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7] ‘아버지의 6.25 일기’
[연재-7] ‘아버지의 6.25 일기’
  • 서지원(전 텍사스오스틴상공인회장)
  • 승인 2012.11.01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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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지원 회장
필자 서지원씨는 텍사스 오스틴에서 부동산 컨설팅 업에 종사하고 있다. 고향은 진주. 그는 1970년대 후반 자신이 경영하던 화장솔 공장을 위한 오더를 받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정착한 케이스다. 그가 소장하고 있던 선친의 전쟁일기를 본지에 공개했다. 그의 어린 시절 경험이기도 하다. 이를 본지에 연재한다.<편집자주>

1950년 8월29일
태원이와 지원이는 점숙이를 따라 나무를 하러 산으로 갔다. 조금 있으니 비행기는 날아와서 자골 하늘을 돌고 있다. 아이들이 걱정된다. 하늘이 고요해지고 얼마 있으니 아이들이 얼굴은 창백하고 다리는 가시에 할퀴고 무릎은 깨져 피가 출출 흐르며 집으로 들어선다. 얼마나 놀랬을까 주인집 작은 지개도 팽개치고 달려온 겁에 질린 모습들이 내 가슴을 찢는듯하다. 어머니와 나는 복통이 나고 설사가 멎지를 않는다.

1950년 8월 30일
속살 사람이 와서 옷감을 가져갔다. 식량을 주면 좋겠다고 했다. 밤새 비행기는 요란하고 방장(모기장)안에는 모기가 꽉 차 있다.

1950년 8월 31일
밤새 날던 비행기가 먼동이 틀 때 저공비행을 하고 있다. 모두 마음이 조마조마 했다. 이 댁 장독이 깨어지고 밭이 파였다는 말을 들었다. 개양 쪽과 시내는 심한 폭격을 당하고 있다. 친정으로 피난 와 있는 이웃 새댁이 추석 옷감으로 분홍색 저고리 배를 나락 4되와 밀 1되 그리고 현금 천원을 주고 가져갔다. 이 돈으로 고구마를 10관사고 9백 원은 외상으로 해서 어머니는 이시고 나는 자루를 짊어지고 강을 건넜다.

비온지 오래된 강물은 무릎까지 옷을 걷어 올리면 능히 건널 수 있다. 어느새 비행기는 날아와 산 너머를 폭격한다. 과수원에 숨어 있다가 말죽고개를 넘을 때 어머니는 너무 피곤해 보인다. 나도 등이 배겨서 견디기 힘들다. 어머니와 상의해서 여기서 팔고 돌아가려 했으나 초전 가면 좋은 것이 관 당 120원~150원 한다고 하니 70원~40원이나 더 주고 산 것을 손해 보고 팔기는 고생한 것이 억울하다. 시내로 매일 많은 양이 들어간다는데 어디로 간들 본전을 건지기는 어렵게 되었다.

겨우 생계를 이어 갔으면 하고 조그만 기대를 갖고 나선 것이 첫 출발 부터가 이 꼴이니 한심하기도 하고 바보짓 밖에는 안 된다. 이곳 까지 왔으니 시내로 들어나 가보자 하고 임채룡 형이 경영하든 여관으로 갔다. 집을 불사르고 하수도에서 지내다가 악취 때문에 이집에서 며칠 지내고 있다는 사람의 고마운 주선으로 200원씩에 넘겼다.

본전 축이 안 난 것은 다행이었으나 어머니를 고생시켜 죄스러운 마음이 든다. 돌아오는 길에 둑을 넘으니 이곳은 길바닥에 물건을 널어놓은 장사치들로 법석하다. 한 달이 넘는 폭격 속에서 마음들이 어지간히 단련되었고 신경들도 둔해진 것인가. 이곳서 김영규 어머니를 만났다. 간밤부터 오늘 아침까지 혼이 난 이야기를 하며 차라리 우리 집터에다 막을 치고 지내겠다고 한다.

