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가 있는 칼럼] 길 없이도 만나는 길
[詩가 있는 칼럼] 길 없이도 만나는 길
  • 이용대<시인>
  • 승인 2012.04.02 09: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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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

가고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길에서
바람 부는 들판에 핀 꽃이었다가
비에 젖은 가랑잎이 되기도 하는 우리
 
낯선 얼굴로 마주친 인연이
명주실보다도 길고 질긴 것이 되어
날이 흐릴 땐 속으로 들어와 있고
해 나는 날은 그림자가 된다
 
숙명으로 맺어져
나눌 수 없는 의미가 되어
일생을 횡단하는 철로를
함께 걷고 있다.

[길 없이도 만나는 길]

 
오랜만에 가을 길을 나섰다. 2010.11.04, 경기도 안산에 있는 모 문학사를 찾아 가는 길이였다. 가끔 가는 그 길은 늘 혼자였다. 그 때마다 전철 밖으로 나타나는 들과 숲과 집들. 모처럼의 시골풍을 느끼게 했다. 도심에서 조금 벗어나는 길이였지만 어느 땐 새삼스러우면서도 낯선 모습으로도 어려 왔었다. 

창밖으로 줄지어 나타는 플라타나스 잎이 늦가을 색으로 점차 물들고 있었다. 차 칸에 드문드문 앉아있는 사람들도 가을 여정인 것 같아 정다웠다. 조용한 표정들에서 그것을 읽을 수가 있었다. 약 1시간 30분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고잔古棧 역에 다다랐다.

서너 사람만 금새 내려놓은 열차는 프렛 홈을 미끄러져 갔다. 사라져버린 전철의 꼬리 뒤의 역사驛舍는  텅 빈 농촌 같은 정적만 서늘한 바람과 함께 감돌았다. 계단을 내려섰다. 출입구를 나와 오른 쪽 마당으로 천천히 걸었다. 투명한 햇살이 서울의 것과는 많이 달랐다. 역 광장의 왼편으로 돌아섰다.

그 곳엔 폭이 좁은 철로가 조경용으로 놓여있었다. 오랜 비바람에 녹슬었고 팻말엔 '수인선 협괘 철로' 라고 씌어져 있었다. 뉴스나 신문에서 보았던 희미한 기억이 떠올랐다. 규모가 작고 단출한 모습으로 굉음을 울리며 인천과 수원을 오가던 옛 철로 모습이었다. 직접 타본 일은 없었다.

70년대 수도권 농촌 사람들의 애환이 서렸다는 그 협괴 철로를 안산시에서 만들어 둔 것이었다. 단풍이 짙게 물드는 조경목들의 행렬을 쫒으며 앞쪽을 멀리 바라보았다. 약 200미터 정도의 길이로 협괘 철로의 모형이 만들어져 있었다. 침목을 밟으며 풀 섶을 헤치고 천천히 발을 옮겼다.

묵묵히 걷던 모형 철로가 거의 끝나가는 지점에 이르렀을 때 공사를 마치며 적어놓은 몇 줄의 글발이 걸음을 멈추게 했다. '길 없이도 만나는 이 곳. 질기고 가는 긴 명주실처럼 아주 오래된 인연으로 새로운 기억을 만나는 곳, 기억된 것과 기억될 것이 만나는 여기 끊어진 철로처럼 만남은 항상 아쉬움을 전제로 한다' 라고 쓰여 있었다.
 
그랬다. 우리의 행로는 애초부터 눈에 확 드러나도록 정해진 길은 아니었다. 전혀 보이지 않는, 볼 수도 없는 길을 만들며 살아오는 동안 우리는 많은 사람을 만났다. 언제나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 놓으며 멀어져 갔던 옛날이다. 깊게 얇게 기억될 것들의 만남이 앞으로의 시간 속에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어떤 만남들일까. 괴로운 일일까 혹은 기쁜 일일까..아니면 애석한 일들이 될 것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모든 것은 철로처럼 출발점이 있기 때문에 종착역이 있다는 사실이 슬펐다. 길은 없었지만 길을 만들며 가는 우리들. 모형 철로 옆에 만들어 놓은 긴 의자에 앉았다. 먼 길을 걸어 온 이에게 여기서 잠시 쉬었다 가라고 했음인가. 그 곳에서 앞뒤가 잘라져 있는 수인선 협쾌 열차 모형을 좀 더 거리를 두고 바라보았다.

철로鐵路. 숨 가쁘게 달려왔고 달려가야만 하는 우리의 길이 그 곳에 무언의 상징으로 놓여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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