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Garden] 게발선인장
[Essay Garden] 게발선인장
  • 최미자<미주문인협회 회원>
  • 승인 2013.03.05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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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미자 (미주문인협회 회원)
아주 오래전, 부산에서 만난 꽃. 서울에서 비행기를 타고 온 후, 고혈압으로 세상을 떠난 숙부의 사십구재 날이었다. 여호와증인이던 숙모는 전통장례식에 관심이 없어, 두 고모와 조카인 우리가 절에서 제사를 지내려고 모였다. 그곳 비구니 사찰 보덕사에서 내가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내든 스님 방의 작은 화분에 핀 우아한 꽃.

추운 겨울이라 사찰의 뜨거운 방바닥 위의 내 엉덩이 밑으로 시린 두 손을 녹이다. 문득 나의 시선이 멈추었다. 가구가 전혀 없던 넓은 방의 종이 장판 위로 윤기가 흐르던 깔끔한 분위기는 지금도 환상적이다. 여자 스님들만 사는 금남의 집에서 설레던 나는 방 모퉁이에 있는 조그만 앉은뱅이책상 위에 놓인 귀여운 화분 하나를 보며 혼을 빼앗겼다. 지금처럼 디지털 사진기를 가지고 다니지 않았기에 아직도 나의 뇌리에 꼭 찍혀있다.

20대의 내가 한때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갈망하던 여스님의 모습과 희귀한 빨강 꽃 화분. 병약해 보이던 법인 스님은 그 꽃의 이름이 게발선인장이라며 가르쳐주었다. 아, 맞다. 우리가 맛있게 뜯어먹었던 바닷게의 발 모양처럼 생긴 꽃. 한 개의 줄기 매듭에서 두 개로 갈라지며 여러 게의 발 모양으로 뻗어 나가는 식물. 초록색 줄기 끝에는 앙증맞은 꽃들이 달려있고 대롱 모양 꽃의 끝 부분이 활짝 펴지면서 속눈썹 꽃술이 늘어진 우아함. 어디 꽃들만 귀티를 내는가. 사람도 스스로 모습과 태도, 그 만의 인격으로 고귀한 품격을 보여주는 것을.

어디서 구해왔을까. 당시 스님께 여쭈지 못했던 아쉬움 속에 그 꽃을 1990년 미국 샌디에고에서 다시 만났던 반가움. '홈디포'에 들렸다 가 정원수가 있는 가든 센터에서 그 화분을 보자마자 한 개도 아니고 세 개나 사들여 나는 함께 큰 화분에 옮겨 심었다.

자식처럼 날마다 정성 들여 키우며 여섯 해가 지나고, 가지를 끊어 작은 화분에 옮겨 심으며 식구를 늘려 나갔다. 집에 오는 손님마다 그 화분에 탐을 내었다. 잘 기르겠다는 다짐을 받고서야 딸을 시집보내듯이 선물했다. 벌써 스무 두어 개나 우리 집을 떠났다.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김 사장님만 겨울이면 꽃이 피었다고 소식을 주시더니만 유럽 딸네 집으로 간 후론 소식이 없다.

생존력이 강하여 목마르지 않을 정도의 물 그리고 바람을 쐐 주면 잘 자랐다. 꽃이 피고 나면 산모처럼 진기가 빠져버리듯 줄기가 하나 둘 시들며 죽기도 했다. 햇빛을 보면 초록색 줄기가 붉은색으로 변하며 윤기도 사라졌다. 병들어 죽어가는 모습이 우리 인간사와 똑같다. 손끝으로 잘라내며 사랑을 퍼부어주니 다시 자랐다. 해마다 불어나 탐스러운 큰 화분이 어느덧 네 개나 되었다.

꽃의 역사가 궁금하여 알아보았다. 1818년 유럽에서 재배가 시작되었고, 영어이름은 크리스마스 선인장이지만 독일과 프랑스, 스페인에서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뉴질랜드에서는 Chain Cactus라고 부른다. 수직으로 올라가는 Truncata 종류가 발톱 모양 같다고 하여 게발선인장이라고도 부른다고 적혀있다.

미국에서는 11월 말경에 시작하여 12월 내내 꽃을 피우니 사람들이 크리스마스선인장이라고 부른 모양이다. 나는 우리 집 현관 앞에 장식해 놓고 꿀을 빨아 먹는 벌새의 방문을 기다린다. 정원의 꽃들이 모두 옷을 벗고 있는데 우아함으로 피어나는 겨울꽃. 그 꽃을 보면서 나는 꿈도 꾸어본다. 종종 부딪혀야 하는 힘든 삶이건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가느다란 가시를 몸에 달고 살아가는 잎줄기처럼 끊어질 듯한 절벽의 순간에서도 그처럼 나도 우아하게 피어나고 싶다고.

서식지가 브라질의 동남부 해안가 절벽이라니 상상만 해도 멋진 꽃이다. 바위틈에서 자라는 끈질긴 생명력 또한 존경할 만하지 않은가. 하지만 그 우아한 꽃도 며칠이 지나면 허망하게 마른 꽃이 되어 고개를 떨구었다. 꽃이나 사람이나 우린 이처럼 한계 있는 삶이기에 살아 있는 순간마다 소중하고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기쁨을 주는 게발선인장 꽃이 피는 겨울을 나는 해마다 기다린다. 우리의 삶도 인내 속의 오랜 기다림이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얼마 전, 게발선인장 꽃 도둑을 맞았다. 여러 사람과 즐기고 싶어 집 근처 가게에 제일 먼저 핀 화분을 11월에 갖다 놓았다. 꽃봉오리가 한 달은 볼 수 있어서였다. 그런데 주인은 그 화분을 자기 집으로 한마디 말도 없이 가져가 버린 것이다. 긴 세월 정이 들고 낡은 화분이라 꽃이 지면 찾아오고, 지난해처럼 다른 화분을 선물로 드리려던 참이었다.

아름다운 꽃이 얼마나 탐이 났을까 하고 이해도 해보았지만, 경우가 아니었다. 세상에 꽃 도둑과 책 도둑은 나무라지 마라던가!

 [필자 소개] 교포월간지 ‘피플 오브 샌디에고’ 주필 역임, 수필집 ‘레몬향기처럼(2007년)’과 ‘샌디에고 암탉(2010년)’을 출간했고 한국문인 및 미주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재미수필가. 샌디에고 라디오코리아(www.sdradiokorea.com)에서 '최미자의 문학정원'을 매주 금요일 연출과 진행 중이다.

▲ 게발선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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