.8~1962.3)이 제4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이 태풍 같은 엄청난 변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박정희와 김대중은 또 한 번 길이 엇갈린다. 3.15부정선거가 그 길의 출발점이 된다. 우리가 처음에 살펴봤지만, 길은 길에 연하여 이어지기 때문이다.

‘일사불란’(一絲不亂, 한 오라기의 실도 엉키지 아니함)을 선호하는 한국의 여당인지라, 자유당은 일찌감치(1959.6) 대통령 후보로 현직 이승만을, 부통령 후보로는 국회의장 이기붕(李起鵬, 1898~1960)을 지명했다. 자유당은 이승만(1875~1965) 대통령의 4선과 이기붕의 부통령 당선을 욕심내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과 이기붕 국회의장, 1960. 4. 19 혁명이 일어난 뒤 이기붕 일가는 성난 데모대를 피해 경기도 포천의 군부대를 거쳐 경무대 별관으로 피신한다. 4월 27일 이승만이 하야하고, 28일 새벽 당시 육군 소위였던 이기붕의 장남 이강석은 가족들을 권총으로 살해하고 자신도 자살한다. 이강석은 자식이 없는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로 입적된 상태였다.

야당 민주당은 ‘개혁적인’ 신파(新派)와 ‘보수적인’ 구파(舊派)로 갈려, 파벌싸움을 하느라 자유당보다 후보 확정이 다섯 달이나 늦었다(1959.11).

1954년의 사사오입 개헌을 계기로 야당인 민주국민당(민국당)과 야당계 무소속 의원들은 범야 연합전선을 형성해, 이듬해 11월 ‘호헌동지회’라는 국회 교섭단체를 구성해 대여투쟁에 나섰다. 이 호헌동지회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신당이 민주당이다.

민주당은 민주국민당의 보수파(조병옥, 윤보선, 김준연, 김상돈, 신익희, 조재천, 김판술 등)와 자유당의 소장 탈당파(김영삼, 현석호 등), 흥사단(장면, 정일형)과 대한부인회, 무소속 일부(곽상훈, 장면, 유진산, 이철승) 등 반이승만 세력이 모여 1955년 9월 18일 창당된다. 한 정당에 여러 계파가 모여 있다 보니, 이합집산이 계속되고, 파벌싸움이 이어졌다.

호헌동지회도 조봉암의 신당 참여 문제를 놓고, 이를 반대하는 자유민주파(조병옥, 장면, 김준연, 정일형)와 찬성하는 민주대동파(곽상훈, 송방용, 김수선, 신도성)로 갈려 논쟁을 거듭하다, 자유민주파만이 참여하고, 민주대동파는 별도의 정당 창당으로 나서서 조봉암계의 진보당과 서상일계의 민혁당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민주당은 호헌동지회의 자유민주파와 자유당 이탈세력 등으로 출발하게 된다. 참여 의원은 민국당계 13명, 무소속동지회계 10명, 무소속 5명, 자유당계 5명 등 모두 33명이었다. 모체가 됐던 호헌동지회 소속 의원은 60명이었다.

이렇게 보면 민주당은 민국당의 기존조직을 바탕으로 한 민국당의 조직확대와 비슷하게 됐고, 1956년 대통령. 부통령선거를 앞둔 ‘선거용 정당’의 성격도 갖고 있었다. 민주당은 창당 이듬해의 제3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곽상훈(국회부의장) 등 무소속의 지지를 얻은 장면은 신파, 민국당계도 결집해 구파라는 파벌을 형성하게 된다. 구파는 한민당, 민국당을 거친 보수적인 인사들이 다수로 민주당의 주류가 되고, 흥사단계. 자유당 원내파 등이 비주류로 신파를 형성했다. 구파의 대표적인 인사는 신익희, 조병옥, 백남훈, 김준연, 윤보선 등이고, 신파는 장면, 곽상훈, 박순천, 정일형, 한근조 등이었다. 김대중은 자서전에서 자신이 속한 신파를 ‘개혁적’이라고 부르고 구파를 ‘보수적’이라고 불렀다.

민주당은 대통령 후보에 구파의 조병옥(趙炳玉, 1894~1960)을, 부통령 후보는 신파의 장면(張勉, 1899~1966)을 선출했다. 야당의 이러한 분열상을 보고, 그냥 있을 자유당이 아니다.

