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이민기록문학상 수상작-1] 송광호(캐나다)
[제1회 이민기록문학상 수상작-1] 송광호(캐나다)
  • 월드코리안
  • 승인 2012.10.29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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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이민기록부문)/‘북미 최초 하와이 사탕수수밭 이민자 2세의 증언’

본지는 7월15일부터 9월20일까지 2012 제1회 월드코리안신문 이민기록문학상을 공모, 응모된 46명의 작품들을 대상으로 10월18일 심사결과를 발표했다. 이번 응모전에는 이민기록부문의 대상을 수상한 ‘정요한 옹의 인생역전’(캐나다 송광호), 이민문학부문의 대상을 수상한 ‘어머니가 그리운 날’(파라과이 고용철)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우수한 작품들이 출품, 본지는 이들 작품들을 연재할 계획이다.<편집자 주>

- 제1회 이민기록문학상 이민기록부문 대상작
- 구술기록자 송광호(재외동포언론인협회 고문)

<북미최초 하와이 사탕수수밭 이민자 2세의 증언>
금년 내 나이 만94세(1918년생)다. 태어난 곳은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 영어이름은 존 정(John Chung). 한국명은 정요한(鄭耀翰)이다. 북미에선 그저 존이라고 부른다. 아버지이름은 정봉규(鄭奉奎)로 고향은 평양이다. 부친은 지난1905년 미 하와이 사탕수수밭 첫 노동계약으로 조국(북한 진남포/현재 남포로 개명) 항을 떠났다.
부친사연부터 잠깐 언급하는 게 좋겠다. 북미최초의 한인1세 이민자인 부친생년은 지난1881년생이다. 부친은 24세 때(한일합병 이전)미 하와이로 갔다가 2년 뒤 캘리포니아 주(州)로 옮겨 미 본토에서 25년간을 살았다. 캘리포니아에선 농장노동자 생활을 했다.

부친은 중노동을 하며 돈을 한 푼씩 아껴 모았다. 그 돈을 불려 수년 후엔 농장을 구입하고 멕시코 인들을 고용해 농장경영을 했다. 문맹자로서 비록 학문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무척 이재(理財)에 밝아 먼저 농장주가 되는 등 남보다 재산축적이 빨랐다고 한다. 그 즈음 부친은 지인소개로 사진을 통해 평양출신 어머니(현미선/1898년생)를 초청해 결혼했다. 서울진명여고를 나온 어머니는 17세 연하로 지식인에 속했다. 당시 어머니가 한국을 떠날 때는 샌프란시스코로 오는 직항교통편이 없었다. 어머니는 배를 타고 중국 상하이로 가서 다시 기선으로 갈아타고 일본 요코하마를 거쳐 1914년 10월 샌프란시스코에 닿았다.

아버지를 첫 대면한 어머니는 무척 실망했다고 한다. 얼굴은 사진보다 못생기고 늙었으며 키도 작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그해 샌프란시스코 한인감리교회에서 식을 올렸다. 그때 부친나이 만33세, 모친은 16세였다.
사실 부친에 대한 옛 과거일은 자세히 모른다. 조선말기 군인이었다는 말을 얼핏 들었을 뿐이다. 고종(대한제국)당시 군인직업을 잃고 미국으로 건너간 것으로 알고 있다. 부친 여권원본에는 대한제국발행(249호) 광무9년이라 적혀있고 1년 유효기간으로 진남포에서 하와이 행으로 밝혀져 있다.

부친은 도산 안창호선생과 고향이 같은 평안도라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캘리포니아에 살 때 도산(島山)과 자주 만나던 일을 지금도 분명히 기억한다. 부친은 도산의 재무를 맡고 있었고 부친과 함께 가끔 LA를 방문하면 꼭 도산 집에 머물렀다. 그래서 할리우드 유명영화배우였던 도산아들 필립 안(安)도 기억한다. (부친은 당초 문맹이었으나, 하와이시절부터 고된 노동일 후에도 밤늦게까지 글을 익히는 등 각고의 노력 끝에 한글과 영어를 깨우칠 수 있었다고 한다)

부친은 “나는 공부를 못했지만 도산을 어떻게든 도와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다. 1920년대 부친은 흥사단을 조직한 도산을 물심양면으로 도운 것 같다. 도산은 우리가 이사한 지역으로도 몇 번 찾아왔다. 당시는 교포지도자들끼리 당파싸움이 무척 심했던 것 같다. 오늘날도 우리 한인교포끼리 곧잘 다투지만 그때도 어른들 파벌싸움이 심했고, 그 중심엔 항상 이승만 이름이 오르내렸던 것을 기억한다.

