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5] ‘아버지의 6.25 일기’
[연재-5] ‘아버지의 6.25 일기’
  • 서지원(전 텍사스오스틴상공인회장)
  • 승인 2012.10.06 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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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지원 회장
필자 서지원씨는 텍사스 오스틴에서 부동산 컨설팅업에 종사하고 있다. 고향은 진주. 그는 1970년대 후반 자신이 경영하던 화장솔 공장을 위한 오더를 받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정착한 케이스다. 그가 소장하고 있던 선친의 전쟁일기를 본지에 공개했다. 그의 어린 시절 경험이기도 하다. 이를 본지에 연재한다.<편집자주>

1950년 8월 16일
비행기는 진주 도동 문산 쪽을 폭격하고 있다. 자골은 오늘 까지 위협 속에 도사리고 있기는 했으나 한번도 피격 되지는 않았다. 우리가 있는 바로 앞에 문산으로 가는 오솔길이 있고 적은 등을 넘어 5리 가량가면 쏙살이 있다. 쏙살까지는 차길이 있고 이길은 금산면 소재지까지 뻗어 있다. 이곳에서 자골로 오려면 왼쪽의 작은 등을 넘어야 하고 문산에서 이곳으로 오려 해도 조동 쏙살을 거쳐 산길로 들어와야 한다. 배수의 강물과 앞으로 옆으로 가려있는 나지막한 산이 자골로 하여금 좋은 피난지로 만들어 놓았다.

1950년 8월 17일
어머니는 여고 사택으로 옮기자고 하신다. 학교 뒤에는 방공굴이 있어 별 걱정은 없겠고 또 외삼촌께서 가꾸어두신 남새밭도 있고 하여 찬거리도 장만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언제 또 폭격을 당할지 마음이 내키질 않는다.

1950년 8월 18일
종일 비행기는 날지 않는다. 점숙이가 시내로 들어갔다. 밤에는 달음산 넘어에서 포성이 들려온다.

1950년 8월 19일
낮에 점숙이는 돌아 왔다. 교장 사택은 벽은 구멍들이 나 있고 방바닥 장판까지도 걷어가 버렸다한다.

1950년 8월 20일
주인집 작은 사위 식구들이 옮겨 왔다. 우리는 잠시 피해 있다가 떠나려 한 것이 어언 한달이 다되어간다. 식량도 장도 내일이면 바닥이 난다. 한 3일은 연명할 수있는 밀과 밀가루가 있을 뿐이다. 현금은 7천4백원이 있다. 떠날 때는 주인집에 인사라도 해야겠고 짐을 옮기는 비용도 있어야 겠다. 일사의 바람은 기계 값 잔금으로 성냥이나 밀가루를 받을 것뿐인데 이것이 지금의 인심으로선 가능할 것인지 모르겠다.

1950년 8월 21일
새벽에 비행기는 날아와 강 건너 마을 인지 진주인지 부시고 쏘고 하기를 밥 때 까지 계속 한다. 서울서 황한웅 형이 돌아왔다. 남원까지 걸어와서 그곳서 진주 소식을 들었다 한다. 백형인 황한철씨와 박상묵 재종형은 서울서 잘 있다고 한다. 가족의 안위가 걱정되다가 무사한 가족을 만나니 그 희열은 짐작 하고도 남겠다. 2~3일 내로 진주로 옮길까 생각한다며 아랫방 하나를 비워주겠다고 같이 가자한다. 고맙기 한이 없다. 이집 작은 사위는 전에 앓던 골막염으로 전란 뒤에는 치료를 못 받다가 마침 사천에서 이곳으로 피난 온 김 의사를 만나서 치료를 받고 있다. 김의사는 따님이 오면서 약품을 많이 가져 왔다며 환자들도 꽤 많이 찾아오고 해서 비교적 여유 있는 생활을 하고 있다. 이마을에 김 의사 같은 마음씨 좋은 분이 온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르겠다. 피난 와서 당장 돈을 벌수 있는 직업은 의사와 이발사 인가보다. 나는 김 의사에게 피난이 아니고 피서라고 농담을 하고는 웃었다.

