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Garden] 라디오야 나랑 놀자
[Essay Garden] 라디오야 나랑 놀자
  • 최미자<미주문인협회 회원>
  • 승인 2012.03.13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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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 전 어느 날, 로스앤젤러스의 어머니 방에서 본 조그만 라디오. 1960년대 한국에서 유명했던 이장희 가수가 창립했던 라디오 코리아는 어머니의 절친한 친구였다. 모양도 멋도 없는 조그만 직사각형 라디오에서는 반가운 한국말과 노래가 흘러나왔다.

조용필의 ‘허공’ 노래의 가사를 음미하면서 그리도 행복해하던 칠순의 어머니 얼굴. 이민 초기의 나도 뜻밖에 미국 로스앤젤러스에서 듣던 한국말 라디오 방송은 한 마디로 감동이었다.

본인의 뜻과 달리 자식들이 사는 곳으로 이민을 오던 친정어머니의 말년처럼 남편의견을 따라 미국으로 나도 강물처럼 흘러왔다. 이사를 자주 다니는 군인 아내의 자리가 미묘하여 한때는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뇌까렸다.

젊은 날은 눈물 밥을 씹으며 배운 공부 끝에 이룬 교육자로의 긍지를 품던 두 날개도 접었는데 또 이역만리로 이삿짐을 꾸려야 하던 얄궂은 내 운명. 가까이서나 멀리서 늘 정신적으로 의지하던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삶에 대한 회의가 때때로 밀려와 우울한 날도 많았다. 색다른 문화와 언어, 얼굴이 전혀 사람들 속에 섞이어 살아가야 하는 이국생활의 날도 종종 두려웠다. 억센 내 팔자라며 체념하며 살았다.

그런데 이국땅에서 긴 세월 뿌리를 내리며 살아가노라니 그런 생각들이 차츰 달라지고 있는 게 아닌가. 때론 국위 선양을 하는 한국인으로 작은 칭찬도 받고 긍지도 느끼면서 홀로 웃는 날도 있으니 말이다. 만나는 미국사람 중에 가끔 나에게 일본사람이냐고 물으면 조금 속상했다. 인상이 좋은 동양여성은 일본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그들의 편견. 대부분 미국인은 일본에 대하여는 지식도 많고 호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한국에 대한 것들은 거의 몰랐다.

지금은 핵 만들기로 협박하는 말썽꾸러기 북한과 함께 소니사를 앞지른 삼성과 엘지의 전자제품으로 남한도 많이 알려졌다. 1988년 세계올림픽이 열릴 때만 해도, 미국 텔레비전으로 보신탕을 끓이는 서울의 뒷골목 풍경이 화면에 나와 우린 수치스러웠다.

많은 한인이 모여 사는 로스엔젤러스 같은 도시에서는 전혀 영어를 사용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이곳 샌디에고는 3만이 넘는 한국인이 있다지만 살아가려면 영어가 필요하다. 우습게도 해마다 모국어에 대한 나의 애착은 더해만 간다.
 
한국 신문과 책을 읽고 가족끼리 한국어로 말하는 하루 생활은 정말 행복하다. 또한 여전히 완벽한 이해는 되지 않아도 이민초기처럼 광고가 없는 유익한 공영미국방송인 라디오의 영어 뉴스도 아침마다 듣는다.

요즈음은 두 개의 라디오를 틀어놓고 이쪽저쪽 듣기도 한다. 로스앤젤러스에서 출력하는 한국방송을 샌디에고에서도 들을 수 있다니. 종일 위성중계로 한국 텔레비전을 보는 사람들도 많다. 저녁이면 두세 시간 정도 텔레비전 연속극을 나도 즐긴다. 그래도 나는 아직도 라디오가 좋다.

라디오를 들으면서 손으로는 다른 일도 병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치를 담거나 설거지를 하면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뽕짝 음악을 따라 콧노래도 흥얼거리며 나도 모르게 슬그머니 엉덩이를 흔든다. 그래, 인생은 그런 거야. 날마다 바르게 살아가지만 가끔은 사기꾼과 철면피 사람을 보아야 한다. 또 자기실수를 상대방에게 거꾸로 뒤집어씌우는 억지꾼도 만나야 한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지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재미있는 노래 가사처럼 한바탕 웃고 용서하며 답답함도 물처럼 흘려보내야 한다.

참, 인생에는 우리가 모르는 시간표가 있는 것 같다. 두 번째 출간한 나의 수필집을 소개해준 라디오 방송국과 우연히 인연이 되어 라디오 프로그램을 하나 진행한 지도 벌써 일 년이 지났다. 학창시절 중고등학교에서 방송반원으로 활동했던 디제이 추억으로 돌아가 연출과 진행의 일에 푹 빠져 있다.

대학교 카니발 축전에서도 교사 시절 음악회 때도 누군가가 나에게 마이크를 쥐게 하더니만 또 시작이다. 멋쟁이 친정어머니가 만약 살아계신다면 애청자가 되어 조언도 해 주실 텐데 퍽 아쉽다. 라디오를 세계 어느 곳에서도 인터넷방송으로 들을 수 있는 현대의 놀라운 세상을 저세상의 어머니는 아실까.

이민 올 때 귀중하게 들고 온 백여 권의 책들도 톡톡히 한 몫을 하고 있다. 알찬 프로그램을 위하여 음악 시디와 좋은 책을 구매하는 일은 아깝지 않은 투자이다. 고마운 청취자들과 함께 영혼의 쉼터가 되어준다면 더 바랄게 없다. 많은 동포가 고국에서 못 이룬 꿈을 이루기 위하여 열심히 일하는 고단한 타국의 이민 생활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조용한 음악과 좋은 책 속의 글귀들을 뽑아 여러 날을 보내며 편집하면서 온 정성을 붓는다.

나이를 먹으나 젊은 사람들이나 텔레비전과 컴퓨터, 전자게임에 이제는 아이 폰에 빠져서 혼을 놓고 있다. 신기하고 달콤한 기계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중독자가 되어간다. 날마다 이메일과 휴대전화기를 들여다보지 않으면 불안하여 안절부절못한다. 과용하면 건강을 해치고 뇌를 손상한다고 전문가가 충고를 해주어도 믿지 않는다.

첨단과학이라는 괴물에 끌려가다 언젠가는 한계를 느낄 것 같다. 한 사람 나만이라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 자, 내 친구 라디오야 뜰로 나가자. 잡초를 뽑으면서 고요한 마음으로 즐겁게 나랑 놀자꾸나. 감사하고 감사한 하루여! 

 


[필자 소개] 교포월간지 ‘피플 오브 샌디에고’ 주필역임, 수필집 ‘레몬향기처럼(2007년)’과 ‘샌디에고 암탉(2010년)’를 출간했고 한국문인 및 미주 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 하고 있는 재미수필가. 샌디에고 라디오코리아(www.sdradiokorea.com)에서 '최미자의 문학정원‘ 매주 금요일 연출과 진행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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