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6] ‘아버지의 6.25 일기’
[연재-6] ‘아버지의 6.25 일기’
  • 서지원(전 텍사스오스틴상공인회장)
  • 승인 2012.10.23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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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지원 회장
필자 서지원씨는 텍사스 오스틴에서 부동산 컨설팅업에 종사하고 있다. 고향은 진주. 그는 1970년대 후반 자신이 경영하던 화장솔 공장을 위한 오더를 받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정착한 케이스다. 그가 소장하고 있던 선친의 전쟁일기를 본지에 공개했다. 그의 어린 시절 경험이기도 하다. 이를 본지에 연재한다.<편집자주>

1950년 8월 25일
아내는 치마감 한감을 1천800원에 팔았다. 어머니와 점숙이는 식량을 구하려 나섰다. 하늘은 맑고 볕은 뜨겁다. 오랜만에 촌길을 걷는 기분이 좋다. 들판에는 드문드문 농민들이 일을 하고 있고 아이들은 천진하게 물에서 놀고 있다. 길가엔 붉은 백일홍이 눈이 부시게 탐스럽게 피어있고 조각 같은 가지가 강 위로 뻗어 있으며 나지막한 절벽 아래로 푸른 물이 조는 듯 흐르고 있다.

이곳에서 한 5마장쯤 가면 속살이 있고 저 아래 남쪽 산기슭에 숲이 자욱한 조동 마을이 보인다. 평화롭기도 하고 죽은 마을 같기도 하다. 목적한 곳에 가니 도로변에 많은 움막들이 있다 보리가마니로 벽을 둘렀고 비행기가 날아와도 모두 피할 생각도 안한다. 저 넓은 문산들을 바라보고 있는 이 사람들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마음은 사뭇 흐뭇하겠구나. 우리는 4말2되의 식량을 구하여 땀을 뻘뻘 흘리며 돌아왔다.

1950년 8월 26일
피난 온지 꼭 한 달이 된다. 삶과 죽음 속을 용하게도 헤치고 지탱해 왔나보다. 디딜방아 아구리(아가리)에 보리를 넣고 찧는다. 전번에도 2말 보리를 찧고 어제는 절름거리면서 보리를 지고 왔다. 오늘도 얼마를 찧었는지 하늘이 노랗다. 다리에는 ‘가리토시’가 섰다.

이것을 다 찧고 나면 보리쌀이 3말은 작작 대겠고 쌀이 8되는 될 것이다. 이 댁 작은 집에 방이 있어서 주인댁에 인사를 드리고 짐을 옮겼다. 외양간과 변소 사이에 울퉁불퉁한 흙벽과 방바닥. 방이라기보다 광이라고나 할까, 크기는 6자에7자 쯤 되어 보인다. 외양간엔 소똥과 오줌과 풀이 뒤범벅이 되어 질퍽거린다.

쇠파리는 날아와 인사라고 한방 쏴 주고 간다. 소는 쇠파리가 쏠 때마다 큰 몸둥이를 흔들며 꼬리를 돌미(돌맹이) 돌리듯 돌려 된다. 밤이 되니 부역 나갔든 주인이 돌아 왔다. 성은 박 씨며 35세 되어 보이는 순진한 사람 같다. 토지개혁에 대한 이야기로 시간은 꽤 흘렀다. 잘 때는 모두 모로 누웠다. 코는 흙벽에 닿을락 하고 쾌쾌한 흙냄새와 외양간 변소 냄새로 속이 매스껍다. 잠은 오질 않고 머리에는 천근이나 되는 돌이 들어있는 것 같다.

1950년 8월 28일
새벽엔 추워서 이불을 덮었다. 모기장 안에서 빈대를 10마리는 더 잡았다. 어제가 백중인데 이 마을 사람들은 하루를 잘못 짚은 것은 아닌지 집집에서 곡성이 터져 나온다. 나머지 2말 보리를 찧는다. 괴로움도 한고비는 넘은 모양 이다. 어머니와 아내와 3시간은 더 찧었다. 태원이와 지원이는 보리밥도 잘 먹어 낸다마는 양자는 설사만 한다.

양숙이는 이제야 땀띠도 없어지고 소화도 잘 하고 얼굴엔 화색이 돌고 날이 다르게 살이 붙는다. 한 여름 설사만 질질 하고 뼈에 가죽만 덮여있든 양숙이는 몰라보게 달라졌다. 참으로 대견스럽다. 그런데 너무 먹으려고 하니 탈이다. 달래다가 결국은 매질을 한다. 돈이 있으면 과일도 과자도 사줄 수 있으나 그리도 못하는 마음이 아프다. 양숙이는 매를 맞고는 운다.

너무도 측은해서 안고 달랜다. 그러면 양숙이는 금방 울음을 그치고 감나무에 매달려 있는 감을 가리키며 나중에 “감 많이 묵기다”하면서 방긋이 웃는다. 양숙이는 섧게(서럽게) 자랐다. 완구라고는 가져본 적도 없다. 양숙이 나서 백일쯤 되었을 때 나는 갑자기 두 눈이 어두워서 부산 모 안과 병원에 입원을 했고 아내는 양숙이를 업고 절망의 낭떠러지에 서서 안간 힘을 다해 어린것들을 품에 안고 버티어 나왔다.

두 눈을 감고 누워서 불상한 양숙이를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어느 날 그때는 내 눈이 조금은 보였을 때 내 앞에 어린것이 기어 다니고 있었다. 귀엽게 생긴 어린것이 이 어린것이 내가 하룬들 못 잊어 하든 양숙인 줄 알았을 때 너무도 반가웠고 눈물겨웠다. 울산 외할아버지 회갑에 아이들을 데리고 다녀온 뒤로 양자는 홍역을 했고 그 뒤로 양숙이가 앓게 되었다. 그러다가 피난을 했으며 뼈만 붙어있구나, 호우씨 여아인 두리는 양숙이와 같은 해 났으나 건강해서 먹는 것도 옹차고 잘도 크는데 양숙이는 사람 구실을 못할 줄 알았다.

이렇든 양숙이가 지금은 식욕이 왕성하여 먹고 싶어 하는데 매를 때리다니. 오빠들이 떨어진 감을 주워오면 제 엄마는 이것을 보리쌀 속에 넣어 익혀서 양숙이를 준다. 이것도 없어지고 양숙이는 달라고만 보챈다. 제 엄마는 보다가 또 매질을 한다. 보다 못해 나는 양숙이를 안고 나가 땅에 뒹굴고 있는 황색의 감나무 잎을 주워주면 이것을 손에 들고 좋아한다. 낮이 되니 비행기는 시내를 폭격한다. 대형 폭탄인지 자골 땅이 들썩들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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