1950년 8월 22일
이댁 큰 따님은 알고 보니 면장인가 면서기로 있었다는 차갑게 보이는 사람의 소실이 되어 있다. 이사람이 오늘 와서 너무하지 않느냐는 등 가슴이 울컥하는 말을 한다. 앞으로 더 있다가는 이사람에게 어떤 봉변을 당할지도 모른다. 할머니 큰 따님은 우리가 마음 언짢게 여길까 미안한 표정들을 하고 있다. 저녁밥을 먹고 집을 구하려 시내로 들어가려는 참에 시내에서 온다는 손씨를 만났다. 예배당과 배돈병원 그리고 봉래동 일대가 파괴 되고 불바다가 되었고 피난처에서 되돌아온 많은 사람들이 희생이 되었다 한다. 호우씨 가족은 어떻게 되었을까 걱정스럽다. 손씨의 처남 식구는 며칠 전 집현면에서 기관포탄에 내외는 골이 깨어져 즉사하고 3살 난 아이는 입이 째어졌고 7살 난 남아는 무사하다는 것이다. 고아가 된 이 아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자라 갈수 있을 것인지.

1950년 8월 23일
폭음에 잠이 깨었다 모기장을 걷고 핫이불을 덮어 쓴다. 조금은 마음이 놓인다. 낮이 되니 비행기는 오지 않는다. 어머니는 점숙이를 데리고 십리길인 문산 피난민이 살고 있는 데로 가시어 보리두말과 백미 한말을 팔아(구입) 이고 오시느라고 이만 저만 고생을 하셨다. 주인댁에 옷감 몇 벌과 큰 암탉 2마리도 다 드렸다.

1950년 8월 24일
강 건너 백사장에 3세대의 천막이 있었다. 며칠 전에 기관총 사격을 당하고는 어디론가 가버리고 없다. 죽은 사람은 없었는지, 비봉 카페 가족은 급기야 피난길을 떠나면서 아무것도 가져나온 것이 없었고 이마을 친위 집에 신세를 지고 있다가 강 건너에다 천막을 치고 호박과 과실로 연명해 왔다는데 지금은 어디로 갔을까. 강물은 하룻밤 사이에 황토색이 되여 이 사람들이 살던 자리를 덮고 있다. 어머니와 함께 점숙이를 데리고 말죽고개를 오르니 여기 저기 벽보가 붙어 있다. 인민군에게 통영 소식을 물으니 잘 모른다. 현재 싸움은 부산, 진해 지구라 한다.

집터로 가니 김영규씨 어머니가 와 있다. 묻은 것을 파낼 수는 없다. 재제도구와 묻은 장소 위에다 묶어둔 양철을 옮겨 덮었다. 호우씨는 새 가래를 삼각형으로 묶어 세워 주위를 양철로 둘러치고 안에 자리를 깔고 한가하게 누워 있다. 어제 공습에 호우씨 들어 있는 집 지붕이 일부 날아가고 옆집 노파는 즉사했다고 한다. 점심은 강군 집에서 먹었다. 강군 집도 여러 군데 구멍이 뚫려 있다. 전폭기는 어느새 날아와서 금성국민학교와 이 부근 일대를 난타하고 있다. 비행기가 사라진 뒤 박태영씨댁과 김화선씨를 찾아보고 말죽고개로 가는 소로길로 들어가니 집집마다 인민군이 차 있다. 마치 한증막에 들어있는 것 같다. 고개를 넘을 때 비행기는 번개처럼 날아와 머리 위를 돌고 있다. 5미터쯤 되는 상공에서 날개를 기웃 거리며 요리저리 재고 있다. 꼼짝 할 수도 없다. 이때 불현듯 자포자기의 마음이 되니 삶에도 죽음에도 미련은 없어진다.

그러니 오히려 대담해 진다. 비행기가 휘 바람 소리를 내며 앞으로 날을 적 마다 달음박질로 몇 발을 옮겨 놓는다. 비행기가 되돌아오면 화석처럼 서 있다. 분뇨를 저장하는 초막 속에서 인민군이 야단이다. 그러면서도 자기네 들이 숨어있는 데로는 못오게 한다. 얼마를 걷지도 못했지만 너무도 먼 길이었고 저승길이었다. 도중에서 백원을 주고 호박 두 덩이를 사들고 집으로 가는데 웃통을 벗은 십사오세 되여 보이는 여아가 파편에 등을 맞아 주먹만큼이나 살이 떨어져 나간 자리에는 검붉은 피가 응어리져 있고 분홍 빛깔의 피고름이 흘러내리고 있으며 쇠파리는 떼를 지어 엉겨 붙어 있다. 해골 같은 두 팔로 땅을 짚고 길을 건너고 있다. 집으로 들어서니 눈매 사나운 그 사람이 마루에 걸터앉아 노려보는 듯 거만한 꼴에 오늘 저녁 밥맛도 뚝 떨어질 것 같다. 큰사위에게 방을 내 주고 마루에서 잤다. 밤새 쥐벼룩인지 전신이 떼떼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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