그러자면 현관자리에서 하수도로 구멍을 내어 급할 때는 쉽게 피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일렀다. 김군은 먹을 것도 없고 해서 치안대로 들어갔다는데 어디론가 훈련을 받으러 간다고 떠난 뒤로는 소식도 없다 한다. 오는 길에 삐라를 주어 보니 인천 영덕 포항 등지에 유엔군이 상륙했고 전과는 혁혁하며 인민군은 고립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인민군은 삐라를 뺏으며 당치도 않는 거짓에 속지말라 한다. 나는 동생 소식을 알아보려고 내무서로 강한용군을 찾아갔다. 보초병이 신분증을 제시하라 해서 도민증을 보였다. 보초병은 이것은 이승만이가 내준 것인데 무슨 소용이 되느냐며 거절한다. 그 태도에 오만이 없고 교양 있는 군인이라고 생각하면서 돌아섰다.

마침 길에서 강군을 만났다. 통영에는 인민군이 들어 왔었고 그 뒤 인민군을 환영한 사람들을 무자비 하게 처단 했다는 말을 들을 때 눈앞이 캄캄 했다. 오는 길에 묵이 어머니를 만나서 자기 집은 반쯤 불에 타고 남아 있어 그곳서 살고 있으며 열이 어머니는 불타고 남은 일그러진 시청 사택 한칸 방에 있는데 수일 내로 딴 곳으로 옮길 것이라며 탁영남군은 드무실로 피난했고 도가(술공장)는 모친이 지키고 있다는 말을 듣고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불현듯 인다. 학도병으로 나간 묵이 소식을 물어 보는 것도 잊고 섭섭히 나뉘었다.

1950년 9월 1일
아이들이 오늘이면 등교하는 날이다. 학교는 다 타버리고 언제 한자리에서 오순도순 공부할 날은 올 런지 오늘 진주로 날아간 비행기수는 70~80대는 되리라. 할일 없이 종일 하늘만 쳐다보고 헤아려 보며 소일을 한다. 저녁에 시내에서 들어온 소식은 촉석루가 불타고 있다 한다.

1950년 9월 2일
농민들은 이런 속에서도 비를 고대하고 있다. 그런데 하늘은 저렇게도 푸르고 맑기만 하니 논은 바싹 말라 목 타고 있다. 우리 있는 데서 조금 떨어진 곳에 굴이 있다. 굴은 양쪽으로 구멍이 나 있고 20명 즈음은 들어앉을 만하다. 이윽고 9대의 은색의 비행기가 느린 속도로 진주로 날아간다 . 폭음은 피난온 뒤로는 들어보지 못한 소리다. 굴 안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껑충 뛰어 올랐다가 궁둥방아를 찧는다. 진주 상공은 시꺼먼 연기만 꽉차있다. 또 조금 뒤에 15~16대의 편대가 진주로 날아간다. 석양에 들은 바는 전 유각 있는 데서 배돈병원까지의 일대가 불타고, (휘발유) 드럼통을 던지고 소이탄을 쏘니 불바다가 되어 피할 곳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웃에 와 있는 강씨가 시내로 들어갔는데 돌아오지 않는다고 부인이 걱정하고 있다.

1950년 9월 3일
강씨는 돌아 왔다. 자기 집도 타버렸고, 가족 4~5명이 모두 사망한 집도 있다 한다. 청년 몇 사람이 이 마을에 들어와서 부역에서 도망한 20여명의 명단을 적어 갔다는데 전선사령부에 보고를 한다는 것이다. 도주한 사람 중에는 부역 중에 다리를 부상당하고 집에 누워 있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하오가 되니 바람이 일고 검은 구름이 사방에서 모여든다. 바람은 끈적끈적하고 음산하며 저녁 에는 굵은 비가 쏟아지고 번개가 치며 불꽃이 눈앞을 반짝하고 지나가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쪼개지는 소리가 난다. 비는 오고 비행기소리도 없으니 이 마을 사람들은 누구 하나 없이 화색이 만면하다. 그러나 서쪽 하늘에는 불새가 뜨고 있다. 내일이면 날은 또 청명하여질 징조인가보다.

1950년 9월 4일
엷게 덮였든 구름도 벗겨지고 태양은 빛나고 있다. 이만해도 갈증은 면한 듯하다. 황형이 왔다기에 가보았다. 이대로 가면 황형가족도 언제 시내로 들어갈지 모른다. 2일 폭격에 사망자가 천여 명이나 된다고 하며 자골서 되들어간 가족4명이 참사를 당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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