자유당은 민주당이 분열 후유증을 수습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건국 이래 쭉 5월에 실시해 오던 대통령선거를 3월로 앞당기는 꾀를 내, 3월 15일 정·부통령선거를 하기로 하고, 선거 준비에 들어갔다.

선거 주무부서 내무부(현 행정안전부)는 전국 각급 기관장에게 구체적인 부정선거 방법을 지시했다. ①4할 사전투표 ②3인조 또는 5인조 공개투표 ③완장부대 활용 ④야당 참관인 축출 등을 통해 자유당 후보의 득표율을 85%까지 올리도록 했다. 물론 엄청난 규모의 선거자금도 긁어모았다.

그런데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은 선거운동 도중, 신병이 악화돼, 이를 치료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2월 15일 미국에서 숨을 거둔다. 선거 한 달 전, 후보등록도 끝난 시점에서 민주당의 실망과 좌절은 엄청났다.

진짜, ‘화불단행’(禍不單行)이 맞는 말인가? 민주당은 4년 전 제3대 대통령선거(1956)에서도 신익희(申翼熙, 1894~1956) 후보를 유세 도중에 잃었다. 투표를 불과 열흘 앞두고서였다. 열흘 뒤 실시된 선거에서는 신익희 후보에 대한 추모표로 볼 수 있는 무효표 185만 표가 나왔고, 민주당 후보가 없는 선거에서 진보 성향의 조봉암(曺奉岩,1898~1959) 후보는 216만 표를 얻어, 이승만을 놀라게 했다. 신익희 추모표와 조봉암이 얻은 반(反)자유당 표가 400만 표를 넘었다는 사실은 504만 표를 얻고 당선된 이승만에게는 위협으로 느껴질 만했다.

해공(海公) 신익희(1892~1956) 죽산(竹山) 조봉암(1898~1959) 유석(維石) 조병옥(1894~1960)

두 차례 선거에서 야당 후보의 돌연한 사망으로 쉽게 당선되는 이승만은 3.15 선거에 별 부담이 없었다. 문제는 부통령선거였다. 고령의 대통령(85세)에게 유고(有故)가 발생하면 대통령직을 승계하는 부통령 자리인지라, 자유당은 현직 부통령인 장면(재임: 1956.8~1960.4.25)에 비해 상품성이 떨어지는 이기붕의 당선을 위해, 준비해둔 부정선거 계획을 각본대로 실행에 옮겼다. 전국에서 사상 유례없는 부정선거가 실시됐다.

선거에서 자유당의 충성파들은 40%를 사전투표하고 3인조 또는 5인조로 공개투표를 자행하는 등 공무원과 관변단체를 동원하여 온갖 부정을 저질렀다. 또한 자유당에서 부통령으로 출마한 이기붕(李起鵬)의 표가 100%에 육박하는 결과가 나오자 이를 79%로 하향 조정하는 희극적인 행태도 벌였다. 이렇게 선거가 부정으로 얼룩지자 이에 항의하는 시위가 대구, 부산, 서울, 마산 등 대도시에서 벌어지는 가운데, 마산에서 시위 도중 최루탄을 맞고 숨진 고등학생 김주열(金朱烈)의 시체가 바다에서 발견되자 국민의 분노는 절정에 이르렀다.(한영우, 『미래를 여는 우리 근현대사』, 경세원, 2016)

4.19 관련 기록물 1,019건이 2023년 5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 됐다. 이 가운데 당시 사태를 보도한 신문호외 등 신문 자료 6건이 포함됐다. 야당 민주당이 3.15부정선거의 불법·무효를 선언했다는 호외(1960.3.15.)와 4.19 희생자 명단을 실은 호외(1960.4.21)도 포함됐다. 나머지는 이승만 대통령의 사임서 등 정부 문서와 시위 관련 사진 등이다.[사진=동아일보]

