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4] 나의 모스크바 특파원 시절
[연재-4] 나의 모스크바 특파원 시절
  • 토론토=송광호 기자
  • 승인 2012.10.07 07:5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송광호 기자의 모스크바 특종기

 
북한은 94년 하반기부터 식량난으로 아사자가 생기기 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 시베리아 벌목공이나 건설노동자로 뽑혀왔다가 탈출한 일부 탈북자들은 광활한 러시아 땅 곳곳으로 숨어들고 있었다. 당시 김영삼 정부는 탈북자수용을 위한 정책이 미처 정립 안 돼 있던 시기다. A와 B는 유엔경로를 통해 대한민국에 입국한 최초의 탈북자들이 됐다. 로젯 기자와 함께 유엔 난민국에 접수시킨 첫 탈북자 등록은 정부보다 한발 먼저였고, 결국 UN기구를 통하는 밑바탕을 제공한 셈이다. ‘UN난민국을 통하자’는 그녀 아이디어가 결국 아름다운 결실로 끝을 맺었다.

UN난민국 등록 건은 그 후 잊고 지냈다. 그러다 수년 뒤 서울에서 우연히 또 다른 탈북자 C로 인해 상기됐다. 그전엔 C를 만나 본적도 없었다. 그는 신의주 의대를 나온 의사였다. 나를 만나자 90도 각도로 허리를 굽혀 절을 했다. 두 손을 꼭 잡더니 “덕분에 용케 대한민국에 와서 잘살고 있다”고 인사했다. 그는 “러시아에서 초창기 온 탈북자는 대부분 유엔을 통해 왔기에 송 기자 역할을 알고 있다”며 고마움을 전하는 것이 아닌가.

그는 하바로프스크에서 내게 전화한 한인목사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었다고 했다. “기자 개인이 탈북자를 처음 유엔에 등록시켜 정부 정식통로로 준비시켜준 일은 획기적인 쾌거”라고 추켜세웠다. 환심을 사려 한 인사성 말이겠으나 듣기 싫은 말은 아니었다.

러시아 기자들과는 교류를 지속적으로 가졌다. 한번 친해지니 자주 술자리도 같이했다. 러시아산 보드카를 즐겨 마셨다. 독주지만 첫 잔은 한 번에 다 들이키는 게 러시언의 습관이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금연을 단행하던 시기다. 주변에선 “담배를 줄곧 입에 달고 다니더니 어떻게 된 셈이냐”며 놀라워했다.

하루는 러시아 국제방송국의 끄리뜨브 기자와 둘이 술을 마셨다. 그는 전형적인 술꾼이었다. 그래도 직장 내에선 유능한 부장으로 평판 나 있었다. 방송국에 함께 근무하는 한 고려인은 “그는 사람 좋고 능력 있는 인기 높은 부장”이라고 전했다. 서로 러시아, 한국말을 섞어가며 대화를 했다. 그는 평양특파원을 역임했기에 한국말을 조금 알고 있었다.

나는 내내 북한자료 수집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러시아는 한때 절대근접이 불가능했던 철의 장막, 강대국 아니던가. 러시아 정부에서 정식 승인한 외국기자 신분으로 틈나는 대로 우리 자료 발굴을 위해 뛰어다녔다. 외국도서관, 예술부문사진 등 외국물 자료보관국, 심지어 카자흐스탄까지 날아가 찾았다. 알마아타 도서관에서도 우리 옛 신문 등 기록물이 발견되었다.

이날 끄리뜨브 기자는 러시아 주요 군(軍)장성 연락처를 알려주었다. 북한에 진주해 3년간(45년-48년) 북한지역을 통치한 고(故)레베데프 소장(정치군사령관)집 전화번호다. 당시 주북한 소련대표는 스티코브 장군이었으나, 실제 정치실무책임자는 레베데프였다.

레베데프 소장 댁으로 전화했다. 아들 알렉산더 레베데프(당시 54세)는 유창한 영어로 “올 때 스카치(위스키)를 잊지 말라”고 처음부터 농담이다. 발렌타인 스카치와 꽃을 사들고 방문했다. 호탕한 성격인 그는 영어가 통하니 편했다. 차남이라는 알렉산더는 “소련 외무성에서 26년간 근무하다가 소련 붕괴 후 퇴직했다”며 “부친은 지난 92년, 형은 지난 89년에 사망했다”고 밝혔다.

그가 꺼내온 북한자료들은 놀랄 만했다. 북한 관련 사진들만 1백장이 훨씬 넘었다. 해방 직후 김일성 부자와 가족사진들, 북한요인 사진들, 조만식선생, 소련 군정요인들, 남북한연석회의 앨범 등등 주요 역사적 내용의 흑백사진들이었다. 레베데프 가족은 지난 세월동안 깨끗이 잘 소장하고 있었다.

그중 레베데프 사령관의 비망록(작은 검정노트 5권, 그중 번호3권은 한국대사관에서 보유)4권이 돋보였다. 정말 소중한 북한자료였다. 레베데프는 군정기간 3년간 북한 내부사정과 통계 등을 일기형식으로 꼼꼼하게 적어놓았다. 알렉산더는 “내게 먼저 연락 오는 한국기관이나 기자에게 이 자료들을 주려 생각했다”며 “아직 미 공개된 자료들이니 잘 이용하라”고 선뜻 기증했다. 또 레베데프 소장이 지난 1948년 군정 후 평양을 철수할 때 김일성 위원장이 기념선물로 증정한 큰 자개거울도 아낌없이 내주었다. 이 자료들을 입수 즉시 간사사 담당인 홍순두 대구매일 국제부장에게 전화했다.

(지난 1992년 지방신문 5개사-강원, 광주, 대구 매일신문, 대전, 부산일보-는 워싱턴DC, 도쿄, 북경, 파리, 모스크바 등 해외5개 도시에 각1명씩 특파원을 파견했다. 전두환 정권 시 언론 통폐합으로 지방에 하나씩(1道1社) 존재했던 신문사가 ‘춘추사’란 명칭으로 세운 첫 공동특파원 제도다. 기사송고는 소속사가 아닌 간사(幹事)사로 보냈다. 제1기 간사는 대구매일신문, 제2기는 부산일보가 담당했다. 그러나 지난 1997년 IMF 외환위기를 겪으며 춘추사의 해외특파원 파견은 중단됐다.)

홍 부장은 “당장 자료들을 싸들고 들어오라”고 말했다. 5개 신문사에서 사진들이 연재됐고 그해 이 북한자료들 덕분에 한국신문협회의 ‘한국신문상’을 수상했다. 기자상이라고 별것 아니지만 아무튼 우연(偶然)이 가져다 준 행운이었다. 비망록 내용 중에는 북한 우라늄에 대한 정보도 적혀있던 걸로 기억한다. 비망록은 나중 번역돼 지방신문에 연재됐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송파구 올림픽로35가길 11(한신잠실코아오피스텔) 1214호
  • 대표전화 : 070-7803-5353 / 02-6160-5353
  • 팩스 : 070-4009-2903
  • 명칭 : 월드코리안신문(주)
  • 제호 : 월드코리안뉴스
  • 등록번호 : 서울특별시 다 10036
  • 등록일 : 2010-06-30
  • 발행일 : 2010-06-30
  • 발행·편집인 : 이종환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석호
  • 파인데일리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월드코리안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k@worldkorean.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