나는 3.1독립만세 사건 전 해(1918)에 태어났다. 내 위로는 누님 두 명뿐으로 형제 없이 외아들로 살아왔다. 1919년 3.1운동을 기념해 1920년대부터 매년 삼일절이면 한인들이 LA에서 퍼레이드를 가졌다. 어머니랑 10여명 한국여인들이 하얀 옷을 입고 대형태극기를 앞세워 행진하던 모습도 어렴풋이 회상된다. 내가 4살 되던 해 우리 집은 디누바(Dinuba)라는 소도시로 옮겼다. LA에서 북서쪽으로 약 240km 떨어진 곳이다. 거기서 부친은 조그만 식품점을 열었다. 디누바에는 약 1백여 명 한인교포들(대부분 농장노동자)이 거주했고 한국감리교회도 세워져 있었다.

그때 앨리스 장(Alice Chang)이라는 같은 또래 한국소녀를 알게 됐다. 우린 유치원과 초등교1년 때까지 같은 학교를 다녔다. 그러나 3년 뒤 우리 집은 또 다시 캘리포니아 스탁톤(Stockon)이란 도시로 이사 가면서 그녀와 헤어져야했다. 언제나 조용하고 말없던 앨리스. 아주 오래전 어린 시절이었는데도 그 소녀이름과 모습이 아련하게 회상돼진다.

부친은 스탁톤으로 온 후 시내에 대형 한국식품점을 개업했다. 아마 그때당시론 북미주 첫 한국식품점이 아닌가 생각된다. 디누바 가게 때보다 규모가 몇 배나 컸다. 품목별로 생선, 정육, 채소, 과일, 아이스크림, 소프트드링크, 각종 깡통제품 등등 전부 구비해 놓았고, 유조 나까시마 라는 일본인도 고용했다. 부친은 아침 일찍 도매상에 가서 물건들을 사갖고 오면 어머니는 가게 뒤 목욕탕에서 야채 등을 다듬어 선반에 진열해놓곤 했다. 이때 나는 프랜클린 초등교 2학년이었다. 마침 같은 반에 한국학생이 2명 있었다. 이름이 에드워드 문과 윌리엄 박 이다. 우리 셋은 1주일 내내 휴일에도 함께 뛰어다녔다. 방과 후에는 매일 오후4시부터 5시까지 1시간씩 교회에서 가르치는 한글도 배웠다. 한글은 김택(Kim Tak)목사님이 직접 가르치셨다.

우리들은 대부분 시간을 강가를 뛰어다니며 롤러스케이팅, 자전거타기 등과 시내 풀장에서 수영하면서 보냈다. 또 우리 3남매는 학년이 올라가면서 음악에 조예 깊은 어머니 요구대로 악기를 익혔다. 큰 누님과 나는 피아노, 작은 누님은 바이올린을 배웠다.

이때 내 소원은 장래 비행사가 되는 게 꿈이었다. 1927년 찰리 린드버그라는 미 비행사의 세계최초 대서양 횡단비행이 당시국제적인 큰 화제였다. 1928년 중반 실지로 린드버그가 비행하는 ‘Spirit of St. Louis’라는 항공기가 우리가게위로 양 날개를 흔들거리며 저공비행하는 것을 목격해 더욱 비행조종사가 멋있게 생각됐다. 초등교 5학년 때다. 부모는 가게를 완전정리하고 고향인 평양에 되돌아가기로 결단을 내렸다. 요즘 말로 역이민인 셈이다. 향수에 젖어 남은여생(餘生)은 친척과 친구들이 있는 고향땅에서 보내기로 결심한 것 같다. 그것은 평양친척에게 계속 송금함으로 따로 우리 집 마련을 부탁해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1929년 9월. 우리가족은 미국생활을 완전청산하고 조선 땅으로 떠났다. 하와이사탕수수밭 첫 이민1세 꿈을 접고 부친은 만 25년간의 미주생활을 마감하게 된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부두에서 배(Taiyo Maru of the NYK Line)를 타고 일본 요코하마로 향했다. 나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샌프란시스코 만(灣)에서 태평양으로 진입하는 갑판위에 서서 구름아래 지는 태양을 바라보던 서글픈 감정을. 11세 어린 나이지만 새로운 미지(未知)의 땅에 대해 뭔지 거북하고 불안한 느낌을 맘속에서 끝내 지워버릴 수 없었다.

