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3] ‘아버지의 6.25 일기’
[연재-3] ‘아버지의 6.25 일기’
  • 서지원 전 텍사스오스틴상공인회장
  • 승인 2012.09.03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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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지원 회장
필자 서지원씨는 텍사스 오스틴에서 부동산 컨설팅업에 종사하고 있다. 고향은 진주. 그는 1970년대 후반 자신이 경영하던 화장솔 공장을 위한 오더를 받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정착한 케이스다. 그가 소장하고 있던 선친의 전쟁일기를 본지에 공개했다. 그의 어린 시절 경험이기도 하다. 이를 본지에 연재한다.<편집자주>

1950년 7월 30일
비는 주룩주룩 내리고 있다. 외삼촌은 내일이면 문산 길이 막힐는지 모르니 곧 고향으로 떠나야겠다고 하신다. 이웃 사람을 구해 지게에 짐짝 하나와 재봉틀을 얹어 떠나시면서 통영서 피난을 하게 되면 외조모님을 모시고 섬으로 들어갈 것이라 하셨다. 비는 멎었고 어머니와 함께 시내로 들어갔다.

손수레에 짐을 싣고 말죽고개를 넘으려 하는데 다시 비가 억수같이 퍼붓고 미군은 길을 막고 못 가게 한다. 피난민은 줄을 이어 올라오는데 미군은 공포를 쏘기 시작한다. 모두 기겁을 하고 되돌아가고 우리도 손수레를 돌려 짐을 풀고 교통 차단이 해제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시내 공기가 다소 완화된 듯했다.

트럭 한대가 돌아다니며 전황은 우리에게 유리하게 되었으니 군경을 신뢰하고 안심하라고 외치고 있다. 몇 시간이 흘러갔다. 차단이 해제되었다는 말을 듣고 쌀 한말을 팔아 비를 맞으며 어둑할 때에야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언덕길을 오르 내릴 때 아내는 여러번 미끄러져 옷은 황토 투성이가 됐다. 이때 개양 정촌 쪽에서 이곳으로 대포를 쏘고 있으며 포탄은 불꼬리를 달고 머리위로 휙휙 날아간다. 집으로 가니 여고 김선생 가족은 도동서 기관총 사격을 당하고 이곳으로 옮겨와 있다.

모두 부상은 없었으나 목숨을 앗아갈 뻔했던 탄환 한 개를 내 보이며 영원한 기념품이라면서 두 눈을 지그시 감고 깊은 감회에 잠겨든다. 우리는 대식구가 되었다. 김 선생이 5명 , 이형이 6명, 우리가 8명 이리하여 도합 19명의 유랑민은 방 한개 마루 하나에서 누은 듯 앉은 듯하여 이 밤을 새워야할 서글픈 신세가 되고 말았구나.

1950년 7월 31일
김 선생은 가족을 데리고 월하로 떠났다. 이곳이 불안하면 월하로 오라하고는. 산등에 올라보니 말죽고개는 줄을 이은 피난민으로 하얗다. 도동 쪽에서도 이곳으로 강을 건너오고 있다. 백사장에 천막을 치고 피난한 사람 중 한 가족 5명이 몰살되었다고 한다. 하룻밤 사이에 사태는 돌변하였다. 국군은 모두 후퇴하였고 진주는 인민군 수중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조금 뒤에 미군과 국군이 진주를 폭격한다. 검은 연기는 불덩어리를 안고 하늘로 치솟고 있다. 사범학교가 첫 희생이 되었다. 석양 때 2대의 비행기가 저공 기총 소사를 하는 바람에 모두 이불을 둘러쓰고 보리가마니에 의지하여 숨을 죽이고 떨기만 했다.

1950년 8월 1일
진주 상공은 벌겋게 불타고 있다. 진주호텔, 경남 자동차회사, 제일식량 공장이 파괴되고 많은 식량이 불에 타며 근방에 있는 숱한 사람들이 불더미 사이를 누비며 식량을 옮기고 있다는 것이다.

1950년 8월 2일
이른 아침부터 수대로 편성된 비행기가 달음산을 넘어 자골 상공을 거쳐 진주로 달려간다. 귀로에는 자골 위를 낮게 떠돌고 있다. 자골은 죽림에 쌓여 있는 보잘 것 없는 부락이다. 하늘에서는 죽림 때문에 잘 보이지 않겠으나 이곳에 인민군이 있나 싶어 저렇게도 공중을 돌며 뭣을 잡으려는 모양이다.