이런 과정을 거쳐 3.15 부정선거 규탄 시위는 정권퇴진 시위로 격화되고, 4.19혁명으로 이어져, 이승만 대통령이 4월 27일 하야했다. 4.19 다음 날인 4월 20일자 NYT 사설은 이렇게 썼다. 제목은 「한국에서의 소요사태」(Turmoil in South Korea)였다. 미국은 4.19 학생혁명을 어떻게 보았고,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한국에서 대중봉기의 초기 단계에 준하는 시민들의 시위가 한바탕 휩쓸고 지나갔다. 아무 책임도 지지 않는 학생들의 데모로 시작된 이번 시위는 한국의 주요 도시에서 수천 수만 명이 참가하면서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이미 80여 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시위에 참가한 시민들 대부분은 결단코 공산주의자는 아니다. 그러나 공산당 첩자들이 시위 군중들을 선동할 수 있고, 더 중요한 것은 이 첩자들이 10년 전 한국을 침략했고 지금은 더 유리한 조건에서의 침략 재개를 노리고 있는 북한이나 중 공의 공산주의 정권으로부터 공공연하게 혁명 프로파간다를 방송을 통해 지원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시위 사태가 계속되면 공산당 첩자들에게 이런 기회를 줄 수도 있다.

지금으로서는 계엄령 선포와 통행금지, 언론의 검열과 대학과 각급 학교의 휴교 등 국가비상사태의 선포로 현 상황은 정리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을 방어하기 위해 유엔군의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미국이 이번 사태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한 것은 잘한 일이다.

잘 알듯이 한국은 유엔의 보살핌 속에서 탄생했고, 미국은 3년간의 6.25 전쟁에 서 33,000명의 생명을 바쳐 한국을 방어했고, 지금까지 25억 달러 이상의 경제 원조를 제공해왔기 때문이다.

이런 견지에서 본다면, 미국은 이승만 대통령과 모든 한국인에게 “현재와 같은 시위 사태가 가져올 결과를 심사숙고”하고 “법과 질서를 회복하도록” 당당하게 말할 자격이 있다. 또 미국은 이 대통령과 한국민들에게 지체 없이 국민의 “정당한 불만”을 달래주고 최근의 소요사태를 불러온 “자유민주주의에 어울리지 않는 강경한 조치들”을 그만두도록 요구할 수 있다.

국민들의 불만은 이승만 대통령이 4년 임기 대통령직에 네 번째로 당선된 3.15선 거가 ‘조작된’ 선거였고, 경찰의 테러 속에서 진행됐다는 야당의 주장에서 주로 비롯된다. 그러나 이 대통령의 자유당만큼 반공(反共)주의 정당인 야당 민주당의 분노는, 선거 직전 자당의 후보가 워싱턴에서 불행하게도 별세하지 않았더라도, 압도적인 승리를 예상하던 이승만 대통령을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민주당의 분노는 민주당 출신의 현직 부통령을 이긴 이기붕 부통령을 향하고 있다. 자유당은 85세로 고령인 대통령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경우, 자유당에서 후임 대통령을 승계할 수 있는 부통령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무리수를 저질러 왔다. 하지만 훨씬 더 오래된 민주주의 통치 역사를 가진 나라들조차도 때때로 선거 조작이 있어왔고, 국가의 존재 자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거친 폭동은 선거 부정을 해결하는 최선의 수단이 아님이 분명하다.

이제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 정권, 야당인 민주당 모두가 함께 모여, 여태까지보다 더 잘 작동하는 민주주의를 고안해 냄으로써 한국인 자신들의 희생과 한국을 위해 많은 자유진영 국가들이 쏟은 희생이 가치가 있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미국 뿐아니라 세계의 많은 신문의 사설이 그렇지만, NYT의 이 사설도 ‘공자님 말씀’이었다. 냉전이 한창 진행되던 그 시기에 미국의 유력지가 설사 현실이 아무리 좋지 않더라도 ‘레닌(Lenin)의 방식으로’ 또는 ‘모택동(毛澤東)의 방식으로’ 세상이나 현실을 바꾸어 나가라고 주장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 상황은 지금도 마찬가지 아닐까?

필자소개
MBC 보도국장, 포항 MBC 사장,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서울지국장 역임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송파구 올림픽로35가길 11(한신잠실코아오피스텔) 1214호
  • 대표전화 : 070-7803-5353 / 02-6160-5353
  • 팩스 : 070-4009-2903
  • 명칭 : 월드코리안신문(주)
  • 제호 : 월드코리안뉴스
  • 등록번호 : 서울특별시 다 10036
  • 등록일 : 2010-06-30
  • 발행일 : 2010-06-30
  • 발행·편집인 : 이종환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석호
  • 파인데일리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월드코리안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k@worldkorean.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