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4] ‘아버지의 6.25 일기’
[연재-4] ‘아버지의 6.25 일기’
  • 서지원(전 텍사스오스틴상공인회장)
  • 승인 2012.09.29 0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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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원 회장
필자 서지원씨는 텍사스 오스틴에서 부동산 컨설팅업에 종사하고 있다. 고향은 진주. 그는 1970년대 후반 자신이 경영하던 화장솔 공장을 위한 오더를 받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정착한 케이스다. 그가 소장하고 있던 선친의 전쟁일기를 본지에 공개했다. 그의 어린 시절 경험이기도 하다. 이를 본지에 연재한다.<편집자주>

1950년 8월 12일
이른 아침 포성에 잠을 깼다. 문산과 쏙살 사람들이 자골로 몰려든다. 삼면이 강이요 죽림이 자욱한 자골 사람들은 어디로 피할 엄두를 못 내고 있다. 비행기는 나지막하게 미친 듯이 날고 있다. 죽음과 삶이 범벅된 순간이다. 마음은 한없이 쓸쓸해지고 처량해져 가기만 한다. 이 죽림에 소이탄이라도 던지면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장이다.

앉아서 날벼락을 맞고 있을 수는 없다. 마음은 초조하고 한시가 급하다. 비장한 각오로 어머니 양자 내가 1조가 되고 태원모 는 양숙이를 업고 점숙이와 2조가 되고 태원이와 지원이가 3조가 되어 적은 식량과 현금 몇 푼씩을 나눠 갖고 의복 한두벌씩을 넣어 짐방을 하고는 신을 단단히 신고 사태가 돌발할 시에는 각조 뛸 대로 뛰어 피난 하기로 준비를 갖추었다.

삶에도 지쳐있는 우리는 소리 없는 눈물만 흘러내린다. 우리는 명이 있으면 살아남아서 진주 허물어진 집터에서 만날 것이다. 모든것을 운명에 맡기고... 석양이 질 때 어디서 난 소문인지 달음산과 문산 쪽에서 쏙살과 자골로 향하여 포격이 있을 것이니 빨리 피난하라는 것이다. 인민군은 강을 건너 진주로 후퇴하고 있다한다. 안절부절한 마음으로 재실에 있는 반도병원 조선생을 찾아가니 조 선생은 뒤 언덕에 굴을 파고 있다. 조 선생 역시 어린것이 넷이나 되니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재실에 같이 있는 사람 말은 자기 가족을 다시 진주로 옮겨놓고 낮이면 하수도에서 지내는데 하수도에는 피난민으로 꽉 차있다고 한다. 밤은 깊어만 가고 자골은 공동 묘지처럼 썰렁하고 무서워져만 간다. 언제 잠이 들었든지 포성에 놀라 깨었을 때는 포탄의 섬광은 머리 위를 날아서 강 건너 쪽으로 사라져 가고 있다.

1950년 8월 13일
아침부터 포성이 쿵쿵 들려온다. 마을 사람들은 정신을 가다듬고 아침밥을 짓고 있다. 오늘 두 마리째 닭을 잡았다. 한마리는 호우씨에게 팔고 한마리는 며칠 전에 잡아먹었다. 오늘 잡은 닭은 사온지 1년이 되는 암탉이다. 제가 깐 새끼를 9마리나 죽이고 한마리가 살아서 엄마를 따라 왔다. 깐지 두달이 다되어가는 새끼는 여태껏 병을 치르느라 크지도 않고 병아리로 그냥이다. 엄마를 잃고 종일 큰닭들에게 버림을 받으며 외로이 모이를 찾는 모양이 측은하다.

이젠 병아리 외에 새달이면 굵직한 알을 낳을 암탉 3마리가 있다. 처음 닭을 잡던 날 참아 닭을 볼 수 없어서 고개를 돌리고 목을 비틀었다 한참 만에 두 눈을 휘감으며 날개를 퍼드득 거리고 두 다리를 발발 떨며 축 늘어지는 가엽은 모습을 보았다. 오늘도 암탉은 흰 창만 남은 두 눈을 감으며 애처롭게 숨을 거두고 만다. 무더운 바람이 캄캄한 죽림을 쐐 하고 지나가자 커다란 포성이 울려온다.

포탄은 왼쪽 등 넘어 용심이란 데에 떨어지는가 보다. 마을엔 일제히 혼란이 일어난다. 자골 최대의 위기가 온 것이다. 죽림의 오솔길은 뛰쳐나온 사람들로 비좁다. 양자까지 짐방을 메고 등으로 올라갔다. 하늘에는 시꺼먼 구름이 덮혀 있고 강물은 희미한 띄를 두른 양 졸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이리로 몰려와서 우왕좌왕하고 있다. 우리는 칠흑 같은 비탈길을 더듬어 내려갔다. 골짜기마다 검은 그림자로 차있다. 겨우 포푸라 나무가 널어선 언 덕밑 모래위에 자리를 깔고 양자와 양숙이를 재웠다.

아무래도 옆에 고인 물이 반사되는 것이 꺼림칙하여 다시 자리를 나루선 닿는 산기슭으로 옮겨 뛰는 가슴을 가까스로 진정하면서 착잡한 마음을 걷잡을 수가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새벽녘은 되었을까 포성은 멎었다. 한사람 두사람 자리를 털고 집으로 돌아간다. 우리도 캄캄한 등을 넘어 집으 로 들어가니 우리방에는 이댁 친척되는 할머니가 자고 있다. 깨울 수도 없고 우리는 쭈그리고 앉아 날을 새워야 했다. 새벽녘에는 쏘나기가 쏟아졌고 주인집 설거지를 도와주었다.

1950년 8월 14일
피난온 지 벌써 20일이 된다. 집집마다 차있던 피난객들이 어디론지 뿔뿔이 흩어져 가고 몇 세대 밖에는 없는 모양이다. 가난한 마을이라 한되백이 식량을 구하려 해도 먼 길을 가야한다. 아침부터 몰아치던 비바람은 낮이 되어서야 그쳤다. 몇 시간 동안 이나마 비행기 꼴을 않 보니 모두 제 얼굴들을 가진 것 같다. 탁류는 백사장을 덮고 도도히 흐르고 있다.

1950년 8월 15일
해방 5주년이 되는 날이다. 일제의 압정에서 벗어나 우리민족은 얼마나 감격의 눈물을 흘렸으며 목이 터져라 고래고래 독립만세를 불렀던고, 국토는 단절되고 한민족은 두갈래로 나뉘어 이렇게 죽이고 죽고 강토는 폐허가 되어가고만 있구나. 먼 훗날 우리 후손들 에게 남겨둘 것은 무엇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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