1950년 8월 3일
이곳에서 이십리 길인 달음산 너머에 강을 건너면 대곡면 마전이란 곳이 있다. 그곳이 피난처로는 안성맞춤이라며 허형은 그곳으로 옮기자고 한다. 허형은 짐이라고는 별로 없으니 식구 5명이 떠나는 것은 힘겹지 않겠으나 우리는 그럴 형편도 못된다. 오후에 허형이 있는 집으로 가니 이미 마전으로 떠나고 없다.

고마운 사람 마음씨 좋은 친구, 언제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지 마음이 허전하구나. 어둑어둑할 무렵 진주서 들어오는 사람에게서 우리 집 일대가 불에 타고 있다는 말을 듣고 정신이 아찔하였다. 이호우씨와 같이 허겁지겁 강을 건넜다. 나루선도 자취를 감추고 볼 수 없다. 말죽고개를 넘으니 진주는 천지가 불바다가 되어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짐을 이고지고 넘어온다. 집들은 와르르 무너지고 있으며 벽돌 기왓장 전선 나무 유리조각으로 덮여있는 참혹한 이 전쟁터 군데군데 우뚝 솟아있는 잔해의 벽돌집 상업은행을 목표로 폐허를 헤치고 집터를 찾아 간다.

포플러(미루나무)는 타고, 문주 하나가 벌겋게 타면서 반쯤 넘어 가고 있다. 용광로처럼 이글이글 달아 있는 저것이 우리 것과 외삼촌 살림살이의 화신이구나. 화려했던 문화의 전당 진주극장은 너무도 잔인한 몰골이 되어있고 도립병원과 우체국은 아직도 연기를 뿜어내고 있다.

전쟁은 우리들의 모든 것을 앗아가고 말았다. 지금 나는 육신도 정신도 거지가 되어 이 처참한 모습을 암울하게 보고만 서 있을 뿐이다. 잃은 것은 되돌아 올수도 없다. 나만이 겪는 일이라면 이 원통함을 어디에다 호소하리요, 이제는 어쩔 도리도 없는 일, 앞으로는 이 가공할 참화 속에서 우리 가족들이 살아남는 것뿐이다.

목숨이 있으면 살아갈 길도 오리라. 힘없는 발길을 돌렸다. 불꽃이 사라진 데는 어둠만 깔려 있다. 발바닥 밑에서는 유리가 와삭와삭 깨어지고 다리는 불탄 쇠줄에 휘감긴다. 인민군 몇 사람이 지나간다. 누가 무엇을 하거나 무관심한 태도다. 처음으로 인민군을 본 나는 싸움에 이긴 군인으로서는 너무도 겸손한 데가 있어 보인다. 동아제재소 앞을 지날 때 김시동군을 만났다.

김군은 남로당에 자금을 제공했다하여 불려 다녔는데 신변의 불안을 느끼고 영오면 쪽으로 은신했다가 가족이 도동에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 가는 길이었다. 오는 길에 외삼촌 일행을 만나 우리가 자골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다.

장대동 일대는 별 피해가 없어 보이며 동아제재소는 기계를 소개하느라고 여념이 없다. 막막한 사막을 걷는 이 심정을 따스하게 해주는 것은 그래도 우정인가 보다. 김군은 1941년 4월 이곳에다 재목점을 차릴 당시 윤영선씨의 소개로 안 친구다.

그 당시 김군은 강재목점에 근무하고 있으면서 틈만 있으면 와서 판매에 대하여 친절하게 가르쳐 주곤 했었다. 목재 통제 조합이 될 때에 일본인 강씨와 김군과 나 3인이 같이 있게 되었다고 나를 찾아와 무척 기뻐하던 김군. 그날 밤엔 둘이서 얼마나 술을 마셨던지, 우리는 그 직장에서 해방을 맞았으며 몇해 세월을 순수하게 사귀어온 좋은 친구이다. 우리는 말죽고개에서 서로의 건강과 가족의 무사함을 빌면서 굳은 악수를 나누며 이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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