배는 하와이 호놀룰루까지 5일 걸렸다. 우리 선실은 3등 실로 배 밑바닥부분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서 선실이 컴컴하고 습기 차고 냄새가 났다. 우리 3남매는 이런 방이 싫어 하루 종일 갑판위로 나다녔다. 어머니는 배 멀미를 앓아 꼼짝 않고 침대에만 누워계셨다. 3등 실에는 12명 손님이 있었는데 식사는 밥과 된장국과 단무지뿐이었다. 우리 남매는 배 밑 나쁜 공기가 싫어 내내 선실밖에 나돌다가 잠자는 시간에야 방에 돌아오곤 했다.

10일후 마침내 일본 요코하마에 닿았다. 일본에 유학중이던 친척아저씨가 마중 나와 약 2일간 시모노세키 등을 관광했다. 그리곤 페리를 타고 부산항에 닿았다. 페리에선 일본 사복형사2명이 영어로 심문했다. “어디서 오느냐” “어디로 갈 예정이냐”는 등등.

부산에서 다시 기차를 타고 평양으로 향했다. 평양역에는 친척들이 많이 나와 있었다. 아버지 쪽 친척은 누이동생 외에 거의 없다시피 했고 전부 어머니친척들이었다. 이틀간 어머니친정집에서 지낸 뒤 친척이 미리 사 둔 우리 집으로 갔다. 부친이 미리 집 사 놓으라고 돈을 보냈던 것이다. 우리 집은 아주 초라하고 작고 대문조차 없었다. 부친은 화가 잔뜩 났다. 충분한 돈을 보냈다는데 집이 너무 보잘것없어 마음을 상한 것이다. 그때도 국가별로 돈 환율이 있어 미국과 아주 못 살던 조선과는 상당한 금액차가 있었다. 부친은 친척이 거의 없어 인텔리 가정인 어머니 편으로 돈을 송금한 것이다. 그런데 집 구입문제부터 어긋나니 다시는 어머니쪽 친척들을 신임하지 않았다.

평양에 올 때 나는 미국에서 초등교 6년을 올라가기 직전이었다. 초(소학)교 편입을 위해 한글시험을 봤더니 실력이 엉망이었다. 미국에서 목사님에게 틈틈이 배운 내 한글실력은 수준이 하급학년 정도도 안됐다. 더구나 일제강점기시절이라 필수로 일본어까지 배워야 했으니 어린 나로서는 정말 죽을 맛이었다. 나는 부모가 정해준 가정교사를 두고 매일 따로 언어공부에 매달렸다. 숭덕소학교에 가보니 같은 반 학생들 중엔 나이가 많고 걔 중엔 결혼한 사람까지 있었다. 대부분 남학생들이 머리를 여자처럼 뒤로 길게 땋고 있었다. 당시의 조선풍속이었다.

문제는 공부뿐이 아니었다. 미국에서 부잣집아들이 왔다는 소문 때문인지 나를 괴롭히는 한 아이가 있었다. 고 씨 성을 가진 목사아들이었는데 내게 매일 집에서 돈을 가져오라며 칼로 꼭 찌르고 위협했다. 나는 아버지에게 돈을 몇 전 달라고 해서 목사아들에게 갖다 주곤 했다. 이런 날이 계속되니 아버지가 이상하게 생각됐던지 “왜 너는 돈을 매일 달라고 하느냐.”고 물었으나 그런 사정을 말할 수 없었다.

나는 집에 와서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자”고 거의 매일 부모에게 울면서 졸랐다. 이런 생활이 근 2년간 계속됐다. 한국말, 일본말로 공부하기도 힘들었지만, 그 목사아들의 괴롭힘은 일생 내 마음속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80여 년 전 옛 일이지만 나는 지금도 그때 그 속상하던 일을 결코 잊지 못한다. 또 그로 인해 나도 모르게 한국 사람을 믿지 않거나 좋아하지 않는 습성이 생겨난 것 같다. 나중얘기지만 고교졸업 후 일본에서 대학 공부할 때나 상해에서 중국 사람을 만났을 때도 그들에게선 인정 넘치는 좋은 경험만 가져 더욱 그런 것 같다.

