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 안창호 측근 정봉규 가족 토론토 42년 거주 밝혀져
도산 안창호 측근 정봉규 가족 토론토 42년 거주 밝혀져
  • 토론토=송광호 특파원
  • 승인 2012.03.29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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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요한 선생
일제 강점기 도산(島山) 안창호 최측근으로 흥사단(1913년 창립)과 북미실업주식회사(1917~1927) 재무부장이였던 정봉규(1881~1951)씨 외아들 정요한(94세, John Chung, 사진)옹과 부인 장인선(87세)씨가 42년째 토론토에 살고 있음이 밝혀졌다.

이민 2세인 정요한 옹은 지난 1918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나 11세 때 부모와 함께 평양으로 이주해 살았다. 그 후 6.25전쟁 때 일본과 미국에서 거주하다 지난 1970년부터 토론토에 정착해 오늘까지 은퇴생활을 하고 있다.

정 옹에 따르면 부친 정봉규 씨는 대한제국 말 군인이라고 들었다고 했다. 당시 일제의 조선군대 강제해산으로 군인을 그만두고 첫 미국이민 노동자로 고용돼 고향 평양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대부분 조선노동자들이 인천항에서(미국행으로) 떠날 때 정씨는 평안남도 진남포(여권번호 249번) 항에서 배를 탄 것으로 여권에 기록돼 있다.(‘진남포’는 해방 후 북한에서 도시이름을 ‘남포’라고 개명함.) 당시 25세 청년이었던 정씨는 대한제국 말기(1905년/광무9년) 최초의 미국이민자가 돼 하와이 오아후(Oahu)섬에서 새로운 해외생활이 시작된다.

1903년부터 사탕수수 밭에 고용계약으로 시작된 수천명조선인 이민자들 중 한명이 된 것이다. 정씨는 하와이에서 2년 계약기간이 끝나자 미 본토인 캘리포니아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정씨의 하와이 이주 뒤 일제는 1905년 을사보호조약 체결을 통해 조선인의 미국이민을 차단함으로 이후 미국행이 완전 중단됐다)

정씨는 당시 33세의 노총각 나이로 평양출신 신부(현미선, 서울 진명여고)와 사진결혼으로 맺어졌다. 8년간 노동으로 열심히 모은 돈으로 부인 현씨와 부인오빠를 초청해 1914년 샌프란시스코 한국감리교회에서 식을 올렸다.

정씨는 무엇보다 자신의 문맹을 깨치기 위해 하와이 이주 때부터 한글과 영어공부에 몰두했다. 학교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그는 아무리 힘든 노동일이 끝난 뒤에도 밤늦도록 한글과 영어 익히기 등에 피나는 노력을 했다고 전해진다.

정씨는 그 즈음 도산 안창호를 만난 것으로 추정된다. 도산이 1938년 조선 땅에서 60세 나이로 타계 시까지 평생을 두 사람은 가족같이 가까운 사이였다고 한다. 도산은 미국 땅은 물론 정씨가 다시 역이민(1929년)한 평양에도 가끔 집으로 찾아왔다.(도산은 1962년 대한민국장, 건국공로장 훈1등 추서됨.) 이는 도산이나 정씨고향이 같은 평안남도(평양)출신이라 개인적으로도 더욱 친밀한 관계가 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요한 옹이 어린 시절 LA를 방문할 때는 항상 LA도산 집에 기거했다. 그때 도산 아들인 고(故)필립(Philip/나중 헐리우드 유명배우)과 만나던 기억을 전했다. 정씨는 비록 학교교육은 못 받았지만 사업에는 뛰어난 재질을 보였다. 남보다 먼저 농장경영 등 자영업에 뛰어 들어 캘리포니아에서는 한인 이민자로서 상당한 비즈니스 역량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또한 도산에 흠뻑 매료되면서 민족독립운동을 위해 세계를 동분서주 하는 도산을 옆에서 경제적으로 돕는 일에 적극 앞장을 섰다. 정씨는 1922년 LA근교인 다이누바(Dinuva)지역에 동양 그로서리 스토아를 첫 개업했다. 정씨의 이 가게는 ‘북미최초의 한인식품점’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1925년에는 캘리포니아 스탁턴(Stockton)지역으로 자리를 옮겨 훨씬 규모가 큰 한국식품점을 오픈했다.

도산은 이 가게에도 몇 번 찾아와 환담을 나누었다고 한다. 이 그로서리가게는 반세기가 훨씬 지난 오늘날까지 같은 식품점으로 존재하고 있다. (첫 주인이 정씨에서 일본인으로, 70년대엔 중국인으로 50여 년간 3번 주인이 바뀌었으나, 그 뒤로는 확인을 못했다고 함)

한편 도산이 흥사단과 민족금융기관 설립목표로 ‘북미실업주식회사’를 1917년 설립하자 정씨는 재정부장으로 위촉됐다. 북미실업주식회사는 당시 1,2차에 걸쳐 한인자본금 9만5천 달러를 마련, 민족기업을 일으키기 위해 애썼으나 결국은 실패로 돌아간다. 우선적으로 농업투자경영에 손댄 것이 당시 극심한 경제공황으로 인해 물거품이 되고 만 것으로 미주한인이주 자료에 나타나 있다.

정씨는 부인과 슬하에 1남2여를 두었다. 이민자 2세로서 토론토의 요한(죤)옹과 2명 누님(베다, 애나)이다. 누님들은 수년전 전부 세상을 떠났다. 큰 누님 베다 남편은 전 연세대 3,4,5대 총장을 오랫동안 역임한 고 박대선 씨다.

정요한 옹은 송광호 특파원이 국가보훈처에 정봉규씨에 대한 독립유공자 신청을 했으나 현재 보류된 상태다. 보훈처의 한 심사원은 “정봉규씨에 관해선 조사결과 미국거주당시 도산선생의 재정부장 활동기록이 있다”고 국가유공자자격을 인정했으나 “정씨가 조선으로 돌아간(역이민)뒤 애국활동에 대한 자료들이 없다”며 자료보완을 요구한 상태다.

현재 정요한 옹 부부는 일생 독실한 크리스챤으로, 장남 로버트(68세)는 캐나다 빅토리아에, 딸 헬렌(64세)은 미국 미시간근교에 살고 있다.

▲ 정봉규선생 가족(아들 정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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