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신줄 훌 잡아당기며 북청北靑의 찬바람 떼가
매서운 입김을 하루 종일 물을 뿜듯 불어놓아
문고리도 쩍쩍 얼어붙는
숯가마 속 같은 밤이다
제 몸조차 못 녹이는 카바이트 푸른 불은
한겨울 검은 하늘에 헛총만 자꾸 쏘아대고
왕겨 속에서 얼굴 내민
가게 앞 꿀 사과들
감기 기운에 빨갛게 코가 달아올랐다
손자 얼굴이 사과 같고
사과가 손자 같아
주인 몰래 이쁜 놈 하나 금덩이처럼 감추고
겨울 풍속風速보다 더 빠르게
달아나는 비틀 걸음
빙판보다 위태로운 할머니의 잰걸음을
종 종 종 뒤따라가던 옥상위의 조각달이
알았다는 듯 고갤 끄덕이며
빙그레 웃고 돌아선다
- 자시 제1집 ‘처음만난 그날처럼’ 78쪽 -
총동문회 부회장직을 맡게 되어서 40여년 만에 모교를 찾아 가는 길이었다. 대학교 바로 앞에 전철역이 있었지만 일부러 한 정거장 앞서서 내렸다. 학교 다닐 때 걸었던 옛길을 더듬어 보고 싶었다. 행길은 보나마나 많이 변했을 것 같아서 혹시나 하며 일부러 뒷골목 길로 접어들었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이 곳 저 곳엔 그래도 옛 모습이 조금씩 남아있었다. 골목 길 중간쯤 눈에 익은 사거리도 그대로였다. 약방이 있던 자리엔 음식점이 영업 중이었다. 대각선 맞은편에 있던 과일가게는 미용실로 변해 있었다. 그 과일가게 자리를 보는 순간 문득 떠오른 할머니 생각으로 발길이 멈추어 졌다.
대학시절 할머니가 시골에서 올라 오셔서 한 학기 동안 돌보아 주셨다. 몹시 추웠던 어느 겨울 밤이었다.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를 마치고 늦게 돌아오니 ‘많이 춥지? ’ 하시면서 할머니는 붉고 먹음직한 사과 하나를 이불 속에서 꺼내 주셨다. 그 사과를 받아 달게 먹으면서 ‘돈 있었어요?’ 했더니 할머니는 그냥 웃고만 계시다가 ‘너 주고 싶어서 잘 말했더니 가게에서 그냥 주드라’고 하셨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나중에 말씀 하시기를 그 당시 그 순간 돈은 없었다 했다. 하지만 손자를 주고 싶은 마음이 넘쳐 사과 하나를 가게에서 그만 슬쩍 하여 치마에 몰래 싸 오셨던 할머니. 할머니는 25년 전에 돌아 가셨다. 그 길을 이 날은 혼자서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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