집에서 3년 이상 개인교습을 통해 조선말 등 언어에 차차 익숙해지면서 1932년 봄엔 숭실학교(중고교)에 무난히 입학했다. 이때는 한창 장난 심한 학생일 때였다. 시험 때 공부하기 싫어 친구들과 밤에 몰래 학교에 숨어들어 미리 시험지를 훔치려 시도한 일, 친구 도시락을 훔쳐 먹다 걸리는 일 등으로 1주일 정학당해 주변에서 놀라워했다. 나는 ‘양같이 순한 아이’로만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고교3년 때는 조선독립군모집사건에 엉뚱하게 연루됐다. 중국에서 독립운동관련 활동을 위해 숭실학교를 퇴교한 학생이 있었다. 그가 평양에 독립군 모병문제로 잠시 들렀다가 내 친구2명과 함께 우연히 만난 적이 있는데 이것이 걸린 것이다. 결국 며칠 감옥에 갇혔다가 혐의가 없어 풀려나긴 했지만 이때 일본헌병대에 있는 한 조선인에게 이유 없이 폭행을 당한 것이다. 정작 일본헌병대원은 조용히 질문하다가 혐의가 없어 그만뒀는데 이 조선인은 달랐다. 무조건 먼저 따귀부터 때리면서 솔직히 불으라고 윽박질렀다. 한국이름이 김덕산이고, 일본 명은 도꾸야마 인 것을 기억한다. 나중 일이지만 이 조선헌병을 해방 후 상해거리에서 마주쳤다. 김덕산은 그때 일을 잘못했다고 빌어 그냥 용서하고 놓아주었다.

해방 후와 6.25전쟁 시 나는 미국공무원으로 일했다. 그러나 직장이 일본에 있어 나는 가족들(5명)과 함께 일본에 20여년 거주했다. 그 시절 내가 경험한 일본인과 한국인에 대한 느낌은 사뭇 달랐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한국인에 대해 별 좋은 추억꺼리가 없다. 내 탓이지만 일생 절친한 한국인친구 한명 제대로 사귀지 못했다. 한국 땅에서 8년밖에 거주하지 못한 짧은 기간 탓으로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은퇴 후 캐나다에 40년 이상 살지만 가까운 한국인친구는 없다.

아마 어릴 때 미국에서 겪은 한국 어른들끼리 서로 싸우는 부정적영향인지 모른다. 또 미성년시절 평양학교에서 같은 또래에게 돈을 뺏기며 성장한 마음상처 때문인지, 감옥소에서도 한국인이 일본인보다 더 악랄하게 심문함을 직접 겪은 탓인지, 어쨌든 진실한 한국인 친구 한명 갖지 못한 것은 평생 내 자신의 불운이다. 고교를 졸업하고 유학으로 일본 외국어대학(4년제)에 들어갔다. 외국어대학은 사립대학이 아닌 국립대로 입학이 무척 어려운 학교였다. 일본에 가자 곧 일본대학입시를 위해 다시 1년 간 일본어를 열심히 배웠다. 평양 숭실학교에서 배운 일본어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아예 처음부터 새로 일본어를 배우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대학입시과목은 영어와 일본어로 약 7-8대1의 경쟁을 뚫고 합격했다. 고향 평양 가족들은 내가 무난히 입학하니 그렇게들 좋아했다.

이때 내 전공은 영어가 아닌 러시아과를 택했다. 한 반에는 30명정원인데 나만 유일한 조선인이었다. 대학전체로는 약1,000명 학생 수에서 조선인학생은 단 8명뿐 이었다. 외국어대학이라 각 국가별 과가 10개 있었다. 중국어, 인도어과 등도 있었으나 조선(한국)어 과는 없었다. 이는 이미 조선 땅이 일본에 합병된 때문일 것이다. 일본친구들은 내가 조선인임에도 불구하고 4년 대학학창시절 중 단 한번 차별 당함 없이 서클활동 등으로 우애 있게 지냈다. 나는 1년을 쉬었다가 5년간 대학을 다니다 평양으로 되돌아갔다. 당시 외국어대학을 나오면 외국기관에 취직이 가능했다. 그러나 나는 한국으로 되돌아와 부친이 경영하는 평양자동차회사에서 일했다. 부친은 평양에서 자동차 부속판매 및 수리공장을 경영하셨다.

