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강만평(三江漫評) ⑪] 9의사 종친회
[삼강만평(三江漫評) ⑪] 9의사 종친회
  • 정인갑<북경 청화대 교수>
  • 승인 2012.11.13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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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초 필자는 난데없이 이런 편지를 받았다: ‘저의 이름은 풍영섭(馮榮燮)이며 수백 년 전 중국으로부터 한국에 망명한 명나라 대신의 후손이다. 그 역사를 정리해 보고자 하는데 교수님의 도움이 필요하다. 도와 줄 수 있는지…회답을 학수고대 하겠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필자는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으며 풍씨를 만났다. 70이 가까운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다. 청나라 수도가 심양일 때 조선왕자가 그곳에 인질로 갇혀 있었다. 그때 명나라의 대신 9명도 인질로 있었으며 조선왕자와 친하게 지냈다.

1644년 명은 멸망하고 수도를 북경으로 옮긴 대청제국은 자부심을 과시하며 조선왕자를 놓아주었다. 9대신도 풀려났지만 망국노 신세에 갈 데 없어 조선 서울에 가 살기로 작심하였으며 조선왕자 또한 쾌히 받아주었다.

9대신은 서울에 정착했고 그 후손들의 조직이 바로 9의사(義士) 종친회이며 풍씨가 회장이다. 풍씨는 근심어린 표정으로 말하였다. “9의사 종친회도 내 세대까지고 나의 아들, 손자들은 이에 별로 관심이 없다. 내가 죽으면 후손들은 이 역사를 아예 잊어버릴 것 같아서 이에 관한 책을 남겨놓으려 하는데 자료를 찾을 수 있어야지. 정교수님께서 제발 도와 달라.”

사실 풍씨는 이 일로 북경도서관, 북경대학도서관, 요녕성도서관 등에 편지를 써봤지만 회답 한통 받지 못하였다. 한국 체류 중인 북경대 조선어 교수 이귀배(李貴培)의 귀띰으로 ‘정인갑’이라는 이름을 알게 되어 일루의 희망을 품고 마지막으로 편지를 써보았다고 한다. 필자는 그에 대한 경모의 심정을 금할 수 없었으며 쾌히 동의하였다.

필자는 꽤나 신경을 써서 중국사회과학원 도서관장서 <대명유민사(大明遺民史)>에서 9의사에 관한 자료를 찾았다. 그러나 복제 해주지도 않고(1919년 이전의 책은 복제 금지), 비치된 필름도 없었다. 해당 도서관에서 근무하는 대학 동문을 찾아 몰래 빌러내어 복제하여 풍씨에게 드렸다. 풍씨는 그 자료에 근거하여 <한국인의 종주(宗周) 사상> 등 책을 만들었다.

후에 필자는 풍씨와 연락이 두절되었다. 아마 풍씨는 이젠 사망하였을 것이고 9의사 종친회는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1644년으로부터 지금까지 368년이 지났으니 이미 15세대 내려왔을 것이고 그 후손의 인구는 만 명이 넘을 듯하다.

한국의 적지 않은 족보에 초대 조상이 중국에서 온 아무아무 고관(高官)이고 또 아무아무 조상이 중국의 송(宋). 명(明) 또는 청(淸)의 과거시험에 진사급제하고 금의환향하였다고 자랑하지만 중국문헌을 아무리 찾아보아도 근거가 없다. 대부분은 사대주의사상에 젖어 조작한 것이라 추측된다.

그러나 9의사종친회만은 확실한 중국 명나라 고관의 후손이다. 9의사 종친회 외에도 중국대륙으로부터 한반도로 이민한 중국인이 또 있을 것이다. 그들은 중국민족인가, 아니면 한민족인가? 에누리 없는 한민족이다.

주위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도 자기네를 한민족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민족의 속성을 혈연으로 보기 보다는 문화로 보는 편이 더 적합할 것이다. 단기적으로 보면 혈연이지만 역사의 대하에서 보면 특정 역사에 속하는 문화이다.

1992년 필자는 풍씨의 안내로 경기도 가평군 하면 대보리 대보산에 가본 적이 있다. 깎아 세운 듯한 암석에 ‘朝宗巖’(朗善君 李俁의 필적), ‘萬折必東, 再造藩邦’(선조대왕 필적), ‘思無邪’, ‘非禮不動’(明 毅宗 필적), ‘日暮途遠, 至痛在心’(효종대왕이 학자 宋時烈에게 내린 필적) 등이 조각되어 있다. 산비탈에는 明 毅宗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 비치돼 있다. 임진왜란 때 지원군을 보내 왜적을 물리쳐준데 대한 감사의 뜻을 표시하는 곳이다.

몇 백년간 9의사 종친회는 이곳의 제사를 지냈으며 풍씨가 지낸 제사도 수십 년이 된다고 한다. 필자도 경건한 마음으로 제단에 촛불을 붙이고 술을 붓고 큰절 세 번을 하였다. 이민 350년이 지났지만 종친회를 품고 모국을 그리는 정신, 수십 년을 하루와 같이 제사 지낸 성의, 정말 필자의 마음을 감동시켰으며 눈시울이 뜨거워났다.

이 일이 중국에 알려져 <인민일보> 해외 판에 풍씨의 사적이 실려 졌으며 풍씨를 ‘해외적자(海外赤子)’라고 불러주었다. ‘적자’는 고향에 대해 어린아이처럼 순결한 감정을 품고 있는 사람을 일컫는다.
그러나 해외에 사는 우리 겨레는 어떠한가?

중국 조선족의 경우 풍씨와 대비하면 너무나 부끄럽다. 조만간에 중국 조선족은 중국인에 동화되고 말 것임이 뻔하다. 그러나 그 누가 자기 가족의 역사를 엮어 후세에 남겨줄 생각을 해봤나? 이런 목적으로 필자는 지금 한국에 와서 족보에 관한 일을 하고 있다.

해외에 사는 우리 겨레들이 적어도 가승(家乘: 가정의 역사) 정도는 남겨야 한다는 문장을 이미 여러 편 썼다. 많은 중국조선족이 이에 호응하여 주기 바라며 만약 필자의 도움이 필요하면 서슴없이 연락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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