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공통분모
[수필] 공통분모
  • 이복희<수필가>
  • 승인 2012.10.05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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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복희 수필가
청도 소싸움 축제를 다녀온 얼마 후, 그가 난데없이 말했다.
“망원렌즈가 얼마나 하지?”
뜨악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그가 렌즈를 사러 가자며 서둘러 나섰다. ‘아니, 저 양반이 뭘 잘못 먹은 건 아니겠지.’ 그의 뒤를 좇아가며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닐까. 의구심까지 들었다.

봄이라고 하기엔 이른 3월 아침이었다. 회사에서 청도 소싸움축제를 보러 가는데 그가 내 보물을 가지고 가겠단다. 내 보물을 애물로 여기지 않았던가. 다친 마음이 날을 세웠다. 그냥 디카를 가지고 가지. 왜 사용법도 모르면서 내걸 가지고 가려느냐. 그거 장만 할 때 당신이 한 말은 까맣게 잊었느냐며 비아냥거렸다.

“당신은 쓸데없는 짓을 하니까. 그러지!”
“뭐가? 쓸데없는 짓이란 말이얏.”
“어떤 아줌마가 누드사진을 찍으러 다닌 다냣?”
‘에구! 저 좁쌀영감.’ 당신도 한번 가보라며 반은 아줌마들이라고 했지만 그는 나를 ‘별난 아줌마’로 낙인을 찍고 휭 나가버렸다. 순간 집안이 진공상태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그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 보았다. 그의 염려는 다 우리 가정을 위한 것 아닌가. 생각을 바꾸니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 그에게 카메라를 가져다주겠다고 전화를 했다. 회사의 디카를 가져가면 된다고 오지 말란다. ‘그럴 거면 처음부터 그러던지.’ 고쳐먹은 마음은 어디로 가고 꼬인 마음이 선수를 치지만 벌떡 일어선다.

내 보물을 운전석 옆 자리에 모시고 그의 회사로 차를 운전해 가는 마음이 가볍다. 카메라가 나에게 잘하고 있다고 씽긋 미소 짓는 것 같다. 회사 앞에 서 있는 그가 왠지 작아 보인다. 그 알량한 자존심에 카메라는 됐다고 가져가지 않겠단다. 준비해 간 간식거리만 들고 가려는 그에게 카메라가방을 건넸다. 꼭 삐친 자식 달래는 기분이다. 마지못해 가져가는 듯한 그의 뒷모습을 보며 피식 웃음이 나왔다. 마음이 가벼워졌다.

작년, 카메라 때문에 일주일간 냉전을 벌였다. 세미누드촬영대회에 꼭 참가하고 싶은데 디카로는 촬영이 금지 되어 있었다. 그와 상의 없이 거금을 들여 카메라를 덜컥 사 버렸다. 반대가 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말도 없이 대회에 참가하느라 종일 집을 비웠다.

그는 가정에 소홀하고 카메라 둘러메고 나돌아 다니는 꼴을 못 보겠다고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카메라를 자기 눈앞에 꺼내 놓지도 말라고 했다. 눈칫밥 먹듯이 카메라를 사용했다. 그럴수록 그것에 대한 애착이 다른 물건을 대할 때와는 사뭇 달랐다. 그가 모르게 사진 공부를 하러 다녔다.

전업주부 15년차. 남편에게 자식에게 나의 모든 열정을 다 쏟아왔다. 그가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지위가 높아가는 것이 뿌듯했고 자랑스러웠다. 세상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경제가 어떻게 되어 가는지는 관심 밖이었다. 나의 주파수는 오로지 가정이라는 테두리 안에 맞춰져 있었다. 내 삶의 성취감은 내가정의 행복과 맞물려 있었다.

아이들이 커갈수록 나를 필요로 하는 시간이 줄었다. 그도 늘 바쁘고 피곤하다는 핑계로 집안일 외에는 대화가 뜸해졌다. 내가 그의 바깥일에 관심을 가지고 얘기하려면 무시하는 듯했다. 그는 커 가는데 나는 자꾸 작아지는 느낌이었다. 우울증에 걸리지 않을까. 허망하게 나이만 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나 자신은 어디에 있는가, 내가 왠지 초라해 보였다. 말로만 듣던 ‘빈 둥지 증후군’ 증세가 나에게도 나타는 것이 아닌가. 나를 위해 뭔가를 해야만 했다.

지역복지센터로 출근을 하다시피 했다. 관심이 가는 강좌는 망설이지 않고 수강을 신청했다. 누구엄마, 누구집사람 이라고 불리던 호칭에서 내 이름 석 자 “이 복 희”로 당당히 불려졌다. 어색하기도 했지만 뿌듯했다. 꽃꽂이, 야생화 분재, 수지침, 영어회화, 글쓰기, 사진촬영 등 새로운 것을 배우고 알아가는 기쁨에 흥겨웠다.

그 중 사진촬영이 문제가 되었다. 사진 촬영은 이곳저곳 명승지를 찾아다녀야한다. 결혼 후 가족을 놔두고 나만의 외출은 생각지도 않았다. 아니다. 나 혼자서 외출할 일이 없었다. 그러던 것이 사진촬영을 접하고 나서 나만의 시간을 갖고자 했다. 나의 생활반경이 넓어지자 그는 지레 겁을 먹고 나를 묶어 두려고만 했다.
청도에 간 그가 카메라 작동을 어떻게 하는지 전화를 해 왔다. 사진촬영에 관심을 보이는 그가 싫지 않았다. 차근차근 아는데 까지 설명을 했다. 또다시 전화가 와서는 조목조목 묻는다. 대답을 하면서 점점 더 흐뭇해져서 얼굴 가득 웃음꽃이 피었다.

우리가 함께 취미생활을 하면 얼마나 좋으랴. 서로 앞만 보고 바삐 살아왔다. 이 나이쯤 되면 자신을 되돌아 볼 때다. 준비 없이 중년을 맞은 부부들이 엉뚱한 데서 헛헛한 마음을 채우려고 하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은가. 부부가 같은 취미 활동을 하는 것은 의사소통의 방법이 되기도 하고 서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공통분모가 많을수록 친밀감과 안정감도 더해질 것이다. 노년이 되어서도 단조로운 생활에 활력이 되지 않을까.

다음날, 그는 청도 소싸움 축제에 같이 가자고 했다. 기꺼이 따라나섰다. 그 앞에서 당당히 셔터를 눌러댔다. 찰칵거리는 소리가 우리들이 마음을 열고 입을 맞추어 내는 음악처럼 들렸다. 우리는 또 하나의 공통분모를 가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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