한편 부친은 한국으로 귀향 후에도 도산과 교류를 계속 가졌다. 중3때인 1935년 도산이 대전감옥에서 나와 평양으로 부친을 찾아오셨다가 나를 보고 “이제 쟈니(John)가 컸구나.”하셨다. 도산은 내 머리 속엔 항상 학자 같은 분으로 각인돼 있다. 도산은 감옥 후유증 탓인지 오래 못사시고 1938년 별세하셨다. 당시는 세계대전이 무르익어가고 모두 어렵던 시기였다. 1943년 내 나이 25살이 되면서 나는 부모가 소개해준 한 평양여성과 결혼했다. 현재까지 건강히 함께 있는 아내 장인선(87세)이다. 우린 한국의 최초 기독교산실이라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식을 올렸다. 당시 때가 전시(戰時)인지라 여행은 못가고 1주일은 우리 집, 다음 1주일은 처갓집에서 신혼을 보냈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1944년 3월 나는 홀로 징병을 피해 중국 상해로 갔다. 상해에선 학교동창인 백영선 사업을 도왔다. 일본인이 아내인 백 사장은 스웨덴회사로부터 구리를 구입해 일본군에게 공급하는 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나는 그의 무역서류를 번역하고 정리하는 일을 맡았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면서 구리사업체 또한 문을 닫고 백 사장은 홀연히 사라졌다. 해방이 됐어도 나는 곧 한국으로 떠날 수 없었다. 중국정부는 일본군에게 구리공급을 했다는 이유로 나를 감옥에 가두고 심문했다. 중국 측은 백영선 행방을 물었으나 알 수가 없자 한 달 후 풀어줬다. 1946년1월 나는 마침 중국에서 송환되는 배편을 이용해 부산에 닿았다. 혹시 나는 가족들이 이미 남한으로 내려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서울로 올라가 집안끼리 잘 아는 장이욱박사(한때 평양 자동차공장 사장 역임)를 만나니 그가 평양가족소식을 들려줬다. 장 박사는 “하루빨리 평양으로 올라가 식구들을 데리고 내려오라.”고 당부했다. 3.8선이 완전 닫히기 전에 속히 움직여야한다는 것이다.

나는 12월 중순 3.8선을 넘다가 먼저 미군에 걸렸다. 그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잘 다녀오라며 안전한 루트를 알려주었다. 그러나 얼어붙은 강가 부근에서 소련군에게 붙잡혔다. 소련병사는 고향 간다는 내 얘기를 묵살하고 무작정 기다리게 하더니, 그 뒤 나타난 북한군에게 인계해 해주감옥소에 가두었다. 여기 감옥에서도 한 달간 갇혀 있었다. 당시 난방시설도 전혀 없는 감옥이다. 이 해주감옥소에는 소위 반동분자라는 정치범들도 함께 섞여 있었다. 북한관리는 내 지난날의 하나하나를 일일이 캐고 심문했다. 미국, 일본, 중국에서 그간 해온 일 등을 반복적으로 물었다. 심문요점은 ‘내가 미국의 비밀밀령을 띤 첩자인가’를 확인하기 위함 같았다.

어느 날 하루 다른 북한간부가 지나치다가 심문받는 나를 보고 아는 체했다. 나는 그를 못 알아봤으나 그는 자신이 내 숭실학교 2년 후배라고 했다. 그는 ‘북한정부에 전적으로 협력한다고 약속하면 풀어주겠다.’고 해 서명하니 정식여행증까지 만들어 주면서 다음날 석방시켰다. 그날 밤 트럭을 타고 평양 집에 갑자기 내 모습을 드러내자 온 집안 식구가 환호했다. 부모님은 좀 늙었지만 아내는 예전모습 그대로였다. 내가 상해 머무를 때 태어난 장남 로버트는 2살이 넘은 건강한 아이로 변해 있었다. 나는 두 달 이상 집에 머물며 가족들과 원산 등지를 여행했다. 원산(원래 함경남도/현재 북 강원도 수도)은 아내친척이 살고 있는 도시로, 아내역시 원산에서 일본인 여고를 나온 연고지였다.

4월(1947년)이 되자 나는 아내와 아들, 장모와 함께 4명이 남한 행을 결정했다. 우리는 다른 그룹의 피난민들과 합류해 국경지리를 잘 아는 전문 안내자를 고용, 밤중에 무사히 3.8선을 넘었다. 서울에 도착해선 나는 미군부대 건설부문에서 번역과 통역 일을 했다. 또 미 육군보안부대에서도 통역을 맡았다. 해방 후 모두에겐 무척 춥고 가난한 시절이었다. 그러나 비록 고생되고 힘들었지만 딸 헬렌도 태어나 오순도순 살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가 그래도 내겐 가장 행복한 시절 중 하나였다고 생각된다.

1949년 1월이 되면서 나는 정식 미국대사관 행정기관 멤버가 됐다. 명칭은 보조행정요원이다. 가장 급수가 낮은 미대사관직원에 속했으나 미국인명부에 정식 등록되니 봉급에서 상당액 차이를 보였다. 나는 서울에서 부산지부로 발령돼 6개월간 부산에 체류했다. 이때 주말엔 자주 해운대에서 지냈는데 다시 서울 서빙고로 전직됐다. 이때 막내아들 데이빗이 태어나 자녀가 2남1여가 됐다.

1950년 6월25일. 아, 우리 민족에게 잊지 못할 6.25. 주일인 이날 교회에 참석했다가 북한남침소식을 들었다. 집에 오니 즉시 사무실로 연락하라는 전화를 받았다. 북한군이 3.8선 전역에서 남침 중으로 하루 이틀 내에 서울이 점령당할 것이라는 미 대사관 통보였다. 그날 지시대로 가족들을 인천에 보내고 나는 서울에 대기상태에 있었다. 아내와 애들은 다른 미 대사관 관련가족들과 함께 인천에서 일본 하카타로 보내졌다.

