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친구의 헌책방
[데스크칼럼] 친구의 헌책방
  • 박완규 국장
  • 승인 2010.07.03 13: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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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신림13동에서 헌책방을 운영하는 대학 동창 친구가 있다. 종종 책방 골목에 자리한 가게에 들러 따뜻한 한방차를 함께 마시곤 한다.

친구 가게엔 항상 마음을 부드럽게 가라앉히는 음악이 있다. 차를 마시고 음악을 들으며 바라보는 골목 풍경이 참 좋다. 사방이 책으로 빙 둘러싸여 있는 느낌은 거나하게 차려진 식탁 앞에 앉아 우쭐해 하는 기분이다.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느낌, 가만있어도 흥겹다.

신림13동 책방 골목 근처로 이사온 후 나에겐 이곳이 즐거운 놀이터이다. 책이나 가게뿐만 아니라 골목 사이에 길게 오르는 계단과 오래된 간판들, 튀김과 도넛집, 특히 밤엔 가로등 불빛과 늘어진 차양의 조화가 무척 아름답다.

냄새, 오래되고 묵직한 향을 이 곳에선 맡을 수 있다. 볕을 맞으러 계단 모퉁이에 나와 앉은 할머니들과 꼭 마주치지 않더라도 이곳엔 살갑고 정감있는 정서가 흐른다.

참 길게만 보였던 어린시절 골목이 지금 보면 너무 짧고 보잘것없던 기억처럼 이곳도 그렇다. 좀 구경할라치면 금방 길의 끝이 드러나 버려 싱겁기도 하다. 대형 마트의 규모에 익숙한 요즘에 이 곳 책방 골목은 그냥 시골이나 변두리의 상가처럼 초라해 보인다.

예전에 가끔 들렀을 때처럼 사람이 북적대는 풍경도 거의 사라졌다.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들이 가끔 들러 책을 구입하거나 근처 동네 사람들이 그냥 지나가거나 어떻게 소문을 듣고 찾은 몇몇 학생들이 눈에 띌 뿐이다.

책도 명성에 어울리는 종류를 갖추고 있진 못하다. 잡지가 좀 싼 가격에 팔리고 있고, 중고 만화책들이 쉽게 눈에 보인다. 주로 참고서를 싸게 파는 것으로 이 골목이 유지된다는 건 대부분의 가게가 참고서 위주로 책을 진열해 놓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가끔 특이한 자료나 오래된 책을 찾는 이들 중엔 실내 인테리어용으로 사용할 종이를 찾는 경우가 많다. 책방이 점차 시장의 잡화점처럼 되어 간다는 느낌이 들어 섭섭해지기도 한다.  친구의 헌책방은 이 골목에서 유일하게 고서를 주로 취급하고 있다. 이 친구가 가장 아끼는 서적, 가보가 된 책들은 바로 가족의 흔적이 묻어 있는 책들이라 한다.

하루에도 몇 번 중고서적을 짐차에 싣고 가게로 팔러 오는 행상들이 있는데 그들에게 매입한 책들 중에서 어쩌다 형이나 누나, 삼촌이나 이모, 친척들의 이름이 적힌 책이 발견되기도 한단다.  예전에 내가 알던 사람이 읽었던 책을 다시 만나는 기쁨, 그 책이 유랑했을 길고 고달픈 삶을 상상하는 즐거움과 만나는 순간이 된다. 작가의 친필 사인이 있거나 메모의 흔적들, 오래된 편지나 사진이 끼어 있는 책을 발견할 때의 흥분도 표현이 힘들다.

후배 중에 은행원이 하나 있다. 그 친구가 한 때 수집한 지폐들을 보고 재미있어 한 적이 있다. 지폐에 남긴 글들, 빽빽이 지폐의 앞뒤를 채운 사랑 고백들, 누군가에게 전하고자 지폐에 새긴 마음을 보며 신기해하며 즐겁게 얘기한 적이 있다. 누군가를 향한 메시지가 남겨진 지폐와 책은 우리가 평상시엔 무심히 보는 존재이다.

신림13동 책방 골목을 추억의 장소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이 있다. 그런데 책방들 스스로 그 추억을 버리고 있는 듯 하다. 운명의 책들은 사라져 가고 번듯한 새 참고서가 책장을 가득 채워가고 있다.

책을 구경하고 책에 대해 얘기하는 시간도 짧아져 가고 있다. 그냥 '뭐 있나요' '아니요' 이렇게 대화는 끝나고 만다. 하루 온종일 앉거나 서서 책을 훑어볼 자리도 여유도 없다.

얼마 안 있어 친구가 이 골목에서 헌책방 사진전시회를 연다고 한다. 전국의 헌책방 모습과 책을 읽고 구경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이라고 한다. 그 속엔 아마 세련되지 않은 우리의 평범하고 소중한 모습이 담겨 있을 것이다.

우리를 먼 시간과 공간으로 이끄는 오래된 책들의 역사가 그려져 있을 것이다. 책은 타고난 중매쟁이다. 친구 덕분에 난 새로운 연애의 상상으로 흥겨울 것 같다. 평생 책을 가까이하며 책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친구의 책방은 양심과 청렴과 인고의 바탕위에 검증된 진실만으로 재외동포 사초를 써나가고 있는 내게 큰 위안이 된다.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은 독서만으로 무더위를 이겨낼 수 있는 지혜를 후손들에게 일깨워줬다. 너나 없이 책을 좀 더 가까이 하는 우리 재외동포 사회가 됐으면 싶다.

박완규<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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