다음날 미 대사관에 나가 서류들을 전부 없애고 피난준비를 했다. 대사관 직원들은 27일 아침 김포에서 맨몸뿐으로 비행기를 타고 일본 규수공항을 거쳐 교토에서 가족들과 재결합했다. 미 정부는 교토역전호텔에 숙소를 만들어 주었다. 전쟁이 장기화조짐을 벌이자 요코하마 지역일이 할당됐다. 주말에는 교토가족에게 갔다가 일요일 밤 다시 기차를 타고 요코하마로 돌아왔다. 결국 전쟁장기화로 미 대사관이 문을 닫으면서 나는 양자택일해야했다. 일본소재 미 기관에 고용문제를 알아볼 것인가 또는 미국으로 돌아갈 것인가를.

다행히 일본 미군G2에 통역으로 취직이 됐다. 거기엔 다른 한국인 통역도 10명 있었다. 미국에서 공부하던 대학생들이었다. 그들은 북한 포로서류번역작업을 맡고 있었다. 나는 나카모 지역에 조그만 집을 사서 근무처인 도쿄 시내사무실에 출퇴근을 했다. 그럴 때 9월 하순 맥아더장군의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변화가 생겼다. 항상 한국내의 식구들을 걱정하던 아내는 애들을 데리고 그해 10월 하순 하네다공항에서 서울로 가는 첫 비행기에 올랐다.

서울이 수복되고 미 대사관이 다시 문을 열면서 예전 직원들을 재 모집했다. 나는 즉시 응모해 재고용됐다. 그런데 일본 주둔 미군 측에서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미군측은 갖은 회유와 협박으로 나를 붙잡았다. 하지만 가족들이 있는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나를 어쩌지 못했다. 마침내 미군 고용직에서 풀려나 11월 중순 서울로 떠났다. 서울에 도착해선 많은 슬픈 소식들을 접했다. 그 사이 서울거리는 많이 파괴됐고 상당수 지인들이 살해됐거나 북으로 납치된 경우가 많았다. 같이 일하던 동료들도 일부 죽거나 실종됐다. 서울도착한지 서너 주가 지난 후 나는 대사관에 한 주일 휴가를 얻어 대사관비행기로 평양에 갔다. 그간 평양에 계신 부모소식을 전혀 못 들어 궁금했다.

평양에선 부모님과 누님가족들이 곤경 하에서도 모두 건강하고 무사했다. 그러나 다음 날 평양에 임시체류중인 미 대사관 부영사가 “중공군이 이미 국경을 넘고 쳐들어오는 중이니 빨리 가족을 데리고 서울로 가라”고 급히 전 했다. 그날 밤으로 부영사가 운전하는 지프차로 대동강 다리를 넘어 미비행기를 기다렸다. 부모와 누님가족까지 모두 비행기에 태우고 서울로 떠났다. 놀란 것은 김포공항에 닿자 미 대사관 3/4톤 트럭이 대기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미 시민가족이기에 트럭은 우리들을 싣고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생각하면 그 무서운 전쟁 통에서 한국인들 모두 엄청난 고생을 겪고 있는 참에 나만 특별대우 받는 것 같아 죄스러웠다. 단지 미국태생시민(자국민보호차원)이기 때문이겠지만 같은 민족으로 고생하는 동포들에겐 미안하기 짝이 없었다. 1.4후퇴가 시작됐다. 중공군이 서울을 재점령하면서 미 대사관은 다시 부산사무소로 내려갔다. 서울점령 직전 가족들도 기차로 부산에 닿았다. 부산은 피난민으로 넘쳐흘렀다. 방 얻기도 힘들었다. 미대사관기록에 따르면 그해 겨울 상당수의 피난민들이 집 없이 방황하다 동사한 것으로 밝혀져 있다.

대사관이 대폭 고용인원을 줄이면서 나는 일본 도쿄사무소로 전근됐으나 곧 문을 닫았다. 나는 도쿄 미 공군정보부에 새 직장을 잡았다. 직책은 역시 통, 번역 업무였다. 미공군부대에선 2차 세계대전당시 소련이나 중국에 포로로 있다가 귀환한 일본군 통역업무를 내게 맡겼다.

나는 부산에 남은 가족을 일본으로 데려오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옥신각신하다 결국 가족의 일본행 승인이 난 것은 그해 4월. 우리가족은 1959년12월 시카고로 이주하기 전까지 8년간을 일본에서 살았다. 이 기간 중 내 자식들은 미국과 일본 두 나라 문화권을 배웠다. 나는 잠간 미 공군부대를 사직하고 시카고로 일시 이주했다. 아내와 자식들을 위한 미 시민권획득문제 해결을 위해서였다. 모든 일이 몇 개월 차질을 빚긴 했지만 계획한 대로 순조롭게 진행됐다.

미국시민권이 해결되자 1960년 5월 일본으로 되돌아왔다. 우리는 시모키타자와, 센겐초 등지에 살았고 다시 미공군정보부에 근무했다. 아이들이 일본에서 성장하며 일본고교를 각각 지난63년, 66년, 67년 졸업하자 우리 가족은 생활터전을 완전 미국으로 옮겼다. 장남 로버트가 미 마이애미대학에 다니다가 잠간 휴학할 때였다. 집안이 온통 소용돌이에 말려드는 일이 일어났다. 아들에게 베트남전쟁 입영영장이 나온 것이다. 원래 반전주의자였던 아들은 곧 캐나다 몬트리올로 종적을 감췄고 미 정부당국은 군기피자인 아들을 찾아다녔다.

미공군부대에서 일하는 나는 FBI나 상관으로부터 아들 은신처에 대해 자주 질문을 받았으나 행방을 알려줄 수가 없었다. 누가 자기자식을 전쟁터입영을 기피했다고 거처를 신고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내 근무처는 미 국가정보기관이기에 그리 간단히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다. 다행히 내 상관은 “내가 당신이라도 아들 있는 곳을 밝히지 않겠다.”며 위로했다. 나는 진정 고맙게 생각했지만 거듭 생각 끝에 직장을 사직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내도 동의했다.

사직서를 제출하니 평상시 내 근무태도를 좋게 평가하던 상관은 “좀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며칠 후 나를 부른 그는 “그럼 이렇게 하자. 이곳보다 정보수준이 낮은 단계의 새 신분으로 하와이에서 근무하면 어떠냐.”고 제의했다. 나는 이를 받아들여 1969년6월 새 직책으로 발령돼 하와이 오아후로 옮겼다. 허지만 하와이에서도 미 FBI는 나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았다. 미정부 에이전트를 통해 계속적으로 전화하고 괴롭혔다. ‘당신아들 있는 곳을 안대면 동네주민들에게 당신아들이 정부에서 수배중인 도망병임을 알리겠다.’고 협박했다. 또 내 상관에게도 연락해 “당신부하 아들이 도망병이니 속히 찾아내라”고 촉구했다. 에이전트 전화는 단순한 공갈이 아니었다. 궁리 끝에 캐나다 이주를 결정해 직장상관 추천서를 요청했는데 번번이 거절당했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이브 때 일이다. 상관은 나를 근무 후 그의 사무실에 들르라고 불렀다. 성탄절 전날이라 근무가 일찍 끝나 낮12시쯤 그를 방문하니 밖에서 기다리라는 것이다. 5시간 넘게 오랜 시간 기다렸다. 상관은 오후5시경에 나타나더니 “집에 가도 좋다”고 한마디 던지는 것이 아닌가. 기분이 상당히 나빴지만 고의로 골탕 먹인 그의 마음을 이해하기로 했다.

한편 아들은 캐나다 몬트리올에서도 일을 제대로 못해 생활비 등 경제적 곤란을 겪고 있었다. 신분노출 관계로 신분증 등 정당한 서류를 만들 수 없어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캐나다연방경찰에 걸리면 금세 그의 신분이 탄로 나기 쉬웠다. 결국 우리부부는 아들을 돕는 한 방법으로 캐나다 이주를 결심했다. 부모가 캐나다이민자면 재정적 도움뿐 아니라 자식의 이민정착해결도 쉬울 것으로 판단했다. 은퇴시기도 다가왔고 이젠 오랜 미 직장생활을 접을 때가 됐다. 아들 로버트 문제로 은퇴 일이 좀 당겨진 것뿐이다. 나는 하와이에서 워싱턴DC로 다시 전근발령을 받았으나 움직이지 않았다. 그간의 만22년 미 직장생활을 접고 캐나다에서 새로운 이민자생활을 시작했다.

수년 후 아들 로버트에도 행운이 왔다. 미 카터대통령이 베트남전쟁 미군기피자들 전부에게 일체사면령을 발표한 것이다. 이때 우리가 받은 기쁨의 메시지는 일생 반가운 소식들 중 하나였다. 아들은 곧 미국으로가 사면을 받고 돌아와 역시 캐나다에서 새 삶을 시작했다. 내 캐나다이민 활동은 이미 은퇴 후 노년생활이라 드라마틱한 내용이 별로 없다. 42년 전 토론토에 첫 발을 디딜 때엔 건물이 많지 않았고 교포수도 적었다. 한국음식점은 단 한 개도 없었고, 한인상호 상점 자체가 드물었던 시기였다. 그때는 한인들을 만나면 무조건 반가웠다. 교회는 한인들의 만남의 장소로 이용됐고 한인사회 구심점이 됐다. 캐나다한인사회 터주 대감은 서독광부나 간호사들이 원조다. 캐나다유학생들이 더러 있었지만 인원은 아주 적었다.

가슴 아픈 사실 하나는 막내아들을 잃은 사건이다. 영화제작을 한다고 미 대륙을 동분서주하던 막내 데이빗이 결혼 후 50도 안된 한창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자금부족으로 스트레스가 심하던 그는 영화계 주목도 못 받고 일찍 세상을 하직한 것이다. 이제 우리 부부는 떨어져 사는 자식들의 토론토방문이 낙(樂)중의 하나가 됐다. 장남 로버트는 캐나다 BC주 빅토리아에, 딸 헬렌은 미시간에 살고 있다. 로버트는 거주지 바닷가(태평양)근처에서 서양레스토랑을 운영하며 자주 토론토에 온다. 비교적 거리가 가까운 딸 헬렌도 가끔 차운전으로 우리를 방문한다. 차 운전이 편도10시간이 넘는 거리지만 아무런 불평이 없다. 로버트 경우 비행거리만 5시간이 더 걸리나 바쁜 비즈니스를 아랑곳 않고 달려온다.

생각하면 내 인생길은 험난한 시대를 헤치며 4개 나라를 전전하며 살아왔다. 다행히 오늘까지 무난한 삶을 누리도록 돌봐 준 하나님께 늘 감사하는 마음이다. 또 어릴 때부터 영어, 일본어, 한국어를 익히다보니 한평생 언어와 함께 걸어온 삶의 여정이었다. 이제 나이 94년 햇수를 헤아려보니 미국에서 22년, 한국에서 8년, 일본에서 22년, 마지막 캐나다에서 42년 세월을 살았다. 캐나다는 미 은퇴 후부터 황혼기시기였다. 마지막 캐나다를 선택한 직접원인은 장남 때문이었지만, 지금생각하면 정말 잘 내린 결정이었다. 세계 손꼽히는 복지국가인 캐나다에서 이렇게 걱정 없이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다는 사실, 이 얼마나 좋은 본보기의 부러운 나라인가.

나는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니는 기독교신자지만, 젊은 시절엔 술도 많이 마시고, 음악을 즐기며 잘 놀기도 했다. 음식은 지금도 가리지 않고 잘 먹는다. 몸에도 무슨 고장이 없다. 다만 성격이 비사교적이어서 사람들과 가까운 친분관계가 별로 없을 뿐이다. 그리고 누구도 마찬가지겠지만 거짓을 싫어한다. 이 글도 절대 과장이 되거나 허위가 되면 안 된다.

혹자는 가끔 내게 오래 장수한 비결을 묻는다. 그것은 아마 하나님에게 자신을 맡기고 별 스트레스 없이 살아와서 그럴 것이라고 답한다. 교만하지 말고 자세를 낮추고 남을 존중하면 자신도 대접받는다. 세월은 흐르고 밖에는 노래진 낙엽 아래로 아, 벌써 소슬바람이 불어오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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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만94세 된 鄭옹과의 10여 차례 개인인터뷰 내용과 노인기억력(특히 연도 등)을 감안해 그가 ‘미주가족사’로 써놓은 자전적 영어스토리를 함께 참고한 기록이다. 미 샌프란시스코 태생인 정 옹은 구한말 최초 미(하와이)이민1세인 정봉규(도산 안창호재정부장)씨 외아들로, 일제강점기 다시 가족이 부모고향인 평양으로 재이주하면서 파란의 삶을 걷게 된 한인교포2세다. 6.25전쟁 시기 일본과 미국생활을 거쳐 지난 70년 은퇴해 캐나다 토론토에 정착했다. 그 후 만42년 간 오늘까지 한 아파트에서 부인 장인선(88세)씨와 두 노인이 잉꼬부부처럼 살고 있다. 정 옹이 겪은 한 세기에 가까운 격동의 인생살이(4개국 거주)를 통해 지난1920년대 미주초창기 한인동포생활을 비롯해, 일제강점기 전후 시대상황과 오늘의 관련역사 등을 엿볼 수 있겠다. (